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원더 키디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라이브 #소통 #좋아요
시대가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숫자 표기가 바뀌었다고 밀레니엄 버그가 나타나지도 않았고,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달력이 넘어갔다고 갑자기 디스토피아 세계가 펼쳐지지도 않았다.
2020년이 되고 이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가장 많이 소환된 추억의 인물을 꼽자면 2020 원더 키디가 1등이지 않을까 싶다.
연예인이면 각종 대중매체에 등장해 급전이라도 땡겼을 텐데, 나름 존재감은 있어도 둘리, 영심이처럼 시대를 풍미할 만큼 대중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각 잡고 언급하기엔 어린이 만화치고 무거운 분위기 주제 때문에 8090세대들이 2020년을 수식할 때 쓰는 단어 정도로 쓰이고 있다.
원더 키디는 일요일 KBS1TV에서 방영해주던 만화 중 하나였는데,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자원 고갈의 위기, 환경파괴로 멸망 위기에 놓인 지구를 대체할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났다 실종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찾기 위해 우주로 떠나는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2020년 미래를 다룬 공상과학 만화다.
그 시절을 보낸 어린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일주일 단위의 만화 방영 시간을 꿰차고 스케줄에 맞춰 TV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웬만해서는 한 번 본 만화는 끈질기게 앉아서 보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2020 원더 키디'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자세한 내용은 기억도 못하면서
(여자 주인공 머리 모양이 예뻤다는 것 정도? 위에 내용은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보다)
'재미없어! 나의 미래는 이럴 리 없어!' 하는 반발심만 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보기엔 어두운 배경이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먼 미래일 줄 알았지만 착실히 시간을 흘려보내 맞이한 2020년은 괜히 투정 부린 게 만화 주인공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평범하고 평화롭고, 어느 정도 그들의 예측과 맞는 세상이 되었다.
눈을 돌리면 보이는 창 밖의 풍경은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환경은 무너지고 정체 모를 병이 전 세계에 퍼져있고, 얼마 전까지 당연하게 누리던 생활에 제약이 걸렸다. 그리고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도 매우 빠르게 급변하고 있다.
원래도 칩거인이었던 나는 더욱 회사-집 루틴을 돌며, 우주탐사 대신 온라인상에서 마스크 탐사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패턴의 살지 않던 사람들도 삶의 궤도를 수정하면서 미디어 역시 그에 맞춰 방향을 바꾸고 있다.
너무 빠르게 변해버린 세상에 맞춰 급하게 방향을 수정하느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대중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게 문제이긴 한데, 방송국 입장에서는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모양 빠지는 게 대수는 아닐 것이다.
대중들은 미디어의 변화 중 첫 번째 시도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시도만 기억한다고 한다. 육아 예능 하면 시초가 된 '아빠 어디 가'와 지금까지 방영 중인 '슈퍼맨이 돌아왔다'만 기억하고, SBS에서 방영됐던 '오 마이 베이비'(드라마 아님. 육아 예능)는 이름조차 낯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최근 가장 파격적인 도전을 꾀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시도가 있다.
라이브 방송과 요리를 접목시킨 [라이브 쿡방]이다.
지난 주말, 오후 5시
두 개의 라이브 쿡방 쇼가 동시에 문을 열었다.
토요일은 요식업의 대가 백종원과 양세형이 출연하는 MBC '백 파더 : 요리를 멈추지 마'
일요일은 조세호, 규현과 스타 셰프들이 함께하는 올리브 '집 쿡 라이브'
너무 익숙한 연예인 MC와 스타 셰프의 조합이 뭐 특별한 것 있겠냐 싶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기존의 쿡방과는 차별화를 두고 새로운 형태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 찬 의지가 보인다.
두 프로그램의 공통 키워드는 #라이브 #쿡방 #소통
이전처럼 스타 셰프들이 등장해 생소한 식재료와 화려한 요리 실력을 뽐내거나, 레시피를 소개하는 단계에서 한층 업그레이드해서 TV에서 요리 수업을 열고 라이브로 소통해보겠다는 것이다. 이 기획이 잘 먹힌다면 이번 주말 저녁은 백종원 혹은 규현이 만든 요리를 따라 해 보자! 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고 요리에 사용된 재료 구입이 늘면서 수익이 떨어져 힘든 우리 농가를 돕는데도 일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라이브 쿡방 쇼]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다.
코로나 시대가 도래한 이후 사람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직접 요리를 하는 비율이 높아졌다는 기사를 봤는데, 시대의 변화 + 요리에 대한 욕구 + 농가를 살리자는 취지 + 웹 방송의 라이브 시스템까지 요즘 이슈가 되는 아이템은 죄다 때려 넣은, 속된 말로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넣어봤고 이게 먹혔으면 좋겠어라는 느낌의 프로그램이다.
한 달 여 전에 프로그램 보도가 나오기 전, 이 라이브쇼 프로그램이 작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때는 라이브 요리쇼라는 정보만 돌았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의 반응은
'이야 현생 버리고 죽으라는 거구나'였다.
긴장과 사고의 연속인 생방송에 사전 준비물이 넘쳐나는 요리가 주제
심지어 편성은 예능이라니?
또 누가 실제로 가능한지 여부를 생각 안 하고 기사에서 본 거만 조립해서 만들라고 했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제작진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힘들겠지만 화제는 되겠네. 누가 갈지 미래를 보고 가는구나 고생하겠다.' 정도의 예측이 작가들 사이에서 나왔고, 그 예상대로 지난 주말 '백 파더'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TV 프로그램의 본방사수 개념이 희미해진 지 오래고 황금시간대에 인기 예능 재방송을 틀어주던 것이 엊그제인데, '백 파더'는 방영되는 90분 동안 온라인을 아주 뜨겁게 달궜다. 아니 지난 주말만큼은 요즘 최고 인기라고 할 수 있는 '놀면 뭐하니'의 파급력을 넘어섰다고 본다.
다들 이제 TV 안 본다더니 아니었나 봐 싶을 정도로. 좋든 나쁘든 온 커뮤니티와 SNS가 한 프로그램 이야기로 도배되는 광경은 참 오랜만에 봤다. 무플보다 악플이 나은 게 방송가의 통념이니, 화제성만 놓고 보면 매우 성공적인 스타트를 끊은 셈이다.
사실 생방송 요리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능에서 보기 드물어서 그렇지 정보 프로그램에서 셰프가 생방송으로 요리하고 레시피를 소개하는 방식은 이미 보편화된 지 오래다. 당장 멀리 가지 않아도 10여 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일했던 프로그램에서도 셰프의 요리 코너가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 막내였던 나의 녹화날 주 업무 중에는 촬영에 필요한 식기류를 소품실에서 빌려오고, 닦아두고, 촬영이 모두 끝나면 깨끗하게 설거지해서 반납하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싱크대가 달린 소품실 구석방에서 나는 설거지를 하고 셰프님은 가져온 재료를 손질하며 이곳은 방송국인가 주방인가 하고 한탄 섞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때와 지금 등장한 '라이브 쿡방'에서 달라진 점을 꼽자면 셰프가 혼자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를 배울 사람을 선정해 라이브 방송을 연결하고 함께 요리하며 소통한다는 점이다.
방송 시간 동안 요리도 하고 시청자와 대화도 하고 질문 시간도 갖고, 요리 수업이 TV 화면으로 옮겨온 것이다.
김치볶음밥을 만들어도 유튜브에 검색해서 레시피와 재료를 찾아보는 시대에 유명 셰프가 내가 요리 만드는 모습을 보고 피드백을 해준다니, 기획단계에서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꼈는지 알 것 같다.
수강생들 역시 시대에 발맞춰 멀리 오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방송에 참여할 수 있게 했는데, 언택트 시대에 맞는 참여 방식을 도입하려고 노력한 점이 보인다.
그리고 라이브 쿡방에 대한 내 개인적인 감상평을 말하자면
공포 그 자체였다.
사실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서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계속 볼 자신이 없어서 채널을 넘겨가며 조금씩 보고 다시 채널을 돌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포기 선언을 했다. 재방송을 해줄 때 다시 보려고 시도했지만, 10분을 넘기지 못했다. 출연진도 안타깝고 제작진은 더 안타깝고 열심히 준비했을 텐데 방송 후에 겪게 될(실제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수많은 회의를 생각하니 마치 내가 그 팀의 작가라도 된 듯 쓸데없는 감정이입으로 심란해졌다.
의도는 좋았지만 너무 불확실한 가능성에 많은 것을 베팅한 느낌이었다.
'첫 라이브 방송 포맷에 왜 굳이 일반인 수강생을 모집했을까?
방송 제작 인원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있을 텐데, 너무 많은 건 아닌가?
라이브 채팅 참여와 요리를 따라 하는 건 다른 문제인데...?'
'백 파더'에 경우 49팀, '집쿡라이브'는 9팀의 수강생이 라이브 연결을 한다.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셰프와 MC, 일반인 수강생들이 함께 방송을 만들게 형성되어 있는데 어느 한쪽이라도 균형이 깨지면 방송 전체 흐름이 흔들릴게 분명한 구조였다. 방송에 익숙한 연예인들만 모아놔도 끌고 가기 쉽지 않은데 일반인, 심지어 제작진의 지도 없이 온라인 연결에만 의지하다니. 더 큰 사고가 안 난 게 다행이다 싶다.
라이브 소통의 기본인 인터넷 생방송의 경우, 각 채널마다 주제도 성향도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다. 주제가 흔들림 없이 확실하고 채널의 주인인 호스트가 모든 내용을 이끌고 간다. 호스트가 정확히 방송을 이끌고 가고 커버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청자 참여가 이뤄진다. 참여는 대부분 채팅으로 이뤄지고 함께 무언가를 하기도 하지만 채널 주인이 이끄는 방향에서 움직인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생방송은 후반 작업이 없기 때문에 이끌어 가는 사람의 역량이 중요하다.
목적의식이 흔들리거나 어색해하는 순간, 끝난다.
"이게 무슨 프로그램이죠?"
'백 파더' 진행 중 양세형이 한 말이다. 개그 센스와 진행 능력까지 인증받은 대세 연예인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몇 년째 예능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일에 철저하다는 뜻과도 연결되는데 그런 양세형이 자신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숙지가 안 되어 있을 리는 없으니 저절로 그런 말이 나올 만큼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는 뜻이다.
촬영되는 모든 순간이 바로 송출되는 생방송에 일반인 출연자들은 온라인 연결로만 볼 수 있으니 당황스러울 만도 하다. 함께 있으면 촬영 전에 미리 어떤 대화를 할지 이야기도 나누고, 문제가 있을 땐 카메라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송 진행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어떤 조치를 취해보겠지만, MC조차 수강생을 화면으로 만나고 있으니 문제가 생겨도 해결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라이브 연결도 문제인데, 그냥 채팅에 참여하는 정도는 몇 천명이 접속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영상을 방송시간 내내 연결한다는 점은 사람에 따라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 환경에 따라 화질도 연결 문제도 너무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소통하며 요리를 배우기 위해 참여했는데, 정작 필요한 순간에 충분한 답변을 얻을 수 없는 문제도 생긴다.
그리고 일단, 재미가 없다. 사실과 정보 전달 위주가 되는 뉴스나 정보 프로그램의 경우 '정보 전달'이라는 목적에만 초점을 맞추면 되지만 예능은 일단 '재미'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시스템이 안정적이어도 사람들이 안 보면 끝이다. 날고 기는 유튜버들도 흐름에 따라 재미없어지면 기울고 재밌으면 떠오르는 게 다반사인데 방송이라고 다른 점이 있을까.
예능은 촬영만큼 편집과 후반 작업도 중요하다. 같은 장면도 어떻게 편집하고 포인트를 잡아주냐에 따라 재미가 확 달라진다. '라디오스타'를 장수 예능으로 만든 힘은 MC들의 입담과 거침없는 자막, CG의 다양한 활용이다. 이 세 박자가 힘을 받쳐 라스만의 개그를 만들어낸 것이다.
생방송은 소통은 가능해도 어떤 멘트와 상황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자막이 불가능하다. '마리텔'도 인터넷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고 TV에 방영될 때는 후반 작업이 이뤄진 편집 영상을 내보냈다. 사람들이 소통, 날것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유튜브에 떠도는 그 날것의 영상마저도 편집하고 자막을 입히고 썸네일을 만든 편집물이다.
소통과 라이브는 중요하지만 그걸 너무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면 논란 밖에 남지 않는다.
그 어떤 제작진이든 내가 만든 프로그램이 사랑받길 바란다.
내가 제작을 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노동력이 아깝지 않게 말이다.
숏폼 예능이 등장했듯, 이런 라이브 소통 프로그램 역시 이제 시작이라고 본다.
도전은 시작됐고 앞으로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비슷하고 조금 변형된 도전을 하고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자리 잡고 성공을 맛본다면,
그 롤모델을 따라 수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양상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면 대중들은 지루해할 것이다.
여기나 저기나 똑같은 프로그램만 한다고.
새로운 도전이 있어야 새로운 트렌드가 열린다.
이제 막 시작된 라이브 소통 쇼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눈여겨봐야겠다.
미래의 내가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생방송만은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