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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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교회에는 바흐의 무덤이 있다. 강대상 중앙 바닥에 청동으로 새겨놓은 그의 이름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화분들, 대 음악가의 무덤치고는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삶의 모든 정열을 바친 곳에서 영면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커다란 축복일 것이다. 잠시 그의 무덤 앞에서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 교회를 나오자 여전히 흐린 하늘과 스산한 날씨가 나를 맞이한다. 하지만 바흐의 자취를 느끼고 난 지금 이 도시가 왠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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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가 61세 때인 1746년경부터 그의 건강은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육체는 급격히 노쇠하기 시작했고 시력이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1749년 뇌일혈을 일으키고 시력은 급속도로 떨어져 더 이상 곡을 쓰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고 만다. 다음 해인 1750년 두 번에 걸쳐 눈 수술을 받았지만 수술은 실패로 돌아가고 바흐는 결국 실명하고 만다. 이 당시 그가 작곡하고 있던 곡은 서양음악사의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2곡, <음악의 헌정, Das Musikalisches Opfer, BWV 1079>과 <푸가의 기법, Die Kunst der Fuge, BWV 1080>이었다. 위의 두 곡은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다성 모방 양식인 카논과 푸가의 걸작들로 '푸가의 기법'은 결국 미완성으로 남겨진다. 1750년 7월 18일,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의 시력이 돌아온 것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바흐는 사랑하는 이들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고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있던 바흐에게 이 순간은 그가 평생을 바쳐 영광을 돌렸던 하나님의 마지막 선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10일 후인 7월 28일, 바흐는 영원한 시간으로 잠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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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가 죽은 후 서양음악사의 흐름은 바로크에서 고전주의로 옮겨가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음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난 1829년, 라이프치히의 한 젊은 음악가에 의해 그의 음악은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라이프치히의 젊은 음악가 멘델스존에 의해 <마태 수난곡>을 비롯한 바흐의 곡들이 다시 연주됨으로써 바흐의 음악들은 부활하였고 성경에 비유될 정도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만일 세상에 음악이 사라진다 해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2권만 남아있다면 다시 재건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바흐의 음악은 서양음악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흐 생존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그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고귀한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자필 악보가 1814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작은 버터 가게 포장지로 발견되었던 사실에서 진정한 가치는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 의해 빚을 발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Coda
베토벤: “그는 작은 시냇물(Bach의 사전적 의미)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이다”
막스 레거: "바흐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이다."
드뷔시: "바흐는 음악의 사랑스러운 신이다."
니체: "일주일에 3번씩 마태수난곡을 들은 후 나 자신이 선교사의 천직을 받은 것처럼 느꼈다."
N.쥐브로덤: "바흐는 5번째 복음사가이다."
쇤베르크: "음악은 그 완전성을 바흐 안에서 획득하였는데, 베토벤, 하이든도 그리고 가장 완전함에 접근한 모차르트 조차도 끝내 바흐와 같은 완전함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로시니: "만일 베토벤이 인간 중의 거인이라면, 바흐는 바로 신의 기적이다."
막달레나(바흐의 아내): “바흐는 하늘에서 부르는 대로 악보를 받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