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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Sep 01. 2021

천연 그라데이션 손목 타투

누가 뭐라든 올여름도 열심히 살았다


예고하고 찾아오는 이별은 없다지만, 올여름은 누군가 위에서 내 활동을 지켜보다 날씨를 바뀐 느낌이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수리로 다이렉트로 꽂히는 햇빛에 온 몸이 익고 비가 미친 듯이 내리다가 갑자기 그치고 지열과 습도로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날씨가 계속되더니 야외 촬영을 공식적으로 마치자마자 온 몸이 추울 정도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됐다.


'우리 죽이려는 거 아냐?' '너무 더운데?'란 농담 섞인 진담을 몇 달간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다. 내가 봐도 올여름은 너무 더웠고 특히 그늘 하나 마땅치 않은 야외에서 온 몸을 부딪치며 스포츠를 하기에는 미친 날씨였다. 촬영장에서 뛰어다니는 나도 매번 옷이 다 젖을 정도였는데 출연자들은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다 해드릴 수 있는데 날씨는 제 소관이 아니라서요.' 촬영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물을 챙겨주고 출연자 옆에 붙어서 하나도 위로 안 되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것뿐이었다. 어째튼 촬영은 해야 하고 날씨는 정말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문제고, 더운 날씨에 야외에서 촬영하다 보면 덥고 지치는 게 너무 이해됐기 때문이다. 이 시시한 농담이 정말 출연자의 기분을 풀어주었을지는 미지수지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농담 콤보를 해대면 다들 이 상황이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주었다. 참 여러모로 할 말도 많고 힘든 프로그램이었지만 출연진만큼은 좋은 분들을 만났었다 자부한다.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피곤에 쩔은 빨래처럼 늘어져 있다가 조금 기력을 차리고 나면 그제야 나를 돌아볼 시간이 생기는데, 찝찝함이 피곤함을 이기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가면 현타가 오곤 한다.


오늘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온 몸에 자국이 그대로 남아버리기 때문이다. 햇빛을 피한다고 긴 옷을 입으면 긴 셔츠가 덮지 못하는 손등이 더 타고, 팔을 걷거나 반팔을 입고 있으면 팔뚝에 그대로 자국이 남아있다. 원래 잘 타는 체질에다 하루 종일 땡볕 아래를 뛰어다니니 옷이 없는 부분이 몽땅 타버리는 것인데, 이번 촬영 때는 신발 윗부분과 바지 끝단 사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빈 부분만 타서 발바닥을 기준으로 줄무늬가 생겼다. 원래 줄무니를 좋아하긴 하지만 몸에 새기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는데... 인간 생 제임스가 된 느낌이다.


그래도 가릴 수 있는 부위는 좀 낫다. 원래 잘 타는 편이라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지만 올여름에는 이전에는 못 느꼈던 난감한 변화가 생겼는데, 바로 시계를 찼던 왼쪽 손목에 생긴 변화다. 오른쪽은 직사광선을 그대로 받아 눈에 보이는 부분이 바짝 구운 닭껍질처럼 골고루 탄 반면 왼쪽은 시계를 찼던 자리에 강한 존재감이 남아버렸다. 시계를 차서 햇빛이 차단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톤 차이가 두 톤 정도 생겼다. 23호와 25호 정도의 차이인데 존재감이 너무 강해서 시계를 안 하고 있을 때는 자꾸 신경 쓰인다.


심지어 촬영이 다 끝나고 재택으로 전환하면서 시계를 차는 시간이 더 줄었고, 시계를 안 하고 있을 때도 하고 있는 듯한 톤 차이에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 '날씨는 제 소관이 아니라서요'라고 했던 말이 그대로 나한테 돌아온 셈이다. 태양한테 촬영한다고 옆으로 이동해달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 내가 받아들여야지. 이것도 다 열심히 산 흔적 아니겠어하고 생각하다 보니 첫 촬영 전 미팅 때 출연자들과 만났던 때가 생각났다.


아직 햇빛이 강하지 않은 봄이지만 야외 운동을 오래 한 티가 확실히 나는 피부톤이었는데, 가장 놀라운 건 얼굴의 피부 톤 차이였다. 마스크를 기준으로 얼굴 위아래 피부톤 차이가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컸는데, 피부가 그렇게 그을리지 않은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던 사람도 마스크를 벗을 때 드러난 하관 쪽은 몇 배는 뽀얀 걸 보고 '진짜 열심히 운동했구나. 눈에 다 보이는 곳이 저래서 어째'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눈에 띄는 곳에 자국을 남기고 나니, 섣불리 걱정할 게 아니었구나 내 생각이 짧았단 생각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눈에 보일 정도로 피부가 탄 건, 내 위치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상황일 뿐이고 오히려 열심히 살았다는 뜻이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마 내가 만났던 출연자가 내 앞에서 피부 톤 차이가 너무 나서 고민이라고 말했다면 내가 나서서 정말 멋지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해줬을 게 분명하다. 내 일이 때문에 시야가 좁았을 뿐, 그렇게 생각하니 까맣고 얼룩덜룩해진 피부가 눈에 띄어도 크게 거슬리지 않게 됐다. 그들의 명예의 훈장에 비하면 내 몸이 탄 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여름 그 사람들과 열심히 호흡하며 뛰어다녔다 정도로는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더운 여름이 갑자기 물러갔으니 나도 그 여름을 보내고 다시 앞으로 나가야겠다. 덜 탄 손목 위에는 시계를 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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