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말려진 황태는 새로운 자극을 찾아 떠납니다
'아오 허리 아파 죽겠다'
촬영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익숙한 곡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자는 사이 누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밟아주기라도 한 듯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일어나는 것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새우튀김처럼 몸을 좌우로 뒤집어 가며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바로 어제는 하루 종일 수십 명의 사람들과 끝없이 떠들고 움직였는데, 오늘은 손바닥만 한 내 방에 혼자 누워있으니 어제 일이 전생같이 느껴졌다. 아무리 일 때문이라지만 하루 사이에 주변 환경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바뀌어도 괜찮은 걸까?
생각해본들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라 깔끔하게 포기하고 몸을 반대편으로 뒤집었다. 방송 일이 늘 바쁘고 정신없다지만 웬만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면 촬영 다음날 오전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다. 물론 전날 영향을 별로 안 받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오전에는 침대에 붙어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모자란 에너지를 채우는 것을 선호한다.
새우튀김처럼 간헐적으로 몸을 왼쪽으로 뒤집고 오른쪽으로 뒤집어가며 유튜브를 보고 쇼핑을 하고 다시 자고를 반복하면서 행복하게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을 갖는다. 틈만 나면 게을러지는 게 취미인 나지만 게으르게 살면서도 항상 일말의 죄책감은 가지고 있는데(물론 티가 전혀 안 날 만큼 작다) 촬영 다음날 만큼은 죄책감없이 당당하게 게을러질 수 있어 좋다. 전날 미처 못 채운 게으름을 채우는 [게으름 질량의 법칙] 같은 것이다.
어제는 야외 촬영 아르바이트를 다녀왔다. 장소를 몇 번 이동하며 진행했는데, 가을 날씨가 아주 선선해서 촬영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온 초가을 시기는 촬영의 적기다. 하늘은 파랗고, 맑고, 높아서 청량한 느낌을 주고, 모든 것을 다 불태울 듯 뜨겁던 태양은 한풀 꺾여서 밝으면서도 은은한 느낌을 준다. 바람은 머리칼을 가볍게 흔드는 정도라 카메라 앵글로 보면 이렇게 예쁜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청량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그리고 사람이 덕장의 황태처럼 적절하게 말려지기도 참 좋은 날씨다. 가을볕이 보기에는 참 예쁜데, 막상 그 아래 서면 생각보다 강한 햇빛에 놀라게 된다. 유난히 높이 뜬 태양에서 떨어지는 직사광선이 얼굴로 바로 내려 꽂히는 기분이라 그늘을 찾아도 신체 한 부분은 햇빛에 노출되게 된다. 체감상 여름은 태양이 90도 직사광선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라면 가을은 45-60도쯤 기울어서 내 몸 전체를 다 비추는 느낌이다. 의외로 일자보다 살짝 기울어진 각도가 햇빛의 면적이 넓어서 그런가 더 피하기 힘든 느낌이다.
그렇다 보니 초가을에 어설프게 부는 바람은 햇빛의 강렬함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다. 방송 화면에서 [시원할 것 같고] [선선한 가을]이라는 이미지가 느껴지는 정도의 바람이면 실제로는 거의 부는 듯 마는 듯하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시원하다고 느끼기보단 이 바람이 내 수분을 쪽 빨아간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건조한 날씨에 나름 바람이라고 하루 종일 맞고 다니다 보면 다음 날에는 몸이 퉁퉁 부어서 평소보다 몸이 3cm는 더 바닥으로 꺼진 느낌을 준다.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부는 덕장에 널어진 황태들 마음이 이런 것일까.
어쨌든 이 시기는 촬영 결과물이 예뻐서 좋으면서도 촬영을 거듭할수록 내 몸의 수분이 모두 사라져 꼬들꼬들 고소해질 수 있을 것 같단 느낌이 드는 때다.
대자연의 힘으로 몸이 반건조화 된다면, 신체는 중력의 힘을 거스르고 새로운 형태를 갖게 된다.
아침에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평소와 똑같이 어깨와 허리를 펴고 다니지만, 촬영이 길어질수록 점점 편안한 상태로 진화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깨에 힘이 풀리면서 안으로 굽어지고 오후 촬영쯤이 되면 등이 말리고 촬영 막바지쯤이 되면 허리도 굽은 상태로 다니게 된다.
출연자와 리딩을 한다거나 피디랑 연출 논의 등 뭔가 일을 하고 있을 땐 힘줘서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지만 촬영이 시작하고 당장 내가 할 역할이 없는 상황이 되면 순식간에 중력을 거스르고 유령처럼 허리를 굽힌 채 배회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콩벌레처럼 몸을 반이상 말게 되고, 다음날 침대에서 몸을 좌우로 뒤척이면서 유난히 쑤신 뒤 허리를 두드리며 '아 허리 못 피겠는데'를 반복하게 된다.
원래 생물이던 걸 건조할 때 고정장치를 해두지 않으면 제멋대로 쪼그라드는데 나도 그런 자연의 섭리를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뭐하러 진화한 걸까? 어차피 방심하면 허리는 다시 굽히게 되어 있는데. 지플립이 유행인 것도 결국엔 반으로 접히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 아닐까 등등
쓸데없지만 계속 떠오르는 거 보면 뭔가 인과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항상 결론을 내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이 점점 아무 말로 발전할 때쯤 되면 억지로 굽은 허리를 펴고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설프게 건조되다 말아서 퉁퉁 부은 몸은 처음에는 삐걱거리지만 에너지를 넣고 와글와글 떠들며 움직이다 보면 조금씩 움직임의 껄끄러움과 어색함이 사라지게 된다. 뜨거운 햇빛과 차가운 바람이 만든 부종은 붓기로 사라지든 살이 되든 할 것이고, 서서히 일상의 움직임을 무리 없이 소화하다 보면 잡생각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언제 생겼는지 원인을 잊은 허리 통증만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상이 된다.
일상에서 계절의 변화, 극단적인 에너지 소진을 경험할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심지어 촬영장은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도 없기 때문에 반강제로 움직이다 보면 4계절의 햇빛, 바람, 기온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 계절 변화에 약한 나로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그만큼 강렬한 경험이기 때문에 몸에 확실하게 남는다. 그리고 강렬한 기억이 추억이 되면 대부분 미화되기 때문에 온도 조절되고 자연의 바람을 마주할 일 없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생각이 나다 못해 그리워지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극에 굉장히 약한 역치의 동물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익숙해지고 나면 분명 고통스러웠으면서도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된다. 그래서 야외 촬영으로 반건조 상태가 되고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그때의 고통을 잊고, '그때 재밌었지''또 야외 촬영 나가고 싶네''역시 난 스튜디오가 안 맞나 봐'하는 생각들을 하곤 한다.
겨울에는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에 폭설에 칼바람을 맞으며 덜덜 떨고, 여름에는 40도 가까운 더운 날씨에 그늘 하나 없는 곳에서 직사광선을 맞으면서 속이 울렁거리는 걸 경험하고도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고통을 즐기는 타입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드는데 내가 그 정도까지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마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내가 가진 에너지 이상으로 분출하며 열심히 살았다는 뿌듯함, 생동감,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 아닐까 싶다.
머리는 부지런하고 싶지만 몸은 게으른 타입이기 때문에 일 때문에 강제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가지고 있는 에너지 이상으로 소진해 버리고 다음날 빈 에너지를 채우는 사이클이 나에게 꽤 큰 만족감을 주는 것 같다.
삶에서 열심히 살았다는 느낌을 받고, 생동감을 느끼는 순간을 확실하게 안다는 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게다가 같은 상황의 횟수를 거듭할수록 밑바닥이 아주 조금씩 더 깊어지는 걸 느끼는데, 좀 더 깊어진 밑바닥을 확인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묘한 뿌듯함을 준다.
다만 일이라는 게 언제까지나 내가 원하는 데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생동감을 느끼는 상황이 극단적인 한 상황에만 매몰되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느낌이라, 일상의 다른 상황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을 찾아보려 하고 있다.
나의 경우 [에너지를 다 쓰고 채우는] 그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일상에서 이런 감각을 느끼는 건 쉽지 않은지라 비슷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있는지, 혹은 다른 감정 중에 비슷한 기쁨을 주는 것이 있는지 알아봐서 몇 개라도 좀 더 캐치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삶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횟수가 더 다양하고 더 증가한다면,
그다음에 또 보이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