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줄 아는 사람"
우리의 삶은 빈 공간들로 채워진다. 그걸 누군가는 '여유'라고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가능성'이라고 부르며, 또 다른 누군가는 '결핍'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종종 구김살이 없는 것과 결핍이 없는 것을 혼동한다. 그러나 전자는 가능하고 후자는 불가하므로 둘은 같을 수 없다. 결핍 없는 삶은 완벽할 수 없는데 결핍의 부재마저 결핍이기 때문이다. 그 모순 때문에 후자는 불가한 일이 된다.
가난한 집 장녀이자 비장애 형제로서 나는 구김살과 결핍 모두를 두둑이 갖고 자랐다. 뿌리친다고 뿌리쳐지는 게 아니어서 별수 없이 그걸 품고 살았는데, 아, 씨앗도 꽉 차게 담긴 화분에서는 움트지 못하는 법이다. 내 삶 곳곳에 남은 결핍, 그 빈 공간들 덕에 내 씨앗은 움텄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은 것'이 곧 '불행'을 뜻할까?
결핍은 때때로 열망(집착)을 낳으므로 나는 종종 행복에 대해 천착했고, 행복을 대하는 내 모습을 성찰한 끝에 행복과 불행은 서로 등을 맞대고 선 게 아니라 하나의 선 위의 양 끝에 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 선 위를 오가며 어떤 날은 행복 쪽에 더 가까이 가고, 어떤 날은 불행 쪽에 더 가까이 간다. 그 거리는 매번 달라진다. 행복과 불행은 땅따먹기보다는 줄다리기에 가깝다.
나는 남들보다 이른 시기에 인내와 절제를 배우고, 페르소나를 가졌다. 동생을 돌보는 대신 친구들과 밖에 나가 어울려 놀고 싶은 마음을 인내했고, 부모에게 잔뜩 응석 부리고 싶은 마음을 절제했다. 어른들이 기대하는 의젓한 아이라는 페르소나를 가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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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이에 맞지 않는 보호자 역할을 해내야 했다. 외출할 수 없는 동생을 배려하거나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을 돌보기 위해서 친구들과 바깥에 나가 놀기를 포기하는 일은 당연했다. 친구 중에는 좀처럼 밖에 나오지 않고, 말도 없는 나를 고깝게 여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른들은 나를 보면서도 나보다 동생을 떠올렸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동생 잘 돌본다"라고 칭찬했는데, 그 외에 내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어른은 없었다. 학교나 교회에서 장애를 가졌거나 적응이 어려운 친구가 있으면 은근히 내가 그들을 맡아 돌봐주기를 바라며 짝을 지어줬다. 나는 부모나 교사를 대신하는 '스페어 보호자'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명찰에 내 이름 대신 '돌보미'라고 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에게 나는 고무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의 필요에 따라 나는 다 큰 애가 되었다가 아직 어린애가 되었다. 막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부모의 사랑과 돌봄이 고파서 혀 짧은 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그러면 부모님은 무섭게 혼을 냈다. 그렇게 혼이 나고 훌쩍일 때만 간신히 그들에게 안길 수 있었다. 그때가 아니면 부모님은 동생을 안아야 했다. 부모님이 나를 안는 동기가 애정보다는 죄책감이라는 걸 그 어린 나이에도 느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이 모든 게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가족이 내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기 때문에 그걸 판단할 기준도, 이유도 없었다.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야 가족 바깥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인지했다. 바깥사람들은 우리 가족과 달리 내 동생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 시선을 통해 내 동생이 타인과 다르며, ‘장애인’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집안의 경제가 기울면서 엄마는 때때로 울었고, 아빠는 점점 지쳐갔다. 내가 아무리 동생을 잘 돌봐도 그들의 표정은 계속 어두웠고, 다툼이 느는 걸 보면서 가난이 슬프고 지겨운 거라는 걸 알았다. 가끔 친구 집에 놀러 가서 그들이 사는 깔끔한 아파트 내부와 화목한 분위기를 보면 우리 가족이 겪는 상황이 더 크게 와닿았다.
그런데 의외로 당시엔 내가 가진 상황을 원망하진 않았다. 자주 불안했고, 가끔 억울했지만 그게 다였다. 한겨울에 찬물에 몸을 씻어도, 친구들과 달리 동생을 돌본다는 게 함께 노는 것 그 이상의 의미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내게 '한'이 된 건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대학교 1학년 전공 수업에서 프로이트나 에릭슨 같은 학자들의 이름이 나왔고, 그들이 각각 정의한 인간 발달 단계 및 과업을 배웠다. 매 연령마다 그토록 많은 과업이 있다는 걸, 그걸 달성하도록 돕는데 보호자의 역할과 의무가 있다는 걸, 각 발달 시기에 맞는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면 미숙하거나 퇴행할 수 있다는 걸 배우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내 어린 시절에 얼마나 많은 구멍이 있었는지 낱낱이 살피는 기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내 결핍을 마주한 나는 당황했고 동시에 분노했다.
그 후로 한동안 내가 받지 못한 것, 누리지 못한 것, 빼앗긴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부모의 기대가 불합리하게 느껴졌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갖게 된 가족 구성이 버겁게 느껴졌다.
가족들을 이해해야 했던 그 시절의 내가 몇 살이었는지를 생각했다. 나도 어렸는데 왜 나는 이해받을 수 없었는지, 투정 부릴 수 없었는지 그제야 의아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부모의 관심과 돌봄의 부재. 되려 내가 동생에게 주어야 했던 그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도 여물지 못한 채 내주어야 했던 게 억울했다.
가난과 두 명의 장애인 동생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고, 그게 부모님 탓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마찬가지로 내 잘못도 아니었는데……. 왜 내가 그 부담을 자꾸만 지고 있는지, 나는 또래보다 많이 희생하고 산 것 같은데 왜 부모님은 자꾸만 나를 아쉬워하고 뭘 더 바라시는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 의문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쉽게 분노가 치밀었지만 내 감정을 가족에게 털어놓지 않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티가 났다. 부모님과는 점점 멀어졌고, 경제적 독립이 가능하게 됐을 때 나는 전에 없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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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면서 일에 몰두했다. 사회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순간을 흘려보내는 법이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훈련해 온 일이었다. 새로운 시간을 또다시 흘려보내며 점점 연차가 쌓였다.
후배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몸에 박인 습관들이 나왔다. 신입들이 회사에 쉽게 적응하도록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나는 타고난 내향인이면서도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식사를 챙기고, 외근 동행을 자처했다. 그들이 회사 내에서 편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되려고 그렇게 애를 썼다. 그게 옳은 일인 것 같았다. 누군가에겐 오지랖일 뿐이었겠지만, 그걸 따듯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한편, 업무도 점점 수월해졌다. 나는 사회복지사로서 다양한 삶과 인간 군상들을 마주했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악을 지르며 내게 억울함을 토로했는데, 찬찬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억울함 속에 숨겨진 슬픔, 소외감, 무력감 등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가진 고난의 경험들과 감정들 덕분에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들의 이야기가 문장이 아니라 삶으로 느껴졌다.
호의를 전제로 한 대화에서 상대의 사랑스러운 점을 찾는 건 쉬운 일이었다. 내가 상대에게 진짜로 존경할만한 점을 찾아내고, 그걸 과장되지 않게 표현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내게 악을 쓰던 사람들 중 몇몇은 어느새 마음을 열기도 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했다. 많은 효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업무적으로나 관계적으로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으로부터나 스스로에게나 칭찬 들어본 일이 잘 없었기 때문에 그런 효능감은 꽤 부푼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 덕분에 땅굴을 파고들어 가던 자존감이 조금씩 회복되다가 어느 날 싹이 움텄다.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을 찾아서 그걸 내 강점으로 적립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춘기는 끝난 지 오래지만 이제야 진정한 자아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강점이 어디서 자라났는지 생각해 본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라고 결론 내린 과거가 현재를 위한 훈련이자 자양분임을, 그게 없었다면 이 순간의 찬란함을 눈치챌 수 없었다는 걸 안다.
나는 녹록지 않은 순간을 흘려보낼 수 있고, 타인의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그건 내가 고난이라고 여긴 순간들을 지나 봤기 때문이었다.
나는 타인을 배려하거나 챙기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그건 어린 시절부터 동생을 돌본 습관이 몸과 마음에 배겼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타인을 따듯하게 대할 줄 아는 나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상대의 이야기를 삶으로 이해할 줄 알고, 상대의 빛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 결국 내가 그렇게 서러워했던 내 어린 시절의 구멍들, 그 결핍이 나라는 사람의 싹을 틔울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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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순간들은 이미 벌어진 일로써 그 시간에 그대로 있다. 그것이 행복한 일이냐, 불행한 일이냐, 혹은 그 중간에 어떤 것이냐에 대한 판단은 시기별로 바뀌어 왔다.
어린 시절에는 판단할 이유나 비교할 대상이 없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고, 청소년기에는 좀 불편하고 속상한 일 정도로 받아들였으며, 대학 시절에는 원통한 일로 생각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넓어질수록 비교할 대상도 많아져서 자꾸 내 삶의 사건들을 줄다리기하듯 불행 쪽으로 잡아당겨 왔었다.
내 세상이 넓어졌다면 그 세상을 모두 둘러보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법이다. 바닥에만 붙어 서 있으면 내 옆에 놓인 것들이 죄다 커 보이고, 세상이 넓어지면서 그 커다란 것들이 끝도 없이 많아진다. 그런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그것들은 작아 보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구성하는 것 중의 하나라는 걸 알게 된다.
올라가는 건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특히, 내 세상을 둘러보기 위해 내 안의 무언가에 등정하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그건 힘들고, 지치며 때로는 고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치가 있는 일이다. 헉헉대며 결국 올라가 보면 내 행복의 줄을 어느 쪽으로 당길지 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