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기작 Jan 15. 2021

샐러드 빵이 되고 싶은 공갈빵

내가 가진 에너지를 1/n 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태생적으로 멀티태스킹이 잘 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바빠도 친구들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며 늘 무언가를 배우며 사는 사람들.

시야도 좁고 에너지도 적은 내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이 가진 무한한 삶에 대한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는 경이로움에 가깝다. 대자연의 신비를 볼 때와 비슷한 경외감이랄까?


어떻게 지치지 않는 거지? 분명히 나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스케줄로 일했는데? 조금 전까진 지쳐 보였는데?

자동차 주유구처럼 단번에 에너지를 채우는 비결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함께 프로그램을 했던 후배가 딱 이런 부류의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누구보다 똑 부러지게 일하던 그 후배는 출근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 비타민처럼 에너지를 내뿜으며 사무실 분위기를 바꿨고, 자신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은 기본, 팀 전체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곤 했다. 그리고 매일 퇴근 후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등, 단 하루도 바로 집에 가는 날 없이 열심히 퇴근 후 일과를 즐겼다. 함께 했던 프로그램이 워낙 바빠서 새벽까지 일하고 며칠씩 밤샐 때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서도 좀처럼 텐션이 떨어지지 않는 내 기준 기인에 가까웠다.


"난 진심으로 너를 존경해"


함께 일할 때 그 후배에게 늘 했던 말이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 진심을 가득 담아 경외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일하고 집에 가서 자는 것도 버거운데, 10년 가까이 이 생활을 하고 나서야 '이렇게 살면 안 될 거 같은데' 자각하는 정도였는데, 나보다 한참 어린 후배의 삶의 방식이 매우 부러웠다.


"언니 저는 일이 바빠서 뭘 못했어란 말을 하는 게 싫어요."


내 일이 바빠서, 불규칙해서 친구를 못 만나고, 연인에게 소홀하고, 취미생활을 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그런 말을 듣기도 싫고 스스로에게도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단 그 말에 나는 또 한 번 박수를 쳤다.

나이 든다고 다 어른이 아니라더니 내 눈앞에 있는 이 친구는 나보다 나이는 어려도 인생에 진리를 더 빨리 깨우친 한참 어른이구나. 배워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물론 감탄했다고 그걸 내 삶에 반영했다는 뜻은 아니다. 타고난 게으름의 벽은 상상 이상으로 높다.

하지만 몇 년 전에 나눈 그 대화가 종종 생각나는 걸 보면 내 삶에 준 울림이 꽤 컸던 모양이다.



얼마 전 다시 백수가 됐다.

몇 달간 열심히 일한 프로그램이 끝났고 나는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백수가 된 것이다. 프리랜서의 삶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만 매일 시간에 허덕이며 쫓기듯 일하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져 버리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할 때 시키는 데로 일만 하고 내 삶을 돌아보고 가꿔줄 여력이 없었던 나는 평화로운 평일 낮에 드러누워 그 후배와의 대화를 생각하며, 평화로움과 편안함, 외로움과 공허함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끼는 중이다.

사실 일을 시작하고 6~7년 차 정도가 될 때까진 몇 달을 놀아도 이 평화와 여유가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허비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그 느낌이 좋았달까. 이런 평화로움은 영원히 질리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간헐적으로 10년 넘게 백수가 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 좀 물리긴 한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휴식 시간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물 흐르듯 쓰다니. 지금이야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자세라고 하지만, 그래도 똑같이 쉬더라도 뭔가 다른 것, 생산적인 일, 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유행하는 만들기를 한다거나, 여행을 간다던가 그런 단편적인 것 말고 장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들.


10여 년째 매번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이런 공허함을 느끼는 걸 보면 이 문제점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나처럼 시간 활용을 잘 못하는 프리랜서가, 백수가, 그냥 누군가가 이런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번 일할 때 그 일정에 내 삶을 맞춰서 살다 보니 일이 쏙 빠지고 나면 텅 빈 공갈빵이 되는 느낌

속이 꽉 찬 샐러드 빵 같던 그 후배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일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고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사실 자업자득이긴 하다. 세상의 모든 일이라는 게 갑자기 이뤄지는 건 없고 모두 연속성을 갖기 마련이라,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든, 상황이 어떻든 갖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꾸준히 이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친구를 갖고 싶으면 꾸준히 연락하고 사람들을 살펴보며 마음을 써야 하고 특정 상황에서 막히지 않게 계속 관심 가지며 나를 위한 취미생활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간 일이 힘들고 벅차다는 이유로 외면한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내가 노력을 안 한 게 아냐. 친구한테 먼저 톡도 보내고 몇 번 취미생활을 해보려고 시도도 해봤다고.

그런데 남아있는 건 없고 여전히 공허해"



농담이 아니라 위기의식을 느끼고 몇 번 이것저것 깔짝 거려본 적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더 표현하고 여행도 떠나보고, 서핑도 배워보고, 비즈공예도 해보고, 와인 수업도 들어보고.


하지만 그중에서 연속성을 갖고 이어지고 있는 게 없다. 시간이 넘칠 땐 이리저리 깔짝대다가도 일이 바빠지면 하던 모든 걸 놓치고 일이 내 삶을 차지하게 되고,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휘발되고 난 후 나는 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백수가 되어있다. 그제야 뭔가 또 새로 시도해보고를 몇 번 반복하니 의미 없단 생각이 들어 허무감도 들었다. 연속성을 가져야만 하는데 일만으로도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다면 나는 정말 평생 이렇게 뚝뚝 끊기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걸까?



"사람마다 가진 에너지의 크기는 다르지만 총량은 있기 마련이잖아.

바쁠 때 그 총량을 나누는 시도부터 해보면 어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말을 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내 말에 한 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삶이 달라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접근법이었다.

나는 그저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이 작다는 것이 신경 쓰였고 내심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키가 작아서 만원 버스에서 손잡이 잡는 것이 힘든 것처럼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이 작다는 것이 더 신경 쓰였고, 이미 성장판이 닫힌 듯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근본적으로 왜 이렇게 태어나서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지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들던 참이었다.


겉보기에 무한대로 에너지가 샘솟는 것 같은 사람도 그 사람만의 총량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삶에 연속성을 갖기 위해 에너지를 잘 나누고 있을 거란 점은 생각한 적 없다. 막연히 나를 뺀 사람들은 에너지가 무한대로 나온다고 단정 지어버리면 상대가 되지 않지만, 너도 나도 무한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부러울 것이 없다.

그저 나한테 맞는 에너지 배분 방법을 찾아가면 된다.


살짝 비틀어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관점이 달라진다니, 역시 생각은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밖으로 꺼내고 교류해야 하는구나 느낀 순간이다.


물론 지금 깨달았다고 해서 내 안에서 얼마나 연속성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 번 깨달은 기억은 문득문득 삶 속에서 떠오르기 마련이니 그때마다 다시 한번 깨우치고, 깨우치고를 반복하면 공갈빵 인생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비어있으면 채우는 건 쉬우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기 중이지만 대기 안 하고 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