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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가 쓰고 있는 듯

20241216

by 예이린

흰 바탕에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커서.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가, 아롬님의 말을 떠올리며 눈 딱 감고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문단이 끝날 때쯤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문장들을 적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아니라 다른 이가 쓰고 있는 듯 술술 나아간다. 그게 신기한 채로 초안을 완성했다. 그러자, 정말 기뻤다. 신이 났다. 홀로, 사무실에서. 글은 나를 명료하게도, 번잡스럽게도 한다. 생각을 멈추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싶다가도, 모든 게 글감이 되어가니 또 메모를 하게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나를 소진시키는 게 나를 채운다. 아롬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집 좋아요, 근데 나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옷도 좋아해요. 근데 나보다 좋아하는 사럼 진짜 많아. 근데, 글은 나도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글을 쓰는 시간보다 글에 관해 쓰는 날이 길어지고 있을까 민망하지만, 오늘 저녁은 참 명료하게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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