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각성
비슷한 주제, 비슷한 포맷의 프로그램을 연달아서 한 적이 있었다.
A 프로그램이 끝나고 몇 달을 방황하다가 A 프로그램 제작진 일부가 참여한 B 프로그램에 오라는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원래 내 스타일대로라면 동일한 포맷과 주제는 피하는 편이지만 당시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공백이 길어진 상태였고, 함께 일하던 다른 작가들은 이미 다음 자리를 구해서 떠나고 나 혼자만 남은 상태였다. 미래에 대한 불안하고 초조함이 가득했던 시기라 고민 끝에 그 제안을 받았다.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는데 하릴없이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게 낫다는 게 당시의 생각이었다.
프로그램 특성상 특정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분야에 경력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렇다 보니 B 프로그램 출연자를 리스트업 할 때 자연스럽게 A 프로그램 출연자, 혹은 A 프로그램 출연 물망에 올랐던 사람들이 명단에 올라왔다. 물론 A 프로그램이 끝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출연진마저 겹치면 너무 비슷할 것 같다는 이유로 A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사람들은 섭외 물망에서 모두 제외됐지만, 출연자를 비롯해 프로그램 포맷, 진행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A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거론됐다. 제작진의 일부가 A 프로그램에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적나라한 비교는 덜했지만 B 프로그램의 CP는 본인이 분석한 A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며 이런 점들은 피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때마다 속으로 말은 안 했지만 A 프로그램을 하고 B 프로그램으로 넘어온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A 프로그램을 할 때 어땠는지 계속 의견을 물어보면서 대답하면 그게 문제점이었다며 그거보다 더 나은 걸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이상한 깍두기가 된 기분이 한동안 이어졌었다.
그리고 출연자 미팅을 다니면서 오묘한 기분은 더 강해졌다. 섭외 물망에 오른 인물 중 관심을 보인 사람들을 만나며 구성 방식, 진행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고 미팅을 할 정도면 대부분 프로그램에 관심이 어느 정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미팅이 진행됐다.
그런데 미팅에서도 어느 정도 대화가 이어지다 보면 꼭 똑같은 질문이 나왔다.
"작가님 A 프로그램 아시죠? 제가 관심 있어서 계속 지켜봤었거든요. 그 프로그램 왜 망한 거 같아요?"
웬만하면 출연자 미팅 때 막힘없이 아무 말이나 잘하는 편이지만 그 질문만큼은 항상 말문이 막혔다.
특정 분야를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보니 해당 분야에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관심 있게 지켜봤던 모양이다. 대화를 하는 건 좋은데, 내가 했던 일이 왜 망한 것 같냐니, 물론 상대방은 내가 그 프로그램을 한 줄 모르기 때문에 한 질문이지만 그래서 더 마음 깊숙하게 아렸다. 내가 열심히 했던 것과는 별개로 밖에서 보는 시선은 이렇구나 적나라한 현실을 마주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 프로그램 왜 안 됐는지 이유를 몇 가지나 설명할 수 있거든요. 방송 보면서 적어둔 것도 있는데 보실래요?"
한 출연자는 나에게 본인이 모니터 하며 적어둔 내용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문 방송인도 아닌데 정말 열정적인 사람이구나. 자기가 나가지도 않은 프로그램을 모니터 하며 문제점을 체크하고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도 생각하다니. 정말 훌륭한 출연자란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체크한 포인트들이 전부 납득 가는 내용들이 더더욱 할 말을 잃었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분석에 호응하며 이야기를 들은 후 다음 이야기로 주제를 바꿨다.
그날은 미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밖에서 내 프로그램을 보는 적나라한 시선을 마주한 게 처음이라 부끄럽고,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지적사항 중 대부분이 현장에서 이미 알고 있어도 제작 여건상 바꿀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전문가가 보는 현장과 전문성을 띈 방송 제작 현장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고, 시각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그렇게 기본도 모르는 사람은 아닌데. 다 사정이 있었는데' 하는 마음이 울컥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기로 했다. 상대는 내가 그 프로그램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어쨌든 결과물에서 보이는 문제점을 알면서도 개선하지 못했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나를 변호하려다가 나를 더 바닥으로 끌어내릴게 뻔한 그 말은 속으로 삼키고 이번에는 더 열심히 해야지. 더 세세하게 준비하고 문제점은 더 확실하게 어필해서 바꾸려고 노력해야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B 프로그램을 끝냈다. 내내 A 프로그램의 망령에 시달리며 일하긴 했지만, 항상 새로운 포맷, 주제만 찾아다니다가 한 분야를 좀 더 깊게 파고드는 일을 해보니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경험이 있어서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생각만큼 되지 않는 것도 많았다. 여러 가지로 문제점도 많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수적인 요인들은 다 차치하고 언제까지 비기너의 마음으로 새로운 포맷만 찾아다닐 건 아니구나 이제는 좀 더 깊게 전문적으로 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B 프로그램이 끝나고 탱자탱자 노는 백수로 돌아왔을 때쯤, 우연히 촬영 현장 아르바이트를 가게 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A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CP와 마주쳤다. 상대는 나를 기억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분은 바로 나를 알아보셨고 반갑게 인사하셨다. 잠시 근황을 물어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그분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날렸다.
"혹시 B 프로그램 봤어? 아주 엉망진창이더만. 우리가 했던 A 프로그램이 훨씬 낫더라고."
아 이 기시감. 도돌이표처럼 돌아온 익숙한 상황에 나는 또 한 번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상사 앞에서 제가 한 프로그램인데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번에도 어색하게 웃으며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정도로 주제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젠틀하게 자신이 생각한 문제점을 이야기하던 출연자와 달리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고 평가하는 그분은 좀 더 직설적이고 적나라했다.
"어떻게 섭외는 좀 한 거 같던데, 그걸 그렇게 하면 안 되지. A 프로그램 작가님들이 했으면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형편없다, 재미없다, 우리가 훨씬 낫다 등등을 빠르게 쏟아내는 그분을 보며 래퍼로 전향해도 되겠다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촬영 중이었기 때문에 반가운 회포를 푸는 정도로 짧게 마무리하고 그분은 다시 연출진 쪽으로 향했다. 나 역시 일을 한다는 핑계로 촬영장 구석으로 빠졌던 것 같다.
바쁜 분이라 잠깐 촬영 현장을 보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가시기 전에 다시 나를 찾을 때는 환하게 인사하며 다음에 더 좋은 프로그램에서 뵙자는 인사를 나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할 때조차 '우리가 더 나았어'라고 말하는 그분에게 차마 밖에서 본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 안 하던데요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또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이 업계에서 만나는 상사치 고는 꽤 좋은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총책임 자기 때문에 현장에 나올 일은 거의 없고, 메인 출연자와 연출진(메인작가&PD) 외에는 직접 소통할 일이 없다. 그렇다 보니 나처럼 중간 위치의 작가를 눈여겨볼 일도 없고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고, 그전에 같이 했던 프로그램이 좋았다고 다독이는 상사. 표현방식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 '그래도 저분은 같이 한 사람을 챙기는구나'하며 꽤나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집으로 가는 길은 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번에는 내 프로그램이 형편없었나, 내가 그렇게 실력이 없나 하는 속상한 마음을 넘어서서 '좋은 프로그램''잘 만든 프로그램'은 뭔지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가 더 나았어'라고 말하는 평가 기준은 무엇일까?
두 프로그램을 할 때 나는 진심으로 일했고, 힘들지만 즐거웠고, 화제가 되고 잘 되길 바랬다. 그리고 돌아온 현실은 적나라한 비평이었다. 주체는 조금씩 달랐지만 두 프로그램 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프로그램을 나 혼자 만드는 건 아니지만, 항상 고민해서 아이템을 정하고 진행했던 나는 궁금해졌다. 어떻게 했어야 했고, 어떻게 해야 잘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건가? 아니 애초에 사람들이 평가를 하는 기준이 뭘까?
방송은 결과물을 만들어서 내놓고, 오직 그것으로만 평가를 받는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진행과정, 현장의 상황, 제작 중 생기는 다양한 문제 상황 등은 제작진 외에는 알 수도 없고, 평가에서도 제외된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눈에 보이는 1시간으로 평가를 하게 마련이고, 오직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제작진만이 진행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부 평가를 한다. 여기서 외부와 내부 평가가 갈린다.
결과물로만 보는 외부에서는 방송의 흐름, 화면만을 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기초적'인 것이 빠져있으면 그때부터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기본적인 것들도 빠졌다고? A 프로그램에 대한 생각을 적어둔 출연자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도 이런 기초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외부에서 보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흐름이 충족되고,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주면 만족한다는 뜻도 된다.
내부에서는 진행과정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초'가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방송계 내부의 사정을 이해한다. 모두가 생각하는 1안이 있지만, 그걸 시도해보고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을 때 대안으로 내놓는 2안이라는 전개과정을 다 알기 때문에 좀 더 관대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닌 남이 한 프로그램에 대해 평가할 때는 이런 진행과정을 완벽하게 제거한다. 아니 오히려 내가 쌓은 게 힘들었을수록 타인에 대해서는 더 박한 평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동종업계의 경쟁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보니 하나의 프로그램에도 다양한 평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몇 번의 적나라한 평가를 겪고 나니 온 몸으로 체감한 것 같다.
이 경험들을 통해 내가 얻은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성공 욕구가 더 강해졌다.
프로그램은 나 혼자서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어느 포인트에서 대중의 마음이 움직이는 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로 전체를 이끌 힘이 아직 나에게는 없고, 그게 맞는지도 알 수 없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성공하는지 잘 모르겠고,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것도 운이 따라야 한다는 걸 알지만
어떻게든 대중들의 인정을 받고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머리로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게 성공의 척도가 아니란 걸 알지만, 워낙 결과물로 적나라하게 평가받는 산업에 있기 때문에 [내가 확신하는 것]을 만들어서 [내가 만족할 만큼]의 외부 평가를 받아야만 이 기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한 번은 '그 프로그램 괜찮더라. 재밌더라'하는 평가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항상 초심자의 위치를 고수하던 내가 걸어가야 할 다음 스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