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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Jan 07. 2021

대기 중이지만 대기 안 하고 있어요

휴일, 주말에도 영업합니다. 단 미리 논의됐을 때만요.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동물농장을 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오늘 촬영 작가님이 가시죠?」


이게 무슨 소리야? 촬영이라니?


발신인은 조연출. 질문형도 아닌 너무 확고한 문장에 나른한 일요일 오전의 감각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나도 모르는 내 스케줄이 있었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놓친 이야기가 있나 싶어 답장을 하는 대신 프로그램 제작진이 모여있는 단톡방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내가 오늘 촬영에 간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저는 들은 바가 없는데 오늘 촬영 제가 가나요?」


답장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나에게 카톡을 보냈던 조연출이 아닌 피디였다.


피디와의 짧은 통화 내용을 요약하자면, 작가가 굳이 올 필요 없는 작은 촬영이지만 오늘 일정상 조연출이 혼자 가야 하므로 작가가 동행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촬영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작가 중에서도 어느 정도 현장 컨트롤이 가능한 연차가 갔으면 한다는 것. 그리고 당연히 작가가 갈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다.


상황 설명을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고 개인 일정이 있긴 하지만 조율해놓고 촬영장에 가려면 충분히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의 논리 점프가 살짝 거슬렸다.


조연출이 혼자 촬영에 가야 하는 건 며칠 전부터 정해져 있었는데, 정작 촬영에 같이 가야 할 작가에게 이야기하는 건 깜빡해놓고 당연히 갈 거라고 생각했다니.

아무리 코로나라 집콕만 한다지만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아무도 못 간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그럼 혼자 보내야죠 뭐"


남 일 보듯 무덤덤한 목소리에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꾹 눌러 담고 일정 확인 후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TV에서는 동물농장이 방송되고 있었지만 이미 내 평화로운 일요일 오전은 사라진 후였다.


방송일을 하다 보면 급하게 일이 생겨서 촬영장에 가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다만 이 순간 내 속이 부글부글 끓는 이유는 이미 정해져 있는 일정을 논의하지 않고 당연하단 듯이 행동하는 예의 없음 때문이었다. 카메라 뒤에도 사람이 있고 삶이 있는데 도대체 이 매너 없음은 언제 고쳐질런지.

이러나저러나 결국 내가 촬영장에 나가서 그들이 원하는 데로 일하게 될 것이란 걸 서로 알기에 더 짜증이 났다.


[방송일 하는 사람이 주말이 어딨어하라면 해야지]

10여 년 전에 방송계에 입문했을 때 놀랐던 이 분위기가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만연해 있는 걸 보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일이 없겠다 싶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남의 삶은 보여주면서 정작 내 삶은 못 사는 직업이라니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예의를 차리지도 않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업무 지시에 거절하는 옵션이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처럼 꿍얼대는 애들은 어차피 할 거면서 불평불만 많은 애가 되기 마련이고.

연차가 쌓인 지금의 나도 이 정도니 이제 막 일을 시작한 20대 초반들은 말도 못 하고 얼마나 속앓이를 할까.

내 20대 초반 역시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무렵 필수 프로그램은 두 가지였다.

[한글과 네이트온]


한글은 방송작가가 하는 모든 작업을 한글 프로그램으로 했기 때문에 필수인 것이고, 네이트온은 소통의 창구로 쓰였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언니들이 노트북에 설치하라고 말한 프로그램이 딱 이 두 가지였고, 네이트온의 자리는 이제 카카오톡이 대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역사는 이어져 오고 있다.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보다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존재는 따로 있단 걸 알게 됐다. SNS도 잘 안 하던 내가 네이트온 노란 불빛 유무로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실시간 감시당하는 느낌이란 참... 빠른 피드백이 곧 생명, 휴일 없이 원할 때 언제든 AI처럼 답을 내놓아야 하는 이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막내야 바쁘니?」

「급한데 빨리 답 좀 해줘」


새벽에 이런 메시지라도 뜨면 심장이 덜덜 떨렸다. 지금 새벽 3시인데요? 란 말도 안 나올 만큼


무엇보다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거고 뉴비인 내가 맞춰야 한다는 분위기가 가장 적응 안 됐다.

그때는 이게 불합리한 일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요구했으므로, 나는 일말의 의혹도 갖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내 생활 반경을 스스로 제안했다.


선배나 피디들의 연락이 왔을 때 그들이 원하는 작업을 바로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컴퓨터 앞에 묶인 내 20대 청춘은 그렇게 휘발되어 날아가버렸다. 아예 어떤 일도 하지 않을 때를 제외하면 무조건 컴퓨터 반경 안에서 살았고, 그렇다 보니 어쩌다 출근하지 않고 쉬는 날에도 외출하고 내 삶을 즐기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연차가 들면서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이 모든 요구에 답할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고, 부당한 요구에는 조금씩 반기를 들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결과는 늘 같았다. 결국 나는 그 사람들이 하는 요구를 들어주고 있고, 기분 좋게 해 주지 왜 토를 다냐는 식의 핀잔까지 들을 때도 있었다.


누가 찾아주면 감사하게 생각해야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작가는 당연하게 대기하고 있는 사람, 뭔가 물어보면 어떤 상황이든 재깍재깍 답하고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심지어 같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은연중에 이런 마인드가 깔려 있는 분들이 있다.


「작가가 이 정도는 해줘야지」

「불만 갖지 말고 하자」


작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어가는 동업자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에겐 작가는 지시를 내리는 입장에 있는 을인 걸까?


이번처럼 촬영 당일에 가라고 한다거나, 미리 정해진 일정을 상의 없이 바꾼다거나, 갑자기 자료 보냈으니 바로 보고 피드백 달라고 한다거나, 자막 영상을 말없이 5~6시간 이상 늦게 주고 작가들이 일해서 넘기는 일정은 그대로(결국 작가의 업무 시간만 줄어든다) 둔다거나, 몇 날 며칠 밤새서 준비한 자료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해오라고 한다거나.


그래 놓고 정작 중요한 일(예를 들어 프로그램 종영)은 알려주지 않아서 외부 사람들보다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요즘 길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동 킥보드가 딱 지금 내 모습 같다. 원할 땐 언제든지 맘대로 쓰고 아무 데나 던져두고 책임 안 지고. 뾰족한 수가 없는 푸념은 스스로도 별로란 걸 알지만 10년 넘게 이런 인식이 바뀌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으니 마음이 참 깝깝하다.



결국 일요일 오후, 차를 몰고 잠실로 향했다. 집에서 출발했으니 가는데만 약 40분.

10분도 안 되는 인터뷰를 따기 위해 가기에는 여러모로 짜증 나는 상황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 드라이브한다는 마음으로 운전하다 보니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는 한결 기분이 나아져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으니, 곧 조연출도 촬영장비를 가지고 도착했다.

조연출도 일요일에 날벼락 맞은 기분이겠지란 생각이 드니 개미들끼리 얼굴 붉힐 일이 뭐가 있나 싶어 또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물론 그 문제의 피디가 현장에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화가 빨리 누그러진 것도 맞다.


"아침에는 놀라셨죠? 일요일에 멀리 나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아니에요 주말에도 고생 많으시죠 빨리 해결하고 차 막히기 전에 집에 가요"


약간의 잡음(물론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은 있었지만 서로를 이해한다는 눈빛과 짧은 대화로 마음속에 조금 남아있던 불만이 확 사라지는 걸 느꼈다. 내가 이렇게 말 한마디에도 불만 없이 일해주는 착한 사람인데 말이야! 기본 예의만 지켜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나는 그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등등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을 잠시 접고 촬영을 시작했다.


짧은 촬영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훨씬 막혔다. 주말 저녁 시간대에 딱 물려 한 시간 넘게 길에서 시간을 쏟았고, 겨우 집에 돌아오니 내 주말은 아름답게 날아간 후였다.


결국 2021년에도 이런 인식에 굴복하고 만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해졌지만 이제 새해가 밝았으니 희망차게 소망을 빌어봐야지

새해에는 작가를 비롯한 프리랜서들이 [오늘은 휴업입니다]하고 붙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일 한다니까요? 미리 이야기만 해주세요.

최고의 노력으로 만족을 보장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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