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봄을 닮아

여름의 열기에 놓쳐버렸다.

by 김옌

옷이 가벼워졌다.


태양이 따갑게 제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짧은 따뜻함을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바빠진다. 늦장을 부리다간 올해의 벚꽃도 훌쩍 지나가 버리겠지만, 내겐 벚꽃 명소보다 집 앞 공원의 작은 벚나무가, 그보다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이 주는 행복이 크다. 벚꽃 명소에 같이 갈 친구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진짜 진짜로.


이불 빨래를 해 문틀에 설치한 철봉에 널다가 괜히 풀업을 한 번 한다. 어제 마라탕을 좀 많이 먹었나. 이 철봉에서는 머쓸보다 머쓱함을 더 자주 마주하는 것 같지만 일단 외면해 본다. 내 주 종목은 유산소니까. 커피를 내리고, 도수 없는 안경을 걸치고, 책상 앞에 앉는다. 섬유 유연제 향과 커피 향이 기분 좋게 섞인다.


긴 잠옷을 빨래통에 넣고 씻은 뒤 올해 처음으로 반팔을 꺼내 입었다. 옷태를 가장한 지난 반년의 성실함이 드러났다.


“올해도 핫 걸이 되진 못했군. 젠장.”


등짝을 덥히는 열정적인 볕에 얼음이 유난히 빨리 녹아 코스터가 금세 흥건해졌다. 잔에 맞게 얼려둔 얼음을 하나 더 넣는다. 평소라면 ‘아싸 커피가 두 배 개꿀~’ 하며 낄낄거렸을 텐데. 오늘따라 빨리 차가워지지 않는 커피가 영 별로다. 하루 중 가장 애정하는 순간인데도 어쩐지 오래 붙들지 못한다. 요 며칠 무거운 마음을 좀 덜어내고 싶긴 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가벼워져 붕 떠버린 듯하다.


항상 책상 바로 옆에 두고도 꺼내지 못했던, 아끼는 기타를 꺼내본다. 몇 년 전까지도 니트에 걸려 올이 풀릴 정도로 까슬했던 굳은살은 사라진 지 오래다. 말랑한 손가락에 닿는 금속 현의 느낌이 날카롭고 낯설다. 가장 좋아했던 곡을 쳐보려고 첫 코드를 잡았는데, 두 번째 손 모양이 생각이 안 난다.


‘쫄?’

‘넌.. 진짜...’


여전하구나.

나의 꿈이었던 음악은 봄을 닮아 여름의 열기에 놓쳐버렸다.

소중하고 불안하고 서툴렀던, 뻔하디 뻔한 첫사랑 같았다.


-

너는 바다였다. 밝고 쨍한 푸른빛도 어둡고 희미한 잿빛도 근사했다. 광활함과 잔잔함으로 나를 달래다가도, 조금만 다가가면 파도처럼 속절없이 밀려와 일상을 어지럽히곤 멀어졌다. 나는 너 때문에 떨고, 울고, 친구와 다투고, 밤을 지새웠다. 너는 내 손을 잡고 날았다. 덕분에 더 넓은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경험했다. 사람들은 너와 있는 날 동경하고 응원했다. 그래서 더 높이 날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피부에 닿는 열기가 점점 두려웠다.


‘처음엔 설렘이 눈을 가려서 무작정 직진을 한단 말야. 그러다 점점 걱정이 많아지면서 갑자기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순간이 온다?’

‘뭘 걱정을 해. 너답지 않게.’

‘몰라. 너무 소중하면 바보가 돼.’

‘바보면 또 어때.’

‘겁쟁이 바보인 걸 들키는 것보다 그냥 게을러서 취미를 잃은 사람이 나아.’


마음이 커질수록 기대감은 함께 커져가는데,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의 부족함을 들키는 게 두려웠다. 진부하게도 소중함의 감정은 상실로 완성되었다. 내가 버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었다. 내 의지로 가졌던 게 너뿐이었다. 널 놓지 않았다면 내가 놓쳤을 것들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널 원망하게 될 거라는 걸 잘 알았다. 네가 좋아서 그랬다.


비겁하게 도망쳐버린 대가는 무기력과 불안이었다. 네가 내게 선물했던 세계보다 더 큰 세계를 잃었다. 너에 대한 갈증은 짙어지다 잊히길 반복했다.


-

얼음이 또 한 번 녹아 커피가 미지근해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땅이 젖어있다. 그새 소나기가 내렸나 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며 변덕스럽게 날뛰는 날씨, 더워지는 공기가 꼭 너 같기도 하고, 너를 생각하는 내 마음 같기도 하다. 하늘은 언제 울었냐는 듯 아스팔트에 윤슬을 만든다. 마음이 반짝인다. 미지근한 커피 맛도 꽤 괜찮은 것 같다.


다시 기타를 잡는다. 아까 치고 싶던 곡의 인트로를 더듬어내니 나머지 코드는 술술 잡힌다. 제목도 잊어버린 곡들이 내 품에서 짤막하게 연주된다. 이제 칠 수 있는 곡이 없을 거란 걱정이 무색하게도 몸이 기억하는 곡이 꽤 많다. 반가움에 웃음이 난다. 말랑한 손가락은 평소와 다른 자극에 놀라 살이 들리고 물이 찼다. 아픈 건 괜찮지만 악화될수록 더 오래 쉬어야 하므로 내려놓는다.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행군 베테랑 아빠표 비법을 오랜만에 써야겠다. 알콜 솜으로 바늘을 닦고 물집에 실을 꿰어 놓는다. 중지와 약지가 양갈래 삐삐머리를 한 쌍둥이 같아서 귀엽다.


잠깐. 나 이거 알아. 이런 어처구니없는 걸 보고 귀엽다니. 미친(positive). 이거 사랑의 시작이잖아. 침대에 그대로 몸을 던져 눈을 감는다. 입꼬리를 씰룩거릴 때마다 이미 감긴 눈이 찡긋 댄다. 귀에서 뛰는 것 같았던 심장이 손끝으로 옮겨가 욱신거림이 선명해진다. 설렘이 사라지면 다시 너 때문에 괴롭겠지.


그래도 네가 없을 때보다 덜 괴로울 거야.


티니
판다와 꾸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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