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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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겨울 날씨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잿빛이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회색 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고 스산한 바람은 자꾸만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런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새 기차는 승강장에 정차한다. 역의 이름은 아이제나흐(Eisenach),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탓에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을만한 도시이지만 나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끈 이유는 바로 한 음악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의 생가가 이곳에 있다. 기차에 내려서 시내로 들어서자 흐린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채로운 색깔의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안내책자를 의지해 찾아간 바흐의 생가도 노란색 외관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맞은편 정원에 서있는 바흐의 동상이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자 오래된 목조건물의 냄새가 나의 코를 통해 정신으로 스며들면서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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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년 3월 23일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너무나도 작아 보이는 한 아기의 세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 (1645~95)는 아이제나흐의 악사로 그의 막내아들인 요한 제바스티안의 세례를 위해 교회를 찾은 것이다. 중부 독일의 튀링겐 지방으로 이주해 온 후 바흐 가문은 200여 년 동안 50여 명의 음악가를 배출하였고 독실한 루터파 신앙인들이었다.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쌍둥이 형인 요한 크리스토프(1645~93)는 아른슈타트의 악사로, 맏형인 게오르크 크리스토프(1642~97)는 교회 합창지휘자인 칸토르로 일하고 있었고 그들의 아버지인 요한 크리스토프(1642~1703)는 아이제나흐의 교회 오르가니스트와 작곡가로서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었다. 이런 음악적 환경에서 요한 암브로지우스가 막내아들 제바스티안에게 어릴 적부터 음악을 가르쳤던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요한 제바스티안은 7세가 될 무렵 성 게오르크 교회 부속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여 성가 대원으로 일을 하며 집안 살림을 도왔다. 하지만 9세가 된 해인 1694년, 제바스티안은 어머니를 여의고, 잇달아 그다음 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제 부모를 잃은 어린 제바스티안은 고아가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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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생가 입구에 놓여있는, 마치 바흐가 썼었던 것 같은 멋진 깃털 펜으로 방명록에 기록을 남긴 후 좁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자 한 가정집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나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고 말았다. 잠시 후 바흐 가족이 외출에서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것 같은 모습들, 특히 침실에 놓여있는 작은 요람은 그곳에 누워있는 어린 바흐의 모습을 자연스레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 있는 현대식 유리 진열장 속 악보들과 악기들은 내가 현재의 시간 속에 있음을 자각시켜준다. 음악을 하는 이에게 위대한 음악가의 예술혼을 찾는 여정은 마치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의 기분과 같은 것이다. 지금 나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생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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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친을 잃은 어린 제바스티안을 거둔 것은 그의 맏형인 요한 크리스토프(1671~1721)였다. 제바스티안보다 14세나 연상인 크리스토프는 오르도르프에서 오르간 주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형을 따라 오르도르프로 이주한 후 오르간과 챔발로를 배우며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음악적 성장을 보인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당대의 거장들인 프로베르거, 케를, 북스테후데, 뵘 등의 악보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어린 제바스티안은 좀처럼 악보를 보여주지 않는 형을 피해 한밤중에 그 악보들을 몰래 사보 하여 공부하였다. 거장들의 악보를 통해 하나하나 그들의 기법들을 습득할 때마다 어린 제바스티안은 행복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무리한 공부가 훗날 그에게 신체적 불행을 가져다 주리라고는 미쳐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