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함과 재치, 긍정의 작곡가
“어렵고 지루하게만 생각했던 클래식 음악인데 교향곡 제목이 ‘놀람’이라니?
‘고별’ 교향곡은 어떤 음악이기에 제목이 고별일까?”
클래식을 즐겨 듣지 않는 분들이라도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 ‘고별 교향곡’ 등의 제목은 친숙하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학교 교육의 영향도 있지만 부제의 친근함이 더 큰 이유이겠지요. “어렵고 지루하게만 생각했던 클래식 음악인데 교향곡 제목이 ‘놀람’이라니? ‘고별’ 교향곡은 어떤 음악이기에 제목이 고별일까?” 누구나 한 번쯤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파파 하이든’의 음악을 만나는 순간 하이든만의 재치와 유머를 통해 행복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교향곡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 베토벤과 함께 고전주의 음악을 선도했던 중요한 인물로 클래식 음악의 정수인 ‘교향곡’이라는 장르를 확립하고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77년의 생애 동안 그가 작곡한 교향곡은 자그마치 108곡에 이르지요. 그리고 교향곡과 더불어 70여 곡의 현악사중주 작품을 남기며 이 장르의 기틀을 다졌고 무엇보다 서양음악의 근간을 이루는 소나타 형식을 완성시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과 달리 하이든의 부모는 음악가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차 바퀴를 만들었고 어머니는 주방에서 일하던 하녀 출신으로 하이든의 집안은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든의 부모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 알아차렸고 6살의 어린 하이든을 하인부르크라는 소도시의 친척집으로 보내어 음악교육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능 있는 소년들을 찾아다니던 빈 슈테판 성당 음악감독인 게오르크 폰 로이터에게 발탁되어 빈으로 가게 된 하이든은 지금의 ‘빈 소년 합창단’의 전신인 성 슈테판 소년 합창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악기 연주법을 배우며 음악적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당시 유럽 가톨릭 교회는 여성이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여 성가대의 여성 성부를 소년들이 담당하였는데 활동을 하다 변성기가 온 단원들은 쫓겨나다시피 성가대에서 나가야만 했습니다. 변성기로 목소리가 변한 대부분의 소년들은 버림받다시피 방치되었고 선택받은 소수의 소년 들만이 목소리 보존을 위해 카스트라토(남성 거세 가수)의 길을 택하지만 대부분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하이든의 회상에 따르며 그도 카스트라토가 될 뻔했습니다. 하이든의 미성과 음악적 재능을 아깝게 여긴 음악감독이 하이든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카스트라토로 만들자고 제안하였는데 다행히 하이든의 아버지는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변성기로 인해 합창단에서 방출된 하이든은 거리 공연을 통해 돈을 벌고 노숙을 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지만 에스테르하지 가문과의 만남은 하이든 삶의 큰 전환점이 됩니다. 18세기 왕족이나 귀족들은 음악가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궁에 머물게 하면서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불공정한 종속 계약이기는 하지만 당시 음악가들에게는 꽤 안정된 일자리였지요. 모르친 백작 가문의 악장을 거쳐 1761년 헝가리 왕족인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고용된 하이든은 이후 30여 년을 음악감독으로 일하며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 냅니다. 비록 고용주의 취향에 따라 곡을 써야 했지만 세상과 고립된 생활은 오히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하이든만의 독창적인 음악을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790년 에스테르하지 가문과의 계약이 끝난 후 하이든은 공연기획자 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한 페터 잘로몬 (Johann Peter Salolmon, 1745~1815)의 주선으로 영국을 두 차례 방문합니다. 그리고 일명 ‘런던 교향곡집 (또는 잘로몬 교향곡집)’이라 불리는 12곡의 교향곡 (제93번~제104번)을 발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지요. 특히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인쇄술의 발달은 악보 산업을 부흥케 했고 하이든의 악보들은 전 유럽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가며 그의 명성은 높아만 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이든의 인기를 악용하여 악보 업자들이 다른 이의 작품을 하이든의 곡으로 속여 판매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이로 인해 몇몇 하이든의 작품은 여전히 진위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1795년 다시 빈으로 돌아온 하이든은 귀족의 고용인이 아닌 국제적인 명성과 부를 가진 거물급 인사가 되었고 말년에는 주로 종교음악 작곡에 전념하다 1809년 나폴레옹이 빈을 침공하던 때에 세상을 떠납니다. 하이든은 가난으로 인해 작곡도 독학으로 익혀야 했고 청소년기에 제대로 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해 키도 작았지만 유쾌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또한 뛰어난 유머감각과 온화한 성품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하이든의 이런 기질은 그의 음악에 고스란히 녹아 있어 듣는 이들에게 유쾌한 행복감을 선사합니다.
연주회 영상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