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무것도 모르는 맑은 얼굴"
귀한 것일수록 치러야 하는 값이 큰 법이다. 어마어마한 시간을 인내해서 얻는 사랑이의 모든 첫 순간은 그만큼 귀하고 특별했다.
사랑이는 느리지만 차근차근 무언가를 해냈다. 돌이 지나면서 기어 다니기 시작했고, 두 돌 무렵 물건을 짚고 일어서더니, 서너 살에는 벽에 기대 설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밤, 부모님과 교회를 다녀오는 길에 사랑이가 드디어 첫걸음마를 뗐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은 늘 사랑이가 걷기를 기도했다.
나는 사랑이가 처음으로 걸었다는 소식을 다음날 엄마에게 전해 듣고 알았다. 사랑이의 첫걸음마를 놓친 게 내심 아쉬웠지만, 마지막 걸음이 아닌 첫걸음이었으므로 오래도록 그럴 건 아니었다.
사랑이의 첫걸음마는 까마득한 옛날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랑이의 걸음은 엉성하다. 사랑이는 중심을 잘 못 잡고, 무릎과 발목 관절을 자연스럽게 사용하지 못한다. 발뒤꿈치를 땅에 먼저 내려놓았다가 아치를 따라 부드럽게 발바닥을 구른 뒤 발가락 끝을 땅에서 떼는 그 일련의 과정을 해내기 어렵다. 사랑이는 발바닥 면적 전체를 한 번에 땅에서 떼어냈다가, 조금 더 앞쪽에 다시 내려놓는 식으로 걷는다. 그러면 조금 뒤뚱이고 쿵쿵대는 사랑이만의 걸음이 완성되는데, 부자연스럽지만 씩씩한 그 걸음걸이를 보고 있노라면 때때로 뿌듯함이 몰려온다.
한편, 그 걸음걸이는 무릎이나 발바닥 전체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사랑이는 조금만 걸어도 쉽게 지치고 힘들어한다. 그러면 갑자기 걸음을 멈추거나 바닥에 주저앉는 식으로 자신이 지쳤음을 표현한다. 발화가 안 되는 사랑이만의 표현방식이다.
씩씩한 걸음걸이. 저만의 표현방식.
그것들은 사랑이를 빛나게 한다. 엉성하면서도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뒷모습이나, 지친 표정을 지을 줄 몰라 무표정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기의사(그만 걷겠다!)를 표현해내는 걸 보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그 애는 엉성하고 어색한 것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지도록 마법을 부릴 줄 안다.
어쩌면 이게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마음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 본다. 사랑이는 우리 엄마가 낳았지만, 나는 사랑이를 볼 때마다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벅차오름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가졌던 건 아니다. 9살 엄마가 진정한 두 번째 엄마가 되려면 사춘기를 넘어선 또 다른 성장통이 필요했다. 아래의 이야기는 사랑이의 걸음걸이에서 사랑스러움보다는 불안함을 먼저 느끼던 때의 이야기이다.
시간이 지나며 사랑이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는 것과 달리, 사랑이가 이해하는 것들의 범위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그건 때때로 곤란한 일이 되기도 했다.
사랑이는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건 달리말하면 사랑이의 세상에서 안 되는 건 없다는 뜻이었다.
그 애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면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온 집안을 다니며 제 눈에 띄는 것들을 몽땅 꺼내서 어지르고, 찢고, 망가뜨렸다. 가끔은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 싶은 것들을 해내기도 했는데 고무장갑을 맨손으로 찢거나, 라면이나 과자 봉지를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찢어내는 건 우리 가족에게 더 이상 신기한 일도 아니다.
사랑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특히, 좀처럼 깊게 잠들지 못해서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혼자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곤 했다.
사랑이는 언어로 소통하지 않기에 "안돼."라고 말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결국 그 애의 행동을 제지하려면 물리력을 동원해야 한다. 무언가를 망치지 못하도록 손을 꼭 붙들거나, 애를 번쩍 들어 다른 장소로 옮기는 식이다.
문제는, 손을 꼭 붙든다고 사랑이가 '안된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여 얌전해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하는 힘을 이기기 위해 그 애는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끌어 쓰기 시작한다. 제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이러다 애 얼굴이 터지면 어떡하지?' 싶을 만큼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을 쓴다. 결국 힘 때문이든, 약해지는 마음 때문이든 사랑이에게 지게 되어있다.
결국 사랑이가 무언가를 망가뜨리지 않게 하려면 사랑이 눈에 띄지 않게 하거나, 손에 닿지 않게 해야 한단 소리였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보물 찾기의 달인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중요한 것은 집안 곳곳에 숨기거나 높은 곳에 올려두었다.
밤마다 집이 난장판이 되는 걸 반기는 이는 없었다. 몇 번이나 부탁하고, 달래고, 야단쳐도 소용이 없다는 좌절감과 매일아침 난장판을 수습하다가 맞이하는 회의감은 가족들을, 특히 엄마를 지치게 했다. 사랑이가 어지른 것들을 치우는 게 대부분 엄마 몫이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해야 한다고 법에 정해진 것도 아니었지만 그랬다.
아무리 자식이고, 동생이라도, 버거운 건 버거운 거였다. 우리는 사랑이의 그런 행동을 두고 '일 친다.'라고 표현했다. 그건 누가 들어도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표현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막내를 사랑했던 둘째는 달랐다. 그 애는 그런 막내의 모습조차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말썽쟁이와 장난꾸러기의 합성어로 ‘말꾸러기’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엄마는 둘째가 지어낸 막내의 별명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등교 전에 막내가 어지른 집안을 보고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엄마 얼굴을 봤다가, 하교 후엔 둘째가 지은 별명을 자랑하듯 말하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는 엄마를 봤던 게 기억난다. 둘째가 지어준 별명 덕분에 막내의 행동은 잠시나마 미운 행동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행동이 된 것이다.
여전히 우리 가족은 사랑이를 가끔씩 '말꾸러기'라고 부른다. 그 별명을 부를 때, 나는 둘째를 떠올린다. 저를 기어서 넘어가는 동생을 혼내려는 엄마를 말리던, 가족들이 미워하는 행동조차 사랑스러운 행동으로 탈바꿈시키던 그 사랑을.
사랑이가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제 별명에 어린 애정만큼은 꼭 느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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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되지 않는 말꾸러기 때문에 화가 나는 사람은 비단 엄마만은 아니었다. 말꾸러기가 거실에서 쓰레기통을 엎고, 안방에서 엄마 화장품을 망가뜨렸다면, 내 방에선 책과 숙제를 찢었다.
초등학생 때, 우리 집엔 컴퓨터가 없었다. 가족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TV였지만 그마저도 전기가 끊기면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일상에 컴퓨터, TV, 학원이 없던 초등학생은 남아도는 시간을 해결하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에 두 권씩 꼬박꼬박 책을 빌렸다. 혹시라도 책이 망가지면 배상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빌린 책을 사랑이가 찢지 못하도록 가장 높은 책장에 올려두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수행평가라는 게 생겼다. 수업 중에 하기도 하고, 숙제처럼 해가기도 하는, 일종의 ‘비시험 기간 퀘스트’였는데 소심한 나는 그걸 참 성실히도 해갔다.
그중 한문 과목 선생님은 매 수업시간마다 정해진 양의 한자를 노트에 열 번씩 써오는 숙제를 내주었다. 한 학기 동안 그렇게 써낸 노트 한 권을 제출하는 게 그 과목의 수행평가였다. 수행평가 제출일 전날 밤에 노트를 잘 챙겨두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노트가 조각조각 찢겨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울고 있는 나에게 부모님은 “그러니까 네가 잘 챙겼어야지”라는 말로 위로를 대신했다.
그날 한문수업 시간에 수행 평가를 제출하는 줄 맨 끝에 섰던 나는 선생님께 노트를 내미는 대신 상황을 설명했다. 동생이 장애가 있는데, 그만 노트를 찢어버렸다고. 선생님은 한동안 나를 재듯 바라봤다.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장애 형제를 두었다는 아이에 대한 배려가 엇갈리는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결국 다음날 바로 제출하면 봐주겠다고 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와 한 학기 동안 썼던 그 한자들을 하룻밤새에 모두 다시 써냈다.
그 이후로도 사랑이는 내게 중요한 것들을 종종 망가뜨렸다.
첫 군휴가를 나오는 남자친구에게 주려고 베이킹 클래스에 가서 만든 컵케익을 부수고, '나도 남들이 하는 것 좀 해보자.'는 충동으로 결심한 유럽 여행을 일주일 앞뒀을 때, 내 여권을 찢었다. 그때마다 나는 감정적으로 혹은 행정적으로 도움을 받기 위해 남자친구에게, 시청 민원실 공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그런 내 모습이 가끔은 처연하게 느껴졌다.
당연히 사랑이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모르는 맑은 얼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지만 상대가 저 때문에 화가 난 것만큼은 눈치챈 그 겁먹은 표정을 보면 뭘 할 수는 없었다.
그 향할 곳 없는 분노감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부모님이 “그러니까 네가 잘 챙겼어야지.”라고 말하면 갈 곳 없는 감정은 서운함이 되어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다.
사람 속에 서운함이 쌓일 때는 가시의 모양으로 쌓인다. 그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내 안에 쌓인 가시들은 결국 부모님에게로 향했다. 차마 사랑이에게는 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내 사춘기가 길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