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사랑

“그런 기쁨, 그런 아까움, 그런 애틋함”

by 박예인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던가. 어린 시절, 속담을 소개하는 어린이 도서에서 그걸 읽은 뒤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사춘기가 길어지고 그 긴 시간 동안 가족에 대한 원망이나 자기 연민을 품었던 건 사랑이 탓도, 부모님의 탓도 아니었다. 내 왜곡된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에 따르면 부모는 자녀의 윗사람으로서 무조건적이고 완벽한 내리사랑을 베풀 책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걸 해내지 못한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불완전한 사랑을 제공했다는 죄목을 기꺼이 인정한 뒤 자녀의 원망을 감내해야 했다.




누구나 대외적으로 내놓지 못하는 자기만의 '구린 마음 저장고'가 있다. 밖에 내놓기에는 좀스럽고 남부끄러운 마음과 감정들을 숨겨놓는 용도다. 사람이 어찌 정의로운 마음만 갖고 살겠는가.

내 구린 마음 저장고 안에는 '열등감'이 마구마구 자라고 있었다. 그건 상황에 따라 비장애인만으로 구성된 가족에 대한 선망, 언젠가 홀로 감당하게 될 가족부양에 대한 부담감, 동생과는 다른 양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것에 대한 원망으로 모습을 바꾸곤 했다.


내게 유년시절은 참 벅차고 고달픈 시기였는데 쏟아지는 고난에 유년기 아이의 반응이 미숙했으리란 건 어쩌면 당연하다. 나는 가난이든, 동생의 장애든,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결핍이든, 무언가가 내 어둠을 건드릴 때마다 열등감이 자극되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때는 그게 열등감인줄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모른 체하고 마냥 맘에 쌓아두는 것 말고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사춘기가 시작됐다. 내 안에 돌풍이 쌓인 감정을 가만 놔두질 않았다. 그게 막 날아다녀서 여기저기 얽히고설켰다. 때로는 부러진 단면이 뾰족하게 한 구석을 찌르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게 언젠가 내 안에서 폭발할 것을, 그전에 이걸 던져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왜곡된 믿음에 따라 그걸 던질 방향을 정했다. 바깥세상은 낯설고 무서운 곳이었기에 제외되었다. 가족 안에서 동생은 안쓰러운 약자일 뿐 아니라, 나보다 손아래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사랑을 내려주어야 할 존재였다. 결국 남는 건, 나에게 완전한 사랑을 주어야 했지만 풍파에 흔들리며 가끔은 깨진 모양의 사랑을 주던 부모님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구린 마음 저장고에 쌓인 열등감을, 그나마 가장 타당해 보이는 방식, 곧 ‘부모에 대한 원망’이라는 모습으로 바꾸어 꺼냈다.


최근에는 여러 매체에서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라고 외친다. 그때의 내가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속담 외에도 그 표어를 알았다면 좀 달랐을까? 아쉽게도 그때의 나는 그 표어도, 내가 무서운 바깥세상 대신 부모를 원망하는 게 결국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라는 것도 몰랐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건데, 자녀가 부모에게 반항하거나 못되게 구는 건 일종의 과격한 앙탈이다. 특히, 그 아이의 행동이 집안과 밖에서 다르다면 더욱 그렇다. 바깥세상은 내 행동에 따라 나에 대한 애정을 결정하는 반면, 부모는 그렇지 않다는 걸 무의식 중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이렇게 해도 너는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철저한 믿음에 기반한 행동이다. 정말 부모의 사랑을 못 느끼는 아이들은 부모를 상사처럼 대한다.


우리 부모님이 가난과 자녀의 희귀병으로 절망하고 흔들렸으며 그 모습을 모두 감추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인정하실지는 모르겠으나, 때때로 그 절망이 너무 무거울 때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내게 화풀이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도 사람이고, 그들도 완벽하지 않고, 그들도 연약했기 때문이다.

막상 부모의 연약함을 겪었던 당시에는 그저 부모의 슬픔이 내 슬픔인 것 같고, 내 잘못인 것 같았는데 조금 머리가 커서는 그게 그렇게 원망스러웠다. 내 어린 시절이 안쓰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내 나이가 그때 부모님의 나이와 닮아갈수록 그 안쓰러운 마음이 자꾸만 나에게서 부모님에게로 번져간다. 유년시절에는 동생이, 사춘기에는 스스로가, 그리고 청춘을 지나는 지금은 부모가 그렇게 안쓰럽다.


­―

내가 늦게나마 부모님에게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건 사실 사랑이 덕분이다. 앞 편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이가 없었다면 가족들과 유야무야 보낸 시절을 지나오지 못했을 거다. 그걸 견디기보다는 가족과 연을 끊거나 집을 뛰쳐나오길 선택한 뒤 집도, 부모에 대한 마음도 되찾지 못하고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가 있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와 서먹하나마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부모님과 살을 부대낀다는 건 조금 닭살 돋아도 사랑이랑 부대끼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어쩌다 내 방에 있지 않고 거실로 나왔을 때 엄마, 아빠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사랑이만 쳐다봤다.

그러면 사랑이는 *예의 그 마법을 부려, 그 어색한 순간을 사랑스럽게 느껴지도록 했다. 내가 저에게 장난을 치거나 조금만 다정하게 굴면 그 애는 세상 모든 선의를 담은 눈으로 웃었다. 가끔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까닥인 채 두 눈을 빤히 마주 봤다. 그러면 정말로 그 애가 아깝도록 예뻐서, 그 시선이 1초나마 아쉬워서 나도 그 애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내가 그 애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 불순한 이유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내가 사랑이를 예쁘게 보면 볼수록, 그 애는 점점 더 예뻐졌다. 내가 저를 예뻐하는 걸 알기라도 하듯 점점 더 품에 파고들고, 어리광을 부리고, 순수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가끔은 엄마, 아빠를 제치고 내게 먼저 다가와 안기기도 했는데 꼭 올림픽 우승이라도 한 듯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그런 기쁨, 그런 아까움, 그런 애틋함은 전에 없던 마음으로 으레 동생에게 갖는 우애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결혼한 적도, 애를 가져본 적도 없지만 내가 진짜로 그 애의 9살 엄마가 된 것 같았다.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나는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 없다고 느끼더라도 그걸 남에게 줄 수 있다는 걸 아는 게 얼마나 큰 치유의 힘을 갖는지 모른다. 어릴 때 들어본 칭찬이라고는 ‘동생 잘 돌본다’가 전부였던 내가, 잘하는 게 희생 말고 없는 줄 알았던 내가, 배우지 못한 사랑을 해낸다는 게 스스로 기특했다.

게다가 사랑이는 한마디 없이도 사랑에 화답할 줄 아는 아이였다. 악의나 계산이라고는 단 1%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시선과 그 특유의 맑음으로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 나도 널 좋아해.'라는 메시지를 전할 줄 알았다. 그 어떤 말이나 글보다 명확했다. 그러면 그게 또 나를 치유했다.


­―

나는 이제 사랑의 방향이 단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중력의 영향권 안에 속해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은 냇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겠으나 연어와 같은 오름사랑이 그 흐름을 거스르기도 한다는 걸, 사랑이를 보고 배운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순수하고 조건 없는 것인지도.

나는 사랑이로부터 오름사랑을 받는다. 그걸 20년이 넘도록 받은 덕분에 지질한 열등감을 치유하고 비로소 나도 부모에게 내 사랑을 올려 보낼 수 있다. 부모가 애틋하고 안쓰러운 게 그것인가 보다.


우리 가족은 요즘 전에 없이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는 벌이를 할 만큼 컸고, 더 이상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만은 않다.

부모님은 아직 건강하고, 스스로는 물론이고 사랑이도 돌볼 힘이 남아있다.

사랑이는 여전히 아기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가족으로부터 받는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제 사랑에 뭘 묻혀 주는 법이 없다. 자라지 않는 사랑이의 마음은 비로소 축복이 되었다.


이 행복은 모두 사랑이 덕분이다. 나는 동생 잘 둔 덕에 그 행복을 누린다. 아, 그게 얼마나 행복한지 여러분은 모를 거다.



* 2화(말꾸러기 내 동생)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