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만큼 하얀 마음씨를 가진 그녀
또 다른 선물로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의 한국 지사장 데이비드 럭의 배려다. 그는 내가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늘 신경을 써준다. 가족처럼 챙겨주다 못해 엄살 많은 내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바로 병원을 예약해주고, 호텔 앞까지 차를 보내준다.
호텔리어 로랑의 시선_中
과외학생이 호텔리어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어머니와 대화하다가 어떻겠냐고 하시는데 괜찮은 것 같았다고 했다. 호텔리어가 어떤 직업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실질적으로 알지 못하고 한 선택이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한국의 학창 시절에는 진로를 탐색할 제대로 된 기회가 없다. 몇 주 전 만난 친구의 말에 박장대소하면서도 잊을 수 없어 메모해 두었던 문장이 있다. "아니 갑자기 희망 학과를 정하라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고." 그러게 말이다. 고등학생한테 갑자기 평생 삼을 직장과 연관될 과를 정하라니,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어쨌든 그래서 고르고 골라 아이에게 선물하기 전에 먼저 읽어보았다. 그 학생이 아니었다면 접하지 못했을 호텔리어 로랑의 시선_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궁금했다. 누군가를 만나 일어나는 일들이 내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한숨에 읽어 내려간 책 속에는 간직하고 싶은 내용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갤러리를 들여다보고 그런 페이지가 서른 장이 넘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위의 문장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성공한다는 건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걸 해줄 수 있는 거구나.
그리고 독서하는 내내 학생에게 머물렀던 생각의 중심은 S에게로 옮겨갔다. 대학교 동기로 그녀를 만났다. 재수를 해서 1살이 더 많았고, 그만큼 동생들을 잘 챙기며 언니 노릇을 톡톡히 했다. 마당발이었고 약속이 많아 바쁜 사람이었다. 딱히 오랜 시간 함께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나에 대해 소개하는 발표를 듣고 마음에 쏙 들었다며 긴 메시지를 보내왔다. 지금 돌아보니 그때부터 그녀는 애정 어린 눈길로 내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다.
함께 공부하러 갔던 스페인에서 내 허벅지에 두드러기가 났었다. 당시 여행자 사이에 벌레에 물리고, 온몸에 퍼지는 이야기가 많이 올라왔던 지라 정말 무서웠다. 그런데 사실 남의 일이니 누가 그리 살뜰히 살폈겠는가. 그래서 혼자 끙끙 앓고 있는데 인터넷을 다 뒤져 증상을 설명해주고 친동생 일인 양 챙겨주던 사람은 S뿐이었다. 반대 입장이었다면 아마 나도 내 일이 아니니 "괜찮아?" 한 마디로 신경 쓰는 척 시늉만 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그녀는 줄곧 친절한 사람이었다. 남들에게 야무져 보이는 나는 내 관심분야 외에는 늘 부족하다. 수업을 넣는 것도 어려워한다. 4년 동안 채울 총 학점과 필수과목 같은 것들은 머리를 뱅뱅 어지럽게 한다. 답답할 만도 한데 그녀는 규정을 강의하듯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필요한 것은 뭐든 해주고 싶어 했다. 그쯤 S에게서 '마음이 하얗다'는 느낌을 받았다. 함께 있을 때면 그 하얀 마음 덕분에 주변의 먹구름이 새하얀 솜사탕으로 변하곤 했다.
그런 투정을 부리지 않는데 S에게는 돈 문제로 인한 속상함을 내비친 적이 있다. " 용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고 학점 유지하는 것도 약간의 부담일 뿐인데, 학원 같은 거 가고 싶을 때는 좀 답답해." 이 얘기를 털어놓은 지 얼마 안 되어 그녀는 급히 유학 결정을 내렸다. 특별할 만큼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마음씨는 어딘가 다치기도 쉬웠던 게다. 소중한 것들도 이곳에 많지만 그래도 떠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10만 원을 보냈다.
여기 남았으면 어차피 너 맛있는 거 사주려고 썼을 돈이야. 그러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줘.
"언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 하던 그녀의 물음에 약간 짐작을 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편히 해주려 배려하며 어차피 내게 쓸 돈이었다니. 진짜로 부산에서 올라온 내게 예쁜 곳에서 맛있는 것을 사주던 이였다. 집안 사정이 어떻게 다르든 그녀도 나도 한정된 몇십만 원의 돈으로 생활하는 대학생일 뿐이었다. 10만 원은 그녀에게도 액세서리나 옷을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여전히 학원에 다닐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무엇이든 잘 해내고 싶은 이유를 얻었다. 그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하얀 응원이었다.
계산적인 사람들이 휘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세상에서 하얗게 살아가는 S는 상처주기보다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린 시절 준비물을 가져오지 못한 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항상 여분을 챙겨주시던 어머니 덕분에 지니게 된 그 마음을 간직하라 당부했다. 또 다른 하얀 마음을 주변에 채우며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 사람들 속에서 백합처럼 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나누면 되는 거라고. 그 백합은 봉오리마저 감탄스러웠기에, 만개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감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전히 잘 피어나고 있는 그녀는 이번 생일에도 "언니..."라는 말을 되뇌게 만들었다. 우연히 생일에 언니 집에서 잠을 잤다. 생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에 약속 하나 잡지 않고 다음 날 일정을 위해 버스에서 한참을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늦은 시간 도착한 S의 자취방에는 나를 위한 것이 가득했다. 달콤한 케이크에 2와 3이라는 숫자의 초,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향을 풍기는 바디로션, 그리고 영국이나 스페인에서 보내오던 것처럼 여전히 꾹꾹 눌러쓴 손편지까지. 새벽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느라 펼쳐보지 못했던 편지를 일찍 깨어 읽어보았다.
'신기하게 예인이 '너' 생일이니까, 해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더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디로션부터 속옷, 팔찌, 운동복, 미역국도 해주고 싶고... 케이크는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을 텐데, 가족들이랑 먹으라고 기프티콘을 줄까 하는 생각까지. 아, 책 선물도 해주고 싶었어. 내가 진짜 너를 많이많이x100 좋아하나 봐.'
편지를 읽고 마음 한가득 백합꽃이 핀 채로 잠이 들었던 내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녀는 조심조심 책을 읽고 있었다. 고단할 테니 푹 쉬라고 자신이 배고프거나 심심한 것은 뒤로 한 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가서 뭐 사 먹을까, 아침은 사주어야지 고민하던 내게 흰밥, 고기와 함께 내어 온 것은 미역국이었다. 늘 집에서 생일상을 차려주었던지라 조그마한 상에 냄비 받침대가 없어 연습장을 깔아 준비한 그 음식은 참으로 소박해 보였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팠던 것인지. 그녀가 써본 바디로션 중에사 제일 좋은 것, 그녀가 갔던 베이커리의 케이크 중에서 최고로 예쁜 것, 그리고 그녀가 준비할 수 있는 요리 중 특등으로 맛난 것이었다.
언니가 외국에 가 있었다는 핑계로, 한국에서도 떨어져 있다는 변명으로 생일 한 번 제대로 챙기지 못한 내가 참으로 못나게 느껴졌다. 사람인지라 누구나 주고받기를 원하는데, 어찌 이리 하얀 마음으로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일까? 많이 웃고 울었던 5월이 가기 전에 두 가지를 그녀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하나는 은은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캔들이고, 하나는 잘 쓰려고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해서 마음에 와 닿는다며 그녀가 좋아하던 나의 글이다. 내게도 요즘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에, 지금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기에.
사회적 성공, 돈의 축적은 꽤 오래 꽤 많이 경계하던 것들이다. 1순위가 되는 순간 욕심이 나를 뒤덮어 소소하고 일상적인 진짜 기쁨을 잊게 할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런데 욕망이 소망이 되는 건 그 결과가 나 자신을 향하는 게 아니라 바깥을 향할 때부터가 아닐까? 내 방에는 500원짜리 동전만 한 꽃 병에 리시안셔스 한 송이만 꽃아 두어도 좋으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녀가 세상에 치이는 순간에 집 앞까지 차를 보내주고 싶다. 그리고 인생에 한 번쯤은 그 차에 백합을 가득 채워놓고 싶다. 부디 그녀가 온전히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있기를, 그녀의 돈을 보고 아려왔던 느낌도 없기를 꿈꿔본다. 이런 이유로 더 열심히 살고 싶다, 정말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