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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훈 Jan 22. 2022

베토벤의 또 하나의 우주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

베토벤이 남긴 17곡의 현악사중주 곡들은 그의 9개의 대 교향곡과 더불어 인류의 위대한 유산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그의 교향곡들에 비해 현악사중주의 선호도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요. 이런 비인기의 주된 요인은 현악사중주를 어렵고 지루하게 느끼는, 매니아적인 분야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악사중주는 클래식 음악의 기본을 이루는 정수(精髓)입니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그리고 첼로로 이루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이 가능성을 깨달았고 현악사중주를 통해 우주를 표현하려고 하였습니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는 크게 3기로 분류됩니다.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Op. 18번의 6곡들은 베토벤의 스타일이 확립되기 전의 작품들로 선배이자 스승인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영향이 많이 보입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일반적인 고전파 형식을 따르지만 그의 ‘혁신’의 기미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지요. 중기로 들어서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베토벤 현악사중주의 명작들이 나타납니다. 러시아의 백작인 라주모프스키의 의뢰로 작곡한 Op. 59의 3곡은 '라주모프스키’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들입니다. 무엇보다 베토벤만의 ‘혁신’이 본격적으로 나타남으로 곡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으며 듣는 이에게 감동을 선사해주는 작품들입니다. 또한 Op. 74번 ‘하프’와 Op. 96번 ‘세리오소’도 그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작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더욱 주목하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6개의 후기 현악사중주 작품들입니다.


베토벤은 Op. 96 ‘세리오소’를 작곡한 후 14년 동안 현악사중주 곡을 한 곡도 작곡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9번 교향곡 '합창'을 쓰고 난 후 죽기 직전까지 쓴 곡들이 6개의 후기 현악사중주 작품들 (Op. 127,130,131,132,133,135)입니다. 이 곡들은 베토벤 음악의 완성이라 말할 수 있으며 새로운 음악의 미래를 제시해주는 작품들입니다. 이 당시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시기였으며 여러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후기 현악사중주 작품들을 듣고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베토벤의 재능은 이제 끝이 났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귀에 들리는 물리적인 소리에 의지한 것이 아닌 마음과 영혼의 소리를 듣고 곡을 써 내려가는 '초월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6개의 후기의 작품들 중 가장 주목하는 곡은 Op. 132번과 ‘대 푸가’라고 이름 부쳐진 Op. 133번입니다. Op. 132번은 특이하게도 5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3악장에는 ‘리디아 선법에 의한, 병으로부터 회복된 자의 신에 대한 성스러운 감사의 노래’라는 문구가 적혀있는데 베토벤은 이 곡을 작곡하던 당시 지병이었던 장염이 악화되어 2악장을 마친 후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병이 호전되자 베토벤은 애초의 계획과 달리 3악장의 형태를 바꾸었고 신에 대한 감사의 노래로 작곡한 것입니다. 제3악장은 무려 15분이 넘는 긴 악장이지만 삶에 대한 고찰과 감사의 마음이 담긴 음악은 듣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중간 아디지오 부분에는 ‘새로운 힘을 느끼면서’라는 베토벤의 지시가 적혀있는데 이는 베토벤 음악의 주된 모토인 '암흑에서 광명으로'의 변함없는 신념을 느끼게 해 주며 이 곡에 희망의 힘을 더해 줍니다. 마지막 제5악장은 원래 베토벤이 제9번 교향곡 ’ 합창’의 마지막 악장으로 쓰려고 스케치해 놓았던 것이기도 합니다.


대 푸가의 자필악보


베토벤 최대의 문제작인 ‘대 푸가’는 원래 Op. 130의 일부분이었지만 출판업자와의 마찰로 인해 Op. 133으로 독립하여 발표되었습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이 음악이 정말 고전시대의 작품이 맞나? 하는 의문과 놀라움에 사로잡힙니다. 그 당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리듬과 음정, 그리고 난폭한 음량과 이해할 수 없는 고요함, 사람들은 베토벤이 완전히 귀가 먹었기 때문에 이런 해괴망측한 곡을 썼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베토벤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 있었고 시대를 초월한 음악을 작곡한 것입니다. 이 곡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클래식 음악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남을 인정하지 않기로 유명했던 바그너도 이 곡에 경의를 표했으며 20세기의 혁신적인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도 이 ‘대 푸가’를 두고 ‘영원한 현대 음악’이라고 칭송할 정도였습니다. 2006년 개봉한 영화 ‘카핑 베토벤 (Copying Beethoven)’은 '대 푸가'의 음악으로 영화가 시작되는데 '대 푸가'를 작곡했을 당시의 시대상황과 베토벤의 심정을 다루고 있어 추천할 만합니다.


우리는 베토벤을 악성이라 칭하며 위인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왜 그가 위대한지 정작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의 합창 교향곡 하나만으로도 그의 위대함을 논할 수 있지만 그의 후기 현악사중주 곡들은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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