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망 Apr 24. 2021

환상에 젖어서 산 것들 (픽션입니다)

“입으려고 산 것이 아니라 모두 환상에 젖어서 산 것들이었다. 자기 앞의 생 p.323”


*

‘이럴 수는 없다. 분명 옷이 많은데..’


옷장을 열며 탄식했다. 가로 3.5m, 세로 2.2m짜리 옷장에는 그동안 사 모은 옷이 가득하다. 색상별로 정리된 내 옷 사이로 남편의 옷이 겨우 한 뼘 남짓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원피스부터 흰색 블라우스, 최근 유행하는 치마, 평범과는 거리가 먼 화려한 티셔츠, 핏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 모은 청바지.. 어느 하나 입을 만한 게 없다.


“아니, 그렇게 자주 사면서 입을 옷이 없다는 게 말이나 돼?”


답답해진 남편이 소리쳤다.


‘그러게나 말이다...’


모처럼 여행을 가려는데 옷이 없다니.. 풀이 죽었다. 지난주에 인터넷으로 주문한 원피스를 꺼냈다. 분명 55라 잘 맞아야 하는데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청바지를 두 벌이나 주문했는데 너무 작아서 동생에게 줬다. 인터넷 쇼핑을 하기가 참.. 겁이 난다. 어째 요즘엔 55라고 해도 55가 아닌 것 같다.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요즘 옷은 왜 이렇게 작게 나오는 건지.. 피팅룸에 들어가서 맞지 않는 옷에 몸을 구겨 넣어야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결혼 전에는 타이트한 청바지나 짧은 치마를 즐겨 입었는데 자꾸 펑퍼짐한 옷을 입어서 살이 쪘나.. 그래도 그럴 리가 없지. 암! 난 아직 55가 분명하다. 마음에 드는 옷을 꺼내 입어보지만 전부 못마땅하다. 동네에서 왔다 갔다 할 때 입는 편한 옷은 잔뜩 있지만, 여행지에서 입을만한 옷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새로 산 깨끗한 티셔츠와 동생이 커서 못 입겠다고 하며 준 바지 한 벌을 겨우 건졌다. 또다시 옷장을 헤집어 겨우 찾은 데님 원피스까지 두 벌이 몸에 맞는 전부다.


“아니, 어쩜 이럴 수가 있어! 왜 맞는 옷이 하나도 없냔 말이야!!!”

“그러게 내가 뭐랬어. 백화점에 가서 치수에 맞는 옷을 사라니까 왜 자꾸 인터넷 쇼핑을 해. 젊었을 때나 55지 이젠 66, 아니 77은 입어야 돼.”


기가 막혔다. 아무리 살이 쪘어도 그렇지 77은 너무 한다. 아직 푹 퍼질 나이도 아니고 결혼할 때에 비해 겨우 몇 kg 쪘을 뿐인데..


“몇 kg? 정신 차려. 웨딩드레스 입는다고 살 빼서 55였지. 왜 그렇게 본인을 몰라.”


독한 소리를 하는 남편이 꼴 보기 싫어서 작정을 하고 사이즈를 재보기로 했다. 줄자를 들고 이리저리 사이즈를 재서 꼼꼼히 기록하는 내가 한심한지 남편은 자겠다며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

남편이 출근한 뒤 전 날 꺼내놓은 옷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전부 다 비워. 옷에 몸을 욱여넣으려고 하지 말고 당신에게 맞는 옷을 사. 현실을 직시해.”


남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나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 55가 아니었던가. 왜 이렇게 몸이 불었지? 계속해서 사 모았던 옷들이 맞지 않는 이유가, 나에게 있었다. 나는 내 몸을.. 몰랐다.


잔뜩 쌓여 있는 속옷을 전부 꺼내 입어 보았다. 편한 브라탑을 주로 입다 보니 브래지어를 입을 일이 없었다. 하나도 맞는 게 없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나를 몰랐을까. 왜 그렇게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외출할 때마다 옷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실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 때문이었다니.

작가의 이전글 왜 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