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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Mar 03. 2021

일기로 만나는 스물아홉의 나

아주 오래된 소원이 하나 있다. 스물아홉에 여행하면서 썼던 일기를 정리해서 개인 소장용 책으로 펴내는 것이다.


스물아홉인 내게 서른은 무시무시한 무엇이었다. 서른에는 번듯한 회사에 다니면서 돈도 꽤 모아 두고 당연히 결혼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결혼은커녕 남자 친구도 없고 다니던 학원에서의 자리는 불안정했으며 모아놓은 돈도 별로 없었다.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데 벌써 서른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불안하고 우울했다.


일 년을 조급한 마음으로 동동거리면서 살다가 11월에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직장까지 잃게 되다니.. 허망한 마음에 도망치듯 호주로 떠났다. 한 달 동안 동갑 친구와 함께 현실을 잊고 그저 하루하루를 보냈다. 느긋한 여행 덕분인지 서른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라졌다. 무너질 줄 알았던 하늘은 멀쩡했고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 열심히 살았다. 바쁘게 지내면서도 힘들 때마다 여행을 추억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한 달 동안 썼던 일기를 꼭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겠다고... 그렇게 매년 결심한 것이 벌써 12년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일기 정리를 미룬 것은 ‘바빠서, 게을러서, 사진 정리를 못해서’라고 여겼다. 일을 할 때는 바빠서, 휴직 중에는 일기 정리보다 더 재미있는 게 많아서 혹은 게을러서 미루게 된 줄 알았다.


미작(글쓰기 모임)에서 일기를 정리하겠다고 마음먹고 이틀 분량의 일기를 옮겨 적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을 때마다 자꾸 부끄럽다는 감정이 올라왔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울까.. 즐거운 추억을 담은 일기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일기 정리를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나는 현재를 살고 싶고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면 원하는 미래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과거는 잊어도 좋은, 기억하기 싫은 것이었다. 오래된 일을 기억해 낼 때마다 좋았던 점이나 잘 해냈던 일들보다 부족했던 모습, 후회되는 일, 부끄러운 기억들이 우르르 떠올라서 괴롭다. 자꾸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예전 기억을 꾹꾹 눌러버렸나 보다. 즐거움이 가득한 일기를 들춰보는 것마저 두려워질 정도로 과거의 못난 모습에만 갇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기억력이 너무 나쁘다’는 믿음도 사실이 아니다. 일기를 읽다 보면 하루하루가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라서 당황스럽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억을 억누르며 살았던 건지..


글쓰기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게 꽁꽁 싸매 두었던 지난날을 끄집어낸다. 무작정 싫다고만 여기던 과거를 진솔하게 들여다보고 과거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감정적인 위안을 얻을 뿐만 아니라 내 모습을 이해하고 인정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번에는 아주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일기 정리를 끝내고 싶다. 그 시간을 통해 마음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었던 과거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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