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운 재재 열 스타 안 부럽다

스물로 돌아가는 음악의 힘과 21세기형 공채, 그리고 모르겠다 테스 형

by 심미금


10대 시절 명절에 대한 내 감정은 '묘한 정적, 어색함과 불편함 사이 어디 즈음'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기억이 꽤 또렷해진 중학생 무렵부터 명절 하면 알 수 없는 정적을 항상 느끼곤 했는데, 적당히 무시할 수 있지만 하루에 견딜 수 있는 한계치가 늘 있어서 기회만 되면 잠시라도 친척집을 빠져나가려고 동생과 머리를 굴렸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다 알지만 자주 오지 않아 낯선 큰아버지 댁에 일 년에 두어 번 보는 친척들이 바글바글 모여 하루 종일 전을 붙이고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공기 중을 떠도는 기묘한 적막감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럴 때면 모두가 TV가 구세주인냥 열심히 브라운관을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명절 첫날에는 평소에 보지도 않던 신문지에서 편성표와 가로세로 낱말 퀴즈가 있는 페이지만 빠르게 빼내는 게 일과였는데,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미리 체크해두고 리모컨을 사수하기 위해서였지만 만화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놀러 나가는 일이 많아서 제대로 챙겨본 경우는 많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명절의 의미가 많이 축소됐고, 힘들게 요리하고 남은 음식 처리에 골머리를 앓는 것보단 딱 먹을 만큼만 사서 명절 당일에 만나 한 끼 식사하고 헤어지자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특히 올 추석은 감염병 위험 때문에 이동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강력한 메시지에 따라 친가, 외가 모두 가지 않았다. 그 대신 거실 TV, 내 방 노트북, 스마트폰 앞으로 바쁘게 이동하며 보냈고 간만에 추석 특집 프로그램들을 챙겨보았다.


모든 특집 프로그램을 보진 못했고 관심 가는 몇몇 프로그램을 챙겨봤는데(유튜브와 넷플릭스에 살다시피 하는 평소에 비하면 많이 본 편이다) 꽤 인상 깊게 본 프로그램이 몇 개 있다. mbc [청춘 다큐 다시 스물 커피프린스], kbs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sbs [추석특집 문명특급 숨듣명 콘서트] 이렇게 모아 두고 보니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만 골라 탄 수준이다.


커프 다큐나 나훈아 콘서트도 매우 즐겁게 봤지만 가장 감명 깊게 본 프로그램은 숨듣명 콘서트였다. god 다음에 잠시 내 좌심방을 다녀간 ss501의 무대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이 콘서트가 주는 다양한 감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엊그제 같지만, 어느새 2010년이 10년 전이 되었다. 몇 년 전 1990년대 노래가 붐을 일으켰듯이 이제 이 시기의 문화들이 추억 회상용 콘텐츠 반열에 들어선 때가 된 것 같다. 콘텐츠에 자신의 과거를 대입하고 추억을 회상하는 건 누구나 가능하지만(심지어 그 시기를 살지 않았던 사람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 시기에 20대를 보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매우 특별하다. 그 시절 문화를 이끈 스타들과 또래인 나는 단순히 유행을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그 문화가 정착하고 뻗어나가는데 한몫을 했다. 내가 '함께' 만든 문화에 대해 느끼는 애정도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사실 그간 1990년대 문화에 대한 콘텐츠를 볼 때 내가 느낀 점은 '아 그때 그랬었지'정도였다. 응팔은 그냥 옛날이고 응사는 기억이 희미하고 응칠 정도가 그랬었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정도였다. 아직은 내 바로 윗세대 언니들이 즐기는 문화를 쫓아가며 맛만 본 정도랄까?


하지만 숨듣명에서 집중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였고 그때 딱 20살이 되었던 나는 머릿속에 팡파레가 울리다 못해 행복하고 즐겁고 아련해졌다. 교복 대신 유행하는 가보시힐을 신고 동네를 벗어나 먼 곳으로 학교를 다니고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정 넘은 시간까지 놀아도 걱정 없던 시절.

단순히 이런 음악이 유행했음을 넘어서서 20대 초반의 나를 떠올리는 것은 드문 경험이다.


심지어 음악은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시절에 내가 어떤 20대를 살았다고 해도 상관없이 추억할 수 있다.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청춘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평등하게 추억을 떠올리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인데, 새삼 음악이 갖는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메인이 아닌 [숨겨진 명곡]이란 점도 좋았지만 사실 수많은 가수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세상에 그룹명이 각인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공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부분은 따로 짚지 않아도 될 거 같다.


추억 회상을 뒤로하고 개인적으로 이번 특집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TV로 진출했음에도 유튜브 [문명특급]의 본질을 잊지 않았다는 점이다.


숨듣명 콘서트 직전, 미리보기로 무대 몇 개가 유튜브에 선공개됐다. 사실 그때까진 숨듣명 콘서트가 TV에 방영되는 걸 모르는 사람들의 유입을 늘리고 추석 코인을 타서 시청률과 조회수를 끌어보려고 하나보다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문명특급을 즐겁게 보던 입장에서 유튜브에서 방송으로 옮겨왔을 때 생길 문제들에 대해 혼자 걱정했다. 유튜브와 TV 콘텐츠는 길이와 호흡부터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본연의 느낌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큰 무대에서 더 잘해보려고 하다가 원래의 매력도 잃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기도 했다.


숨듣명은 한 부분일 뿐이고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틀은 문명특급이고 문명특급의 시그니처는 연반인 재재다. 유튜브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재재가 누구인지 알기 힘든 반면 그 외 출연진들은 얼굴이 잘 알려진 스타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쪽으로 포커스가 쏠리기 마련이다. 일반적이라면 재재의 역할을 확 줄이고 가수들의 무대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재재 혼자가 약하다고 판단(?)되면 얼굴이 알려진 출연진 중의 한 명을 더블 MC로 세울 수도 있다. 어차피 출연하는 가수 중에 한 명을 MC로 세우면 구색도 맞추고 안전성도 더 확보할 수 있다며 합리적인(?) 생각을 했다고 감탄하는 사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다기 보단 더 먹힐 것 같은 쪽으로 힘을 싣다 보면 이런 곁가지가 붙기 시작하는데, 그러다 보면 오리지널의 힘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지금 보는 프로그램이 문명특급인지 인기가요인지 토토가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기우라는 걸 보여주듯 재재는 프로그램 내내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깔끔한 진행실력은 기본, 무대에 피처링으로 참여하면서도 원작의 맛을 해치지 않는 선을 지키는 센스를 보여주었다. 스페셜 MC가 등장한 건 재재가 무대를 해야 할 때 티아라 지연이 잠시 소개 멘트를 한 정도밖에 없었다. 다른 가수들은 자신의 무대를 하고 재재와 인터뷰를 하고, 동시대에 활동했던 가수들의 무대를 지켜보았을 뿐이다.


제작진은 [재재와 숨듣명 콘서트]라는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시청자들에게 제시했고,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원래 문명특급을 보던 사람들은 '재재 코노 못 가서 프로그램 만든 거 아냐?'하고 웃을 수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모르는 얼굴이어도 '저 사람이 진행자인가 보구나. 문명특급이란 게 있나 보네'하고 좀 더 쉽게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방송 직후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연예인은 당연하고 재재에 대한 관심도에도 놀랐다


그리고 가장 놀란 점은 가수들의 무대가 끝날 때마다 하단에 나오던 문구였다.


[풀 버전 무대는 문명특급 유튜브에서 확인하세요]


정확한 멘트가 맞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보통 더 큰 풀에 진출하면 그쪽에서 모든 걸 터뜨리듯 보여주고 싶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명특급은 본진인 유튜브를 잊지 않고 '더 보고 싶으면 본진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심지어 유튜브에 선공개됐던 무대들은 TV에서 보여주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ss501의 '내 머리가 나빠서'는 꽃남 이야기도 하고 가수들이 둘이서 그 노래를 해야 하는 거에 대한 걱정(?)까지 모두 보여줬지만 유튜브 선공개로 공개됐을 뿐 방송에선 무대를 볼 수 없었다.


애초에 그때 그 시절에 과거를 회상하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게 목적인 프로그램이었고, 내가 그 팀 제작진이어도 방송에 모든 걸 때려 붓고 유튜브에서는 only 무대 직캠 버전(방송에는 과거 영상과 교차되는 장면이 많았다) 제공 정도만 생각했을 텐데 본진을 잊지 않는 그 센스에 혼자 감동했다. 재재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유튜브라는 본진을 잊지 않음으로써 똑같은 추억팔이라도 문명특급 만의 색깔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체 콘텐츠에 이만한 기회를 준 방송국에 대한 놀라움도 있었다.

문명특급은 sbs 뉴스의 단독 코너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카드 뉴스를 제작하던 평범한 인턴사원이 코너를 만들고 그게 커져서 단독 채널로 독립했다. 한 방송사에서 기회를 주고 키운 인물이란 점에서 21세기형 공채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사의 공채는 거의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새로운 프로그램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지만 스타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고 공채를 선발하고 기회를 주고 방송에 노출시키며 성장시키던 정통파의 명맥은 이미 끊겼다. 시대가 변하면서 스타가 탄생하는 방식이 다양해졌고 더는 옛날처럼 공채에 의존할 수 없다는 건 맞지만 공중파조차 유행에 휩쓸리고 오랜 시간 공들여야 하는 내실에는 관심 없어졌다는 건 여러모로 씁쓸하다.


몇 달 전에 함께 프로그램했던 출연자들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내부에서 방송인 양성에 점점 무관심해지고 있고 그로 인해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후배들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매우 공감했었다. 시대가 바뀌면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기본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우리끼리 안타까워한들 무슨 힘이 있나로 마무리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방송국 인턴에서 단독 채널로 확장하고 추석 특집 프로그램 진행까지 하게 된 재재는 '21세기형 공채'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고 방송국에서 계속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재재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형태를 이어받아 공중파만의 방송인을 만드는 힘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망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지만.




추억팔이에 과거 회상까지 즐거워지면 진짜 어른이(?) 된 거 라던데 평소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그 시절의 콘텐츠에 20대 초반 시절이 생각나며 급 아련해진 걸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나름 착실히 나이를 먹긴 한 모양이다.


여기에 약간의 과몰입도 더해 방송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내가 먹고 살 길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는 걸 보면 빼박 어른이 된 모양이다. 테스 형이 인생이 뭔지에 대해 빨리 답 좀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