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이 밥 먹여줄까? 친환경이 밥 먹여줄까?

유럽 마케팅에서 친환경이 작동하는 방식

by yein

어제 독일 화장품 매장에서 파운데이션을 하나 샀다. 몇 년째 인생 파데로 계속 구매해 오던 제품인데, 막상 사려고 보니 용기 모양이 살짝 바뀌어 있었고 가격도 올라 있었다. ‘리뉴얼 버전’이라면서. 지난 블랙프라이데이와 크리스마스 시즌에 엄청나게 할인을 하더니, 재고를 다 털고 리뉴얼 핑계로 가격을 올릴 계획이었군 싶어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내 너네 계략을 다 알지, 리뉴얼은 무슨.’


그런데 리뉴얼 제품 리뷰를 보니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더 좋아졌다는 의견도 있고, 오히려 예전이 낫다는 의견도 있었다. 단순히 겉모양만 바뀐 건 아닌가 싶어 조금 더 자세히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이번 리뉴얼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유럽에서 강화되고 있는 화장품 성분 규제 때문이었다. 핵심 성분 중 하나였던 실리콘 혼합물이 환경 및 안전 규제 대상에 포함되면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포뮬러 개발이 필수가 된 것이다. 그래서 1997년 출시 이후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대대적인 리뉴얼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흥미로워서 더 찾아보니, 이런 변화는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같은 시기, 다른 브랜드들의 파운데이션도 비슷한 리뉴얼을 진행했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유럽에서 친환경은 더 이상 ‘하면 좋은 것(nice to do)’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must to do)’이 되었구나.


사실 이 흐름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나는 친환경 소재 제품 출시를 강력하게 제안한 적이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친환경을 그저 ‘브랜딩 요소’로 봤다. 브랜드 이미지를 더 좋아 보이게 만드는 장치, 그 정도의 이유로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데 직접 제품을 출시하고 나서 느낀 건 전혀 달랐다. 유럽 소비자들은 친환경 제품에 대해 생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훨씬 더 진지했다.


단순히 상품 페이지에 초록색 잎 아이콘이 붙어 있고 “친환경”이라는 문구가 있다고 해서 좋은 제품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어떤 소재인지, 어떤 성분이 들어갔는지, 무엇이 어떻게 친환경이라는 것인지 제대로 확인하고 물어본다.

“이 소재는 폐기되면 얼마나 빨리 분해되나요?”

“이 소재는 정확히 어떤 원료가 들어간 것이고 어떤 혼합물인가요?”


부품 포장을 플라스틱에서 종이로 바꿨을 때도 그 반응은 단순하지 않았다. “친환경이라 좋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종이 포장이 너무 많다. 포장을 줄일 수 없냐?”는 피드백이 들어왔다.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이게 단순한 의견이나 불만이 아니라그들의 구매 행동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환경보호가 이거나 남들보다 더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일반 소비자들’이 환경보호에 대해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에 걸맞은 선택을 하려고 한다.


그때 깨달았다. 친환경은 브랜딩의 영역이 아니라, 점점 더 중요한 ‘구매 결정 변수’가 되고 있다는 것을.


유럽 소비자에게 “우리 제품은 친환경입니다”라고 말하는 건 더 이상 차별화 포인트가 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유럽에 진출하기 전에 기업들이 던지는 첫 질문은 당연히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유럽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물론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는 유럽에서 팔릴 수 있는 상태인가?”

이 질문을 놓치면,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아무리 정교한 마케팅 전략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유럽 시장에서 친환경은 단순히 브랜드를 더 좋아 보이게 만드는 요소가 아니다. 브랜드를 ‘존재 가능하게 만드는 필수 조건’이 되었다.


앞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친환경이 밥 먹여 주나요?”

아마 예전에는“꼭 그렇진 않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친환경이 밥을 먹여 주지는 않지요.

그런데 이제는 그걸 안 하면,

그냥 식탁에 앉을 기회조차 없어질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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