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난다고 다 좋은 건 아니었구나
미루고 미뤘던 봄맞이 옷 정리를 했다.
사실 완벽한 옷 정리를 한 건 아니고, 옷장 위에 넣어놨던 박스를 꺼내 봄여름용 티셔츠들을 세탁하고 이제는 안 입을 것이 확실한 겨울용 니트만 빈 상자에 넣었다. 자매 둘이 함께 사용하고 있는 옷장은 여전히 미어터지기 직전이다. 그리고 귀신같이 날씨가 추워져서 역시 하던 데로 일을 좀 더 미룰걸 후회 중이다.
옷을 정리하다 문득 느낀 점이 있는데, 옷장에 옷은 넘쳐나지만 명품은커녕 변변한 정장 하나 없다는 것이다.
기본템부터 유행템까지 다양한 옷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지만, 경조사 혹은 면접 등 정장이 필요한 자리에 입을 수 있는 옷은 눈에 띄지 않는다.
특히 내 옷의 경우 계절과 상관없이 비슷비슷한 편이다. 청바지, 레깅스, 맨투맨, 면 티 등 편안함과 활동성이 강조된 옷들이 대부분이다. 옷에 돈을 안 들인 것도 아닌데... 엄마가 ‘똑같은 옷 좀 그만 사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급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막연히 나도 30대가 되면 정장에 뾰족구두를 신지 않을까 생각했다. 미디어가 이렇게 무섭다. 사람마다 체형도 취향도 천차만별인데 미디어로 30대를 먼저 접한 어린이들은 '딱 붙는 정작에 뾰족구두'가 어른의 모습이라고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내가 그 모습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다 실제 그 나이가 된 어느 날, 내가 어릴 때 생각했던 모습과 다르구나 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지금 내 모습이야 말로 나의 취향과 직업에 대한 TPO가 반영된 것인데도 말이다.
대부분의 방송작가들은 '편하고 활동성이 좋은 옷'을 선호한다. 물론 사람마다 스타일도 다르고 스타일리시하게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지만, 일이 바쁜 시즌, 특히 촬영을 나갈 때면 자신이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활동성이 좋은 옷을 찾게 된다. 그렇다 보니 롤롤들처럼 의상이 비슷해질 때도 있다.
맨투맨 or 후드티 등 편한 상의
(여름에는 티셔츠 / 흰, 검, 회색 선호)
너무 붙지 않고 활동성이 좋은 하의
(앉았다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것)
운동화 (요란한 소리가 나지 않는 것)
+ 모자
촬영장 뒤편을 뛰어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먼지가 묻어도 툭툭 털면 되는 편한 옷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옷 색상도 카메라 앵글에 걸리더라도 눈에 덜 띄는 무난한 색상을 찾게 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 스포티한 의상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 취향이 정립된 건 막내작가 때 별생각 없이 챙겼던 아이템 때문에 곤욕을 치른 사건의 영향이 꽤 크다.
그 해 여름, 다이어트 서바이벌이 기획됐다.
일반인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서바이벌 포맷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고 그 시류에 맞춰 내가 있던 팀에서도 '서바이벌+다이어트'라는 흥행 보증 수표에 과감히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4명의 도전자를 선발해 다이어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중간점검마다 한 명씩 떨어트려 최후의 1인을 선발하는 흔하디 흔한 서바이벌이었다. 쏟아지는 신청자 중 3차에 걸친 심사를 통해 최종 도전자를 선발했고, 이들의 첫 합숙훈련은 강원도의 한 분교에서 진행됐다.
학생이 없어 마을 주민 시설로 변경된 작은 분교를 촬영지로 잡았고, 그곳에서 <극한의 다이어트 학교>를 열어 도전자들의 정신을 재무장하는 콘셉이었다.
그 촬영은 도전자들뿐 아니라 나에게도 의미 있었는데, 처음으로 떠나는 지방 촬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서울과 경기를 오가며 일하고 있었고, 막내작가는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사무실을 지키며 모두의 막내가 돼야 했다. 자연히 촬영장을 따라갈 기회는 적었다. 하지만 이번 야외 촬영은 먼 곳으로 며칠간 떠나는 일정이었고, 그만큼 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두의 막내인 나도 차출될 수 있었다.
분명 일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사무실을 떠나 촬영 현장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흥분됐다. 괜히 놀러 가는 듯 기분도 좋았고, 감정을 억누르려 해도 너무 감정이 잘 드러나던 사회 초년생이던 나는 결국 메인작가님에게 "너 놀러 가니?"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촬영 전날, 나는 아끼는 백팩에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 등을 챙겼다. 뭐 더 챙길 것이 없나 살피던 중 책상 구석에 있던 시계가 눈에 띄었다. 비싼 시계는 아니지만 나름 고심해서 산지 일 년도 안 되는 시계였고, 시계를 하고 있어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게 더 익숙했지만, 핸드폰을 못 보는 상황이 생겨도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으니 준비하면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 시계를 준비물로 챙겼다
오래간만에 영특한 생각을 한 자신을 칭찬하면서
촬영지인 마을은 아기자기했고 매우 조용했다.
주민편의시설로 개조된 분교는 알록달록 페인트칠을 한 상태였고, 자그마한 책상들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분교에 도착해 촬영 세팅을 마치고, 출연자들에게도 미리 준비한 의상을 전달해 갈아입게 했다. TV에 종종 나오는 유명 트레이너가 이번 촬영의 메인 조교였고, 촬영 전까지는 출연자들에게 친절하게 식단과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주던 그는 카메라가 돎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호랑이 조교로 돌변했다.
학교가 배경인 만큼 넓은 운동장과 빈 교실을 활용해 다양한 운동을 준비했고, 나는 선배의 지시에 따라 미리 다음 촬영을 세팅하는 일을 했다. 그 후에는 촬영하는 피디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촬영을 지켜봤다. 내 가방 안에는 생수를 비롯해 구급약세트, 수건, 당 충전용 사탕 등 아이템이 가득 들어있었고, 촬영 중간 쉬는 시간마다 출연자들에게 필요한 아이템을 공급하는 일을 했다. 아직 구성에 논할 레벨이 아닌지라 내 역할은 NPC, 보급상자와 비슷했다.
"막내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이번 촬영은 크게 필요하지 않을 거 같으니까 점심 먹고 와"
이 말과 함께 피디님은 구령대를 가리켰다.
해가 가장 높은 오후 2시를 넘어가던 시각이었다. 출연자들은 진작에 식사까지 촬영을 마친 상태였고,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준 평상에서 조교 선생님과 미리 작성한 일상 표를 보며 식습관을 점검하고 다이어트에 대해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모든 제작진이 투입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 한 사람씩 돌아가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 첫 주자가 나였다.
모두 일하고 있는데 혼자 식사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지만, 빨리 먹고 와서 교대해주는 게 모두를 위해 좋다는 선배의 말에 구령대에 가서 도시락을 열었다.
땡볕이 내려쬐는 여름날. 아침부터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간식도 눈치 보며 한 두 개 집어먹던 게 다였던 지라 구령대가 흙바닥이거나 말거나 철퍽 주저앉아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한* 도시락도 거의 안 먹어보지 않은지라 이미 차갑게 식어 목이 막히는 도시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때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 음식이 보인다. 먹는다.'에만 집중했다.
방송 일을 시작하면서 불규칙한 업무시간과 식사시간 때문에 짧은 사이에 살이 많이 찐 상태였다. 이김에 나도 다이어트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그 마음은 도시락을 엶과 동시에 저 멀리 날아갔다.
신나게, 하지만 신속하게 밥을 먹으며 촬영 사이 잠깐 찾아온 자유를 만끽했다. 해도 살짝 기울기 시작했고 바람도 선선하게 부는 것이 바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과 가까운 삶도 좋구나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피디님이 보였다. '촬영하다 말고 나를 왜 보지? 뭐 필요한 게 있으신가?'하고 일어나려 하자 피디님은 됐다고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손목을 들고 반대쪽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이것은 무슨 사인인가. 내가 모르는 방송용 사인이 또 있었던 건가? 혼란스러웠다.
나와 손목을 번갈아 가리키는 이 사인이 무슨 의미일까. 자세히 보기 위해 손을 들어 눈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손가락을 따라 자연스럽게 눈이 따라갔고 곧 내 손목에 시선이 닿았다. 어젯밤 미리 준비해두고 촬영장에 오자마자 야무지게 찬 내 시계가 반짝였다.
점심 먹으러 온 지는 이제 20분 정도 지난 상황.
'아 빨리 오란 뜻이구나!'
시계를 보던 나는 그제야 뜻을 이해하고 도시락을 급히 정리했다. ‘촬영 진행하면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나 보다. 그냥 말로 하면 될 일인데, 촬영에 소음이 안 들어가게 하려고 그러나?’ 같은 생각을 했다.
이전에 메인작가님이 편의점에서 점심 먹고 오면서 15분을 넘겼다고 뭐라고 한 적이 있어서
(지금 생각해도 참... 그 이후에 그런 분은 본 적 없다. 비교군이 없는 첫 선배였던 게 차라리 나았던 것 같다)
먹는 속도가 빨라진 터라 거의 다 먹어가던 상황이기도 했다.
얼른 정리하고 운동장을 보니 어느새 조교와 출연자들은 대화를 끝내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출연자들이 몸풀기로 가볍게(?)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이 뛰는 방향보다 좀 더 앞으로 뛰어 빙 돌아 피디님 근처로 갔다.
"잠시만요. 멈췄다가 첨부터 다시 들어갈게요."
내가 제작진 쪽에 도착하자마자 촬영이 중단됐고, 출연자들은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갔다.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가는 무리를 따라가며 질문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 그게 아니고... 너 시계"
시계? 내 시계가 왜?
내가 이해 못하겠단 표정을 짓자 피디님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내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음 너 그 시계 꼭 끼고 있어야 하니?"
"아 시계 필요하세요? 빌려드릴게요"
"아니... 그거 너무 눈부셔... 카메라에 거슬려서 뺐음 좋겠는데..."
자연스럽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 시계로 향했다. 내 시선도 시계로 향했다. 그리고 나서야 피디님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금색으로 도금된 내 시계에 햇빛이 비쳐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도금 주제에 왜 이렇게 빛나고 난리람. 그전까지는 실내 위주로 촬영이 진행돼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야외 촬영이 시작되면서 내 시계가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내가 주로 피디님 뒤, 카메라 뒤에 있어 크게 거슬리지 않았는데, 점심을 먹겠다며 구령대로 간 후로 시계가 작정하고 빛을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애써 무시하며 안 걸리는 앵글로 촬영을 진행해봤지만, 출연자들이 운동장을 뛰는 촬영이 시작되고부터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정도가 돼버렸고, 결국 나에게 사인을 보냈던 것이다.
"아니 예쁘긴 한데 여기랑은 너무 안 어울리지 않아?"
피디님의 농담에 모두가 웃었고, 나는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며 급하게 시계를 빼 가방에 넣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푸른빛이 가득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시골 분교와 금시계는 여러모로 이질적인 그림이 맞는 거 같다. 물론 도금이지만... 어쨌든 자연광이 가득한 그곳에서 인위적으로 반짝이는 빛은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 사건 이후로 남은 2박 3일의 촬영 동안 나는 황금시계 작가로 불렸다.
조명이 필요하면 '**아 황금시계 좀 빌려줘' 하고 놀리는 통에 촬영이 끝나면 이놈의 시계를 응징하겠다고 죄 없는 시계 탓을 했다. 촬영에서 돌아온 날 저녁 시계를 방 어딘가에 박아둔 것 같은데, 그날 이후로 그 시계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날 후로(?) 반짝이는 아이템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이 생겼다. 적어도 촬영장에서는 절대 튀는 아이템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고, 그 마음은 내 옷장을 꽤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다. 본의 아니게 TPO의 중요성에 대해 온 몸으로 느껴서이지 않을까 싶다.
그 덕에 억울하게 유배당한 시계에게는 미안하지만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방송일을 꿈꾸는 분들이 계시다면 반짝이는 시계는 평소에만 차는 걸 추천한다.
자칫하면 반짝이는 빛이 카메라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