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간절했던 두 남자의 가슴 저미던 밤
얼마 전 소중한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속에는 제가 참으로 궁금해하는 이의 이야기가 있었지요. 이상을 좇았고, 현실에서 좌절했고, 그러나 마음이 따뜻했던 한 남자였습니다.
그는 아끼던 후배가 다치던 어느 날 통닭 두 마리와 소주 몇 병을 사들고 병문안을 갔습니다. 다리뼈 조금 부러진 줄 알고 술 생각 간절하겠지 싶어 찾아간 후배는 혼자서 몸도 뒤척일 수 없을 만큼 많이 다친 상태였지요. 그는 마음이 무너져내려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한바탕 뿌리고 나서 자기 딸내미 이야기만 한참을 했습니다.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큰딸이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며, 아마 자신을 닮아 글재주가 있는 모양이라며. 그런데 후배는 그 자랑 속에 숨은 짙은 자괴감을 보았습니다. 후배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자신이 위로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논 팔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 탓에 가족이, 아내와 어린 딸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자꾸만 온몸을 조여왔나 봅니다. 그는 "신념을 버리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며 후배에게 동의를 구했습니다. 물론, 그가 원했던 진짜 답은 '신념을 지켜라.'는 것이었고, 후배는 의지하던 형의 본심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하늘이 흑색으로 바뀌었던 그날, 후배는 제대로 위로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두 남자는 그렇게 마음은 간절한 채 제대로 아픔을 감싸주지 못하는, 하나 함께 있다는 그 든든함에 감사한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오밤중에 울산서 진주까지 허위허위 달려갔던 그는 돌아갈 택시비는커녕 여관비도 없었습니다. 어디선가 새우잠으로 때우고 아침에 버스 편으로 갈 눈치인 것을 알고 후배는 돈이라도 챙겨드리려 했지만, 형에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병실에서 함께 자자 해도 형은 한사코 거절하며 그 밤중에 병실을 나섰습니다. 후배는 그게 마지막일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형의 신세 한탄 속에는 강한 의지가 숨어 있었고, 딸내미 자랑 밑에는 아비로서의 자부심이 깔려 있었기에 좌절을 견뎌낼 거라 믿고 또 믿었습니다. 후배가 돌아본 그는 무엇보다 건강하고 다부지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딸내미가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자랑이었고, 쓰러질 듯한 순간에도 자신을 버텽겨준 큰 의지처였습니다. 딸내미에게 해준 것이 없을수록 더 그러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 밤에 반신불수로 누워있던 이에게, 위로해야 할 후배에게 눈물 쏟으며, 오히려 위로받기를 바라며, 딸내미 자랑만 실컷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후배가 전하기를, 그날 밤 형의 눈물의 반은 아우를 위한 것이었지만 반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합니다. 아니, 스스로를 위한 위로가 아니라 딸내미로 인한 기쁨이었다 합니다. 반은 후배를 향했지만 반은 딸내미의 자랑이 되고자 하던 결의였다, 그렇다 합니다.
당장에 달려가 외로이 새우잠을 잤을 그 남자를 안아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바람은 평생 소망으로만 남아 있겠지요. 아끼는 아우의 아픔 앞에 한 가슴 다 내어 울어줄 수 있었던 푸근한 사람을, 그래서 후배들이 잊지 못하고 기념비에 따뜻한 시를 담아 찾아와 주었던 사람을, 내 멋대로 '나약한' 사람이라 여겼던 것이 미어지는 새벽녘입니다. 제게는 저를 딸이라 부르는 은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요. 아들의 작은 상장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놓고 그 얘기를 하며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을 내비친 적이 있습니다. 진주 어느 병실, 비슷한 표정을 보이며 눈이 맑은 그도 활짝 웃었겠지요. 그때 글쓰기 상을 받은 것은 첫째였지만, 글을 놓지 않겠다는 약속은 둘째가 건넵니다. 어쩌면 아버지를 닮아 글을 이토록 사랑하는 그 아가씨는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서야 귀중한 역사를 정립하며 한바탕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앞에 두고도 찬찬히 살펴볼 여유조차 없어, 마음만 묵직한 채 며칠을 보내고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자신과 가장 소중한 이들의 발자취를 돌아볼 여유란 게 과연 있을까?' 삶의 파편들이 날아와 당신을, 당신의 온몸을 휩싸는 순간에도 그것을 돌보아줄 며칠의 시간조차 없을까 염려가 됩니다. 그나마도 저는 스스로 택한 도전들로, 자의로 바빴던 것이지만 어쩌면 당신은 과제나 업무로, 타의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더 마음이 쓰입니다. 수능에서는 한국사 과목이 필수로 지정되었고, 임용고시를 위해 한국사능력시험을 먼저 치루어야 하는 때입니다. 한국을 공부하는 시간은 늘어났는데, 개인의 역사는 제대로 돌아보며 살아가고 있나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수많은 자료에서 역사 속 인물들이 나와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데, 우리네 가족의 고뇌와 희망이 담긴 어느 시절을 상상 한 번 해보며 사는가 싶어서요.
그러지 못했다면 눈물 흘려야 일에 울어주고, 미소 지어야 할 일에 웃어주며 당신의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시간을 억지로 꺼내었던 오늘, 지금 제가 참으로 행복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_그와 후배의 이야기(회색의 글)는 제가 쓴 게 아니라 후배 분의 글을 각색한 것입니다. 존대어로 바꾸고, 문장을 조금 고친 것 외에는 그분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