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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훈 Feb 20. 2022

진실된 문화는 항상 평화에 봉사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0번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구 소련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imitri Chostakovitch, 1906~1975)의 15개의 교향곡은 20세기 현대사의 기념비적인 걸작이며 서양음악사에 기적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수백 년을 지탱해오던 서양음악 형식의 근간인 조성이 붕괴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더군다나 서양음악의 상징과도 같은 교향곡이 조성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져 갔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조성에 기초를 둔 교향곡을 15곡이나 쓴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시대의 조류를 역행하는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소련 공산당의 음악정책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소련당국은 당시 음악 사조의 흐름인 무조 음악을 통렬히 비판했으며 보수적인 19세기 양식을 작곡가들에게 강요했습니다. 또한 1930년대 스탈린이 주장한 소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당시 소련 내의 모든 예술을 위협했습니다. 거의 일생을 구 소련의 공산정권 아래에서 살았던 쇼스타코비치도 정치적 이념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소련 당국은 이 천재 작곡가의 재능을 그들의 사회주의 이념의 도구로 이용하였고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과 당의 요구에 맞는 작품을 만들도록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쇼스타코비치는 창작활동에 당의 간섭을 감수해야만 했으며 때로는 국가적 영웅으로, 한 때는 비판의 대상으로 낙인찍히는 등 자유롭지 못한 생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교향곡들을 살펴보면 제1번과 마지막인 제15번은 전통적인 교향곡 형태인 순수 절대 음악이고, 제2,4번과 제13,14번은 성악이 들어있으며 제7,8,9번은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되어 쓰였습니다. 그중 제7번 ‘레닌그라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레닌그라드(지금의 생 페테르부르크) 시가 나치 독일군에 포위되었을 때 방공(防空) 대원으로 근무하면서 쓴 작품으로 공산 당국으로부터 소비에트 예술의 위대한 성취라는 찬사를 받은 작품입니다. 제5번 교향곡 ‘혁명’은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교향곡이며 스탈린으로부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충족시킨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작품이며 제4번 교향곡은 정치적인 이유로 공산 당국의 힐책이 두려워 일부러 26년간이나 세상에 내놓지 않았던 곡입니다. 제10번 교향곡은 소련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문제작이며 제13번 교향곡 ‘바비야르’는 반체제 시인 에프투센코의 시를 사용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레닌그라드 음악원 옥상에서 소방대원으로 근무하는 쇼스타코비치, 1941년 7월
예술은 그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는 거울

“나는 단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감정이나 정열을 그리고 싶었다.”….“뜨겁게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반대하며 이 지상에서 인류의 사명이란 파괴가 아닌 창조임을 생각하게 하는, 현대인들의 사상과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0번은 제5번 ‘혁명’과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자 그의 최고의 교향곡으로 손꼽힙니다. 이 작품은 1953년 12월 17일, 레닌그라드에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제9번 교향곡을 발표한 후 무려 8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1945년 발표한 그의 9번 교향곡은 매우 단출하고 소규모의 형식으로 작곡되었는데 이것은 베토벤과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과 같은 장대한 작품을 기대했던 소련당국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쇼스타코비치는 다시금 ‘형식주의자’로 낙인찍혀 악명 높은 '지다노프 비판'을 받게 되었고 당연히 그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사회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고 쇼스타코비치는 짧은 기간에 교향곡 제10번을 작곡하여 발표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1953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이 곡을 작곡했다고 밝혔지만 일설에는 이미 그가 1951년에 이 작품을 완성해 놓고 있었으며 1946년부터 스케치를 진행해 왔다고 합니다. 초연 직후 이 곡은 많은 논쟁에 불을 지폈는데 그 첫 번째는 전체적으로 곡이 너무 어둡고 무겁기 때문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이어야 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위배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앞 세 개의 악장과 마지막 악장 간의 불균형에서 오는 미학적인 문제로서 비중이 큰 1,3악장의 길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2,4악장의 길이가 짧고 4악장이‘긍정적’으로 곡을 끝마치고는 있지만 뚜렷한 결론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논란 속에 작곡가 하차투리안은 10번 교향곡의 결함은 인정하면서도 이 곡이 가지고 있는 격정과 긴장을 ‘낙관적인 비극’이라고 평하며 쇼스타코비치를 옹호하고 나섰는데 결국 3일간에 걸쳐 이 작품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고 쇼스타코비치는 이 토론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논란에 대답하고 더 이상의 언급은 회피합니다.


쇼스타코비치가 1975년 사망한 후 1979년 소련의 망명 음악학자인 솔로몬 볼코프가 발표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회고록 “증언”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를 뒤집어버리는 내용이 담겨 있어 충격과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쇼스타코비치가 표면적으로는 스탈린과 당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했던 소비에트의 충성스러운 작곡가였지만 내면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증오했고 작품에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으며 소비에트 이념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던 반체제인사라고 역설합니다. 이 회고록이 발표되자 소비에트 측에서는 거짓증언이 담긴 위서(僞書)라고 주장했고 서방측에서는 볼코프의 증언을 지지하며 양쪽의 대립은 심화됩니다. 여전히 이 책의 진위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아들인 막심은 ‘아버지는 평생 동안 한 번도 공산주의를 신봉한 적이 없다’고 밝히며 이 책의 내용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제10번 교향곡은 전체적으로 말러 영향이 느껴지는 교향곡으로 전체 연주 길이가 1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대작입니다. 제1악장은 25여분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지만 구성적이기보다는 서정적이며 소박한 인간미와 비장한 단호함이 대비를 이루며 곡을 이끕니다. 제2악장은 매우 빠른 템포의 거칠고 폭발적인 냉혹한 음형을 보여주는데 볼코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작곡자는 이 악장을 스탈린의 초상이라고 밝혔으며 스탈린이 좋아했던 노래의 단편을 사용하여 작곡했다고 합니다. 제3악장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이름을 딴 음형 D-S-C-H (독일식으로 D-Es-C-H)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 다른 모티브에서는 그의 제자였고 사랑했던 여인 엘미라 나시로바라의 이름을 딴 음형 (E-La-Mi-Re-A; 독일식과 프랑스식 표기의 혼합)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제4악장은 어둡고 슬픈 긴 느린 서주로 시작하여 (쇼스타코비치는 이 것이 구성상 악장 전체의 균형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밝고 긍정적인 빠른 선율로 진행되는데 스탈린의 고향인 그루지야의 춤곡인 고파크와 마치 그것과 대립하는 듯한 D-S-C-H의 음형이 나타나며 결국 곡은 승리감에 가득 차며 밝고 화려하게 끝을 맺습니다.


우리의 역사에도 예술이 정치에 종속되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8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 ‘혁명’을 듣기 위해서 은밀히 테이프를 주고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같은 정치적 이념은 사라지고 그의 음악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예술은 그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는 거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너무나 완벽하게 그 역할을 해내었다고 생각합니다. 쇼스타코비치 자신에게는 너무나 비극적인 현실이었지만 그 현실로 인해 그의 음악은 불멸로 남게 된 것입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0번 2악장

https://youtu.be/C2T97GsY0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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