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아이들의 두 번째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곤 하지만 내게 남은 그 시절은 마냥 행복한 기억이 아니다. 그때 내게 벌어진 일들은 어린애가 감당하기엔 꽤 고달팠다.
인생의 고난이 정량이라면 나는 내 몫의 고난 절반 이상을 유년시절에 이미 겪은 것 같다.
가난과 장애
그 시절 내 고난을 표현할 가장 또렷한 단어다. 누군가는 “별것도 아닌 걸로 인생 다 산 것처럼 군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누구나 ‘제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픈 법’이니까. 그 시절 나와 우리 가족에겐 그게 다였다. 그보다 대단한 건 없었다.
그 모든 일들을 열거하며 징징대려는 건 아니지만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필요한 부분을 정보로써 전달하려고 한다.
(정보 1) 내게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다. 그 애는 제 목을 가누거나 걸을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 애가 앓았던 병의 정확한 이름을 모른다. 그저 어렸을 때 엄마에게 들은 대로 「근육병」으로 알고 있을 뿐. 지금은 여러 검색 끝에 그게 「근육퇴행위축」 혹은 「근이영양증」 등으로 불리는 그것이라고 추측한다.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 동생을 안거나 업어서 병원이며 한의원을 다녔다.
(정보 2)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IMF가 터졌고, 그 영향 때문인지 아빠가 실직했다. 우리는 가난했고 엄마는 가끔씩 동네 슈퍼로 아르바이트를 갔다.
내가 5살 때였나, 7살 때였나……. 저녁이었는데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가고, 집엔 동생과 나만 있었다. 나는 우리의 식사를 챙기려고 맨밥에 간장과 참기름을 비볐다. 계란프라이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처음으로 동생의 용변을 받았던 건 기억한다. 내 동생은 신체장애인이었고, 지적 장애인은 아니었다. 두 살 위 언니에게 자기 신변처리를 맡겨야 하는 그 애의 부끄러움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내가 힘든 것만 보이는 나이였다. 아, 아니지. 힘든 일을 겪을 줄도 모르는 나이였다. 나는 결국 엉엉 울고 말았다. 그때, 아르바이트를 마친 엄마가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미안하다며 울었다.
나는 장애가 없는 장녀였으므로 집안의 모든 심부름과 질책의 대상이었다.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이것저것을 부탁했다. 그게 귀찮아서 짜증을 내면 엄마는 "동생은 심부름 못 하잖아."라고 답했다. 내가 '나 대신 동생에게 시키라'라고 한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동생과 싸우면 당연히 내가 혼났다. 싸운 이유가 무엇이든 내게는 늘 '아픈 동생을 배려하지 못한 언니‘라는 죄목이 따라붙었다.
내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밖에서 놀기 시작할 무렵, 내 동생은 다른 동생들이 그러하듯 언니를 따라 나가고 싶어 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어."라고 말하는 동생의 목소리 뒤로 엄마의 눈빛(제 언니 말고는 친구가 없는 둘째가 안타까워 울망이던 그 눈빛)이 가세되면 가끔 부아가 치밀었지만 속으로 삼켰다. 그 시절 내게 허락된 유일한 칭찬은 '동생 잘 돌본다.'였다.
막상 동생을 데리고 나가면 또 다른 상처를 받았다. 애고 어른이고 보조기를 차고, 휠체어에 앉은 동생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이미 우리를 지나쳐 놓고도 고개를 뒤로 돌려 빼고 끝까지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장애인을 빤히 쳐다보는 게 실례라는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아마 동생도 내가 느끼는 만큼 그이들의 시선을 오롯이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매는 구태여 그걸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진 않았다.
하루는 동네 아파트 단지에 놀러 갔는데 동생의 휠체어 바퀴가 철망으로 된 배수구에 빠졌다. 휠체어와 함께 동생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행히 바닥으로 쓰러지진 않았지만 미취학 아동이었던 내 힘으로 휠체어를 바로잡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동생은 고꾸라진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동생은 불편하다며 칭얼대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내가 저와 휠체어를 바로 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고 그저 내게 미안해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생 뒤에서 휠체어를 밀며 또 엉엉 울었다. 그날에 이미 많은 시선을 받았던 터라 분했던 마음이, 고꾸라진 동생을 어쩌지 못하는 죄책감과 뭉쳐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엄마는 울며 돌아오는 나를 또다시 껴안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내가 겪은 시간들로부터 나는 부모의 사랑을 아쉬워하지 않는 척하는 법을 배우고, 세상이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눈치챘다. 그렇게 비장애 형제로서의 삶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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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끝 무렵에는 막내동생이 태어났다. 당시 우리 집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빠는 쌀을 사 오지 못하는 대신 어디 밭에 가서 완두콩을 한 자루씩 얻어왔다. 그러면 우린 그걸 삶아 먹었다. 집에서 먹는 반찬은 김치가 전부였다. 그조차도 귀했다.
9살이었던 나는 그게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당시 부모님이 어떤 마음으로 막내의 출생을 준비했는지 몰랐다. 내가 아는 건 만삭의 엄마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닥치는 대로 일하느라 피골이 상접한 아빠가 산부인과 비용을 대려고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다는 것이다.
두 살 터울의 동생과의 첫 만남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내 기억의 첫 순간부터 그 애는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여덟 살이나 차이나는 막내와의 첫 만남은 또렷이 기억난다. 출산이 임박하자 엄마, 아빠는 나를 터울이 컸던 외사촌 언니에게 맡기고 병원으로 갔다. 나중에 사촌언니 손을 잡고 간 병원 산모실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를 봤다.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서 엄마에게 안겨있었다. 엄마와 아기가 모두 낯설었다.
엄마는 아기의 이름을 고민하고 있었다. 내게 두 개의 이름을 대며 골라보라고 했는데, 내가 선택했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동생의 이름은 내 선택과 다르게 지어졌다.
그때는 사람을 '사랑'으로 부른다는 게 어색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이름이 막내동생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안다. 그 애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까 싶다.
그러나 그때는 사랑이가 특별히 예쁘거나 애틋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내게 동생이란 돌봐야 하는 존재였다. 안 예쁜 건 아니었지만 보고 있으면 예쁨보다는 의무감이 앞서는 존재였다. 5살에도 동생을 돌보던 내가 9살이 됐으니, 동생을 돌본다는 게 얼마나 당연한 일이었는지…….
가족 중에 사랑이를 가장 예뻐한 건 둘째였다. 기어 다니기 시작한 사랑이가 누워서 움직일 수 없는 둘째의 몸 위를 지나가고, 머리카락을 쥐고 당겨도 둘째는 막내에게 화내는 법이 없었다. 그 연약한 몸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저 제 동생이라며 예뻐만 했다. 엄마는 그런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 둘째를 더 애달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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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엄마는 아픈 손가락을 향한 애달픈 마음을 둘로 나눠야 했다. 사랑이의 발달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뒤집기도 한참이 걸렸는데, 배밀이나 기는 것, 짚고 서는 것이 남들보다 한참 늦었다. 두 돌이 지나도록 걸음마를 떼지 못했고 발화의 기미는 보이지도 않았다. 엄마는 아닐 거라며 미루던 발달 검사를 했다. 두 번째였다.
사랑이는 지적장애 판정을 받았다. 엄마에게는 두 배의 슬픔이었고, 내게는 두 배의 부담이었다. 부모의 부재가 왔을 때, 내가 돌봐야 하는 존재가 두 명으로 늘었다. 내가 그 아이들의 두 번째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걸 그때 즈음에 확실히 알았다.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겁이 났다.
나는 그런 부담감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게 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느끼기에 엄마, 아빠는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탓이라고,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억울해하면서도 결국 그걸 학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엄마, 아빠의 다그침 없이도 죄책감이 허파를 콕콕 찔러대는 걸 보니 억울할 여지도 없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 부담감을 지우려고 애써봤지만, 종종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드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글쎄, 그 생각을 결코 막지 못한 게 죄였을까? 하나님이 나를 봐준 건지, 벌준 건지, 둘째가 10살의 나이로 제 자리로 돌아갔다. 천사가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3살 엄마 역할을 잃었지만, 여전히 9살 엄마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