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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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생가의 한편에는 당시의 악기들을 보고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작은 홀이 마련되어있다. 어느 정도 관객들이 모이자 한 연주가가 설명과 함께 연주를 시작한다. 바흐가 사용했다던 하프시코드의 아련한 음색이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그리고 옛 오르간의 공기 벨트를 체험해 보며 당시 바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바흐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르간이라는 악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 1702년에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곧바로 직업 음악가로 활동해야 하는 처지였고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교회 오르가니스트 자리였다. 이미 바흐 집안의 다수가 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이지만 시작은 그리 쉽지 않았다. 마침내 바흐는 1703년 8월 아른시타트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한다. 이 시기에 바흐의 독자적인 양식이 확립되었고 휴가 중 뤼벡 시에서 접한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연주는 바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유명한 <토카타와 푸가 d단조 - Toccata and Fugue in d minor BWV565> 도 이 시기에 탄생한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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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에 도착한 날은 마침 성탄절이었다. 여기저기 캐럴송이 울리고 흥겨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성탄절 풍경과는 달리 이곳은 너무나 조용하다. 한산한 거리와 조용한 도로, 그리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 도시의 첫인상, 선입견일지 모르지만 너무나 종교적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목적으로 이 도시를 찾는 모든 사람들은 이 느낌에 동의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흐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치히는 바흐가 마지막 생을 보낸 곳으로 주옥같은 걸작들이 탄생한 곳, 그 역사의 중심에 있는 성 토마스 교회는 바흐의 추종자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1723년 5월, 작곡가 요한 쿠나우의 후임으로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Cantor:음악감독)로 취임한 바흐는 마지막 생애까지 27년 동안 그 지위에 있었는데 하루하루가 바쁜 나날이었다. 그는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 등에서 주일마다 연주할 칸타타를 작곡, 연주해야만 했으며 성 금요일에는 큰 규모의 수난곡을 작곡하여 연주해야만 했다. 1723년과 29년 사이에 작곡한 교회 칸타타가 무려 140곡 이상이나 되는 것을 보면 바흐가 얼마나 바쁜 생활을 보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과도한 업무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바흐의 독실한 신앙심 때문이었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 자필 악보를 보면 가사 중 성경말씀은 빨간색으로 표기하였고 항상 곡의 마지막에는 SDG (Soli Deo Gloria: 라틴어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이니셜로 곡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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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서 30여분을 걸어 성 토마스 교회에 도착하였다. 생각보다 아담한 규모의 교회였다. 매우 낯이 익은 바흐의 동상을 지나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아무런 치장 없는 소박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위층에는 바흐가 사용했을 고풍스러운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자를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다. 매 주일마다 오르간을 연주하며 매번 새로운 그의 작품들을 연주했던 18세기의 이 장소를 경건히 상상해본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많은 면에서 소박하다. 건물이나 음식, 사람들까지도. 이 꾸밈없는 소박함이 어쩌면 독일 음악의 가장 큰 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성 토마스 교회의 소박함에서 느끼는 내면의 깊이는 500여 년 역사의 공간에서 얻는 가장 큰 체험이었고 그 중심에 있는 그 위대한 바흐가 나의 앞에 누워 있음이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