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조성진이 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영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의 오프닝 장면을 보면 타노스의 공격을 받아 전멸된 아스가르드 우주선에서 토르의 동생 로키가 타노스에게 반격의 의미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헐크가 있다!” 비록 헐크가 전세를 역전하지는 못했지만 이 대사는 헐크에 대한 신뢰와 그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지난 2월 25일 빈 필하모닉은 뉴욕 카네기홀 공연의 출연자로 예정되었던 친 푸틴 성향의 러시아 지휘자 게르기예프와 피아니스트 마추예프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정치적인 이유로 배제하고 그들을 대신해 캐나다 출신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갱과 한국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으로 교체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베를린에 머물고 있던 조성진은 연주 하루 전에 요청을 받아 7시간 만에 뉴욕에 도착하였고 충분한 리허설도 없이 3년 만에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암보로 완벽하게 공연하며 성공적인 연주회를 이끌어내었습니다. 전례가 드문 상황에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빈 필하모닉이 조성진에게 연락한 것은 세계 음악계가 조성진에게 가지는 신뢰와 그의 예술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BTS를 선두로 하는 K-POP의 전 세계적인 위상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고 이제 한국 가수가 빌보드를 점령하는 것은 예전처럼 그리 충격적인 일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는 어떨까요? 보수적이고 서양인들이 주류인 클래식 음악의 세계 무대는 오랜 기간 동양인들에게는 진입하기 어려운 철옹성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젊은 동양 음악가들의 약진은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이었고 그들 가운데 선두에 서 있는 조성진은 이미 세계 음악계에서 범접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 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제 27살인 젊은 청년 피아니스트에게 어떤 특별함이 있기에 전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을까요?
조성진이 전 세계의 본격적인 주목을 받은 계기는 2015년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콩쿠르이자 피아니스트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이 대회에서 조성진은 불과 21세의 나이에 한국인 최초로 (동양인으로서는 3번째) 우승을 거머쥐게 됩니다. 이미 10대 때부터 국내외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남다른 두각을 나타낸 그였지만 월드컵 우승과도 같은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은 단숨에 그의 활동무대를 세계로 넓혀주었고 이듬해인 2016년에는 클래식 음악가에게 성공의 상징과도 같은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 2017년에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아시아 투어의 협연자로 참여하며 세계적 연주자로서 자리매김합니다. 그리고 2021년 그의 위상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300여 년간 잊혀 있다가 2018년 발견된 모차르트의 미발표 피아노 소품이 조성진의 연주로 초연된 것입니다. 이 연주는 온라인으로 통해 전 세계로 방송되었고 조성진의 세계적 인기를 더욱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럼 조성진의 인기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랜 시간 클래식 음악은 눈보다는 귀로 즐기는 문화였습니다. 연주회장에 가면 눈으로 연주회를 감상할 수 있었지만 많은 대중들은 음반이나 라디오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접하였고 연주자들도 연주 이외에 보이는 것에는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클래식 음악도 시각적 콘텐츠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인터넷과 온라인 영상의 급속한 발전으로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을 단순히 듣는 것에서 눈으로 보며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SNS를 통해 베일에 쌓여 있던 음악가들의 일상도 쉽게 접하게 되면서 연주자들에 대한 평가의 기준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조성진은 지금 우리 시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충족하고 있습니다. 귀공자 같은 반듯한 외모와 검증된 연주 실력, 그리고 소탈하면서도 무대 밖에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성품까지, 디지털 소통의 시대에 걸맞은 스타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조성진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폭넓은 레퍼토리와 깊은 음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열정과 진심을 다해 연주하는 모습은 이미 작곡가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으며 그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우리를 깊은 예술의 심연으로 인도합니다. 클래식 음악은 끊임없는 탐구와 진실을 찾아가는 긴 여정과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정도 연륜이 쌓여야 깊이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내지만 아직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음악가가 만들어 내는 예술의 깊이는 그의 여정에 대한 큰 기대감과 ‘우리에겐 조성진이 있다’라는 자긍심을 갖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조성진 모차르트 미발표곡 초연 연주실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