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스펙 : 1 종영, 1 중도하차, 1 이직, 1 제작, 1 제작중단
친구> 우리 어제 녹화하는데 입구에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열재고 들어갔어
후배> 언니 프로는 괜찮아요? 우린 이번 주 녹화 취소되고 방송 밀렸어요 ㅠㅠ
작가방> **팀은 막방 생방 경연 무관중으로 간대요
요즘 주변 작가 지인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일이 많아졌다. 원래 하루종일 떠들며 의미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친구부터 오랜만에 연락하는 선후배,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작가들이 모인 익명의 단톡방까지. 구성원도 원래 목적도 다른 이 단톡방에서 나누는 대화 내용은 놀랍게도 거의 비슷하다.
아직 누르지 않은 카톡대화목록을 보면 나오는 말들은 대략 이렇다.
결방, 방송 중단, 딜레이, 무관중 등등. 단어는 조금씩 다르지만 요지는 똑같다.
‘너는 괜찮니?’ 프리랜서끼리 서로의 안부를 묻는 방식인 것이다.
PD> 한 달 뒤 상황 보자고 이야기됐어요. 출연자 측에는 제가 연락했고요.
그리고 지난주, 나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 설 연휴부터 준비를 시작해 3월 중순에 공개할 예정이었던 웹 콘텐츠가 결국 중단하기로 결정난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라 놀라진 않았다. 코로나로 세상이 난리고 기존에 하던 것도 중단되는 와중에 「새로운」 심지어 웹콘텐츠가 멀쩡히 진행될리 만무했다.
오히려 이미 답은 정해진 것 같은데 생각보다 빨리 확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 어쩌려고 그러지?'란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이번 주 할 일]
촬영 회의
제작진&출연자 미팅
촬영 구성안 수정
촬영 세팅 및 섭외
새 아이템 리스트업
스튜디오 녹화 원고 작업(2회분)
건강하게 다시 보잔 대화를 끝내고 메모장 어플에 적어둔 리스트를 확인했다. 연락받은 시간은 수요일 저녁.
원래 계획대로라면 내일 오전 제작진 회의를 시작으로 주말까지 촘촘하게 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는 상황이었다. 스케줄 하나라도 삐끗하는 순간 난리나는, 빈틈이라곤 없는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타고난 베짱이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 팔자에도 없던 프로그램을 두 개나 진행하던 중이라 셀프 고통을 받는 나날이었다. 혹시 까먹는 일정이 있을까봐 적어뒀던 할 일 목록들을 하나 둘 지웠다.
목록을 지우다 보니 타노스가 된 기분이 든다. 손가락 하나 튕겨서 모든 게 사라진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그렇게 일정을 다 지우고 나니 스튜디오 원고 작업 하나만 달랑 남았다.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말에도 시간 단위를 쪼개며 일할 예정이었는데 사라지고 하나가 남으니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이는 말도 안 되는 착시효과마저 들었다.
“별 수 있나. 한 달 뒤에 재개하자니까... 이번 주말은 쉴 수 있게 됐네.”
그렇게 말하면서 마음 한쪽에 스위치를 켠다.
[이렇게 연기되다 흐지부지 될 수도...
그럼 빛을 보지 못하고 지하에 박힌 내 아이템 목록이 또 추가되겠군.
일단 한 달간 일한 내 노동의 대가는 못 받을 확률 99%... 그간 못한 게임이나 하자]
방금 제작 중단 통보를 받은 나의 다음 일정은, 게임 켜기.
그간 일한 나의 노력이 물거품되는 것은 물론 제대로 된 댓가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했지만, 어쩌겠는가. 나에게 제작중단을 이야기한 피디님과 선배작가님은 이 후의 사태와 일정을 정리하고 수습하느라 정신없을텐데. 가만히 기다리면 어떻게든 되리라. 마침 경험치 두배 쿠폰도 받은 상태라 가상세계의 내 분신을 렙업시켜주기로 한다. 너라도 무럭무럭 잘 자라서 픽셀로 만들어진 몬스터들을 처치해주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한 대가를 못 받는 게 무슨 소리야. 당장 따져야지 싶을 수 있지만 10년간 계약서를 써본 일은 손에 꼽고 하루하루가 다른 업계에서 10년간 일하다 보니 깨달은 나름의 생활 팁이다. 한 순간에 노력이 사라지는 거에 대한 내 나름의 멘탈 보호 기술. 지금 여기서 '제 돈은요? 제 노력은 어떻게 되죠?'라고 말해봐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운이 나쁘면 당연한 내 권리를 찾는다는 이유로 듣지 않아도 될 잔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어떤 바른 말이든, 타이밍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은 편이다. 적어도 이해할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있으니 말이다. 영문도 모른채 촬영 직전에 프로그램이 엎어지는 것도 허다한데 이쯤이야. 모두가 힘든 시기이니 어쩔 수 없지하고 넘길 수 있는 정도가 된다는 뜻이다. 평소에는 이유조차 알 수 없이 사라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생각보다 방송작가는 하루살이의 삶을 살고 있고
놀랍게도 나는 10년 째 그럭저럭 잘 유지하며 버티고 있다.
이번 위기도 늘 그랬듯, 어떻게든 흘러갈 것이다. 유야무야하며.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다.
방송국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특수고용 노동자.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 긍정적으로 말하면 이직이 자유로운 편이고, 대놓고 말하면 언제든 쓰고 버려질 수 있는 부속품이다.
슬프게도 이런 고용불안에 익숙해 진 것도 이런 삶을 10년간 살아왔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PD와 작가는 한 세트로 묶이지만, 방송사 정규와 프리랜서가 혼재된 PD와 달리 방송작가는 모두 프리랜서다. tbs 교통방송에서 방송작가 정규채용을 하긴 했지만 정말 극소수의 이야기고 대부분 프리랜서라고 보는 쪽이 맞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이 주는 불안정감 외에도 버라이어티한 불합리한 일들이 종종 벌어지는 편이다.
예를 들어 멀쩡히 방송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까내고 들어올 신규 프로그램 팀이 꾸려지는 걸 본다거나, 내 방송이 종영된단 소식을 남에게 듣거나, 일하고도 월급을 못 받는다거나, 면접에서 떨어진 프로그램에서 내가 말한 아이템이 방송에 나오는 걸 보는 등등이다.
아주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일들이 많다.
딱히 방송작가라서 겪는 일들은 아니고 단어와 상황만 조금 바꾸면 대부분의 프리랜서들은 공감할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른 분야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친구 이야기를 들어봐도 조금 다를 뿐 중요한 맥락은 같았던 적이 만다.
정규직이 아닌 게 죄지. 흔하디 흔한 일이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는데, 모든 일이 사라진 지난 주말 카페에 동생과 앉아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뭘 위해 이렇게 일했지? 이래서 나한테 뭐가 남냐”
계속 그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지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타격이 컸나 보다. 예전의 나라면 그냥 흘러가게 뒀겠지만 어차피 시간도 비고 뭔가 해볼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 뭘 할까 하다 기록을 해보기로 했다. 일단 최근부터 거슬러 나의 6개월간의 떠돌이 연대기다.
[6개월 직장 떠돌이 연대기]
19년 7월 : 프로그램 종영
19년 8월~10월 : 백수생활
19년 11월 : 새 프로그램 투입
19년 12월 : 위 프로그램 중도하차 및 신규 예능 투입 (*이후 프로그램 잠정 중단)
20년 1월 ~ : 신규 예능 첫 방송 시작
20년 1월 설 연휴 : 웹 콘텐츠 제안 받음
20년 2월 : 방송과 동시에 웹 콘텐츠 준비
20년 3월 현 상황 : 웹 콘텐츠 제작 중단
6개월 사이 프로그램 종영이 한 건, 새 프로그램 투입과 중도하차가 한 건, 방송 시작이 한 건, 제작 중단 한 건을 겪었다. 3개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세상에 공개된 건 단 하나.
심지어 이 상황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프리랜서는 당연하게도 일이 공평하게 오지 않는다.
나이와 연차를 먹을 수록 일의 집중포화 현상은 심해져서 일이 몰리는 사람에게는 미친듯이 일이 쏟아지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뭄도 그런 가뭄이 없다. 잘 팔리는 사람은 끊임없이 일하고 안 팔리면 얄짤 없으니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 나서야 하는데, 그마저도 찾는다고 내 마음처럼 찾아지지도 않는다.
단순히 일을 잘하면, 유명한 프로그램을 하면 일이 몰리지 않나라고 하기엔 경력도 일실력도 좋은 작가들도 일자리가 없어서 놀 때가 있고 영 아닌 사람은 프로그램을 미친듯이 바꿔가며 돈을 버는 걸 보면 어떤 기준으로 일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미스테리다.
나 역시 일이 몰릴 때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몰리고 없을 때는 그냥 숨만 쉬며 버틴다. 이런 현상은 연차가 높아질수록 더해지는데, 그렇다 보니 9년 차에서 10년 차로 넘어오는 지난여름부터 지금까지 약 6개월간 이런 양극단의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좀 더 일을 잘해서 유명 프로그램을 많이 했거나, 유명한 작가님 라인을 탔으면 이런 고용 불안이 덜했을까도 싶지만... 이미 변두리를 걷고 있으면서 이런 가정은 무의미한 일이라 그냥 패스해야게다.
지난해 7월 말, 일주일에 8일 일하는 기분으로 시달리던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다.
일주일에 2-3일씩 집에 못 들어가는 건 애교. 수면실에서 자고, 씻고 구내식당에서 밥 먹고 사무실에서 일하고를 반복하며 카페인 과다에 두근대는 심장을 안고 살던 시간이더랬다.
방송국이 모여 있는 상암의 모 회사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못 자서 붓는 거나 울어서 붓는 거나 차이도 안 나니 살인적인 스케줄에 울면서 원고를 쓰고 출연자를 섭외하며 그렇게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있었나 싶은데 죽어라 일한 프로그램은 퀄리티 면에서는 나름 나쁘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그냥 만든 제작진 빼곤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수많은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사라졌고 프로그램 종영과 동시에 쓸모가 없어진(?)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백수의 세계로 돌아왔다.
이전에 했던 프로그램이 힘들었을수록 내 인생의 막도 내린 것처럼 게으른 사람이 되는데, 항상 프로그램을 하면서 모든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일주일은 그냥 시체처럼 잠자고 먹고 놀고 그렇게 탈진한 에너지를 다시 쌓는다. 정말 지난주까진 잠도 못자고 울며불며 일하며 열정을 쏟아서 만든 내 결과물은 온대간대 없이 사라지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서 빈둥거리는 나만 남는다.
그래도 이제 짬바가 좀 생겼다고 무작정 자던 예전과 달리 낮밤이 달라지면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타격이 크다는 것을 그간 임상실험으로 겪었기 때문에 남들이 일어나는 시간이 일어나고 남들이 자는 시간에 자며 정상인의 생활패턴으로 돌아온다.
가족들이 출근하면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초반에는 못 가던 곳, 못 만나던 친구들도 만나고 밀린 책, 예능, 드라마, 영화를 잔뜩 보느라 돈을 펑펑쓰고 재정이 쪼들리기 시작하면 최대한 아껴가며 그렇게 한 달 정도 되고 나면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한다.
다시 치열했던 그 삶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두려우면서도 너무 심심하고 나만 정체되어 있는 기분이 들어 안절부절못해진다. 돈은 떨어지고 언제 다시 일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고, 친구들은 일하고 결혼하고 앞으로 쭉쭉 나가는데 나 혼자 고립된 것 같은 느낌에 침울해질 때면 떨쳐내기 위해 더 열심히 구직활동을 한다.
TV며 유튜브며 넘치는 게 콘텐츠인데 도대체 내 자리는 왜 없는 걸까. 내가 그렇게 실력이 없던가. 자책하고 있을 즈음이면 나를 찾는 전화가 울린다.
“일 시작했니?”
그리고 다시 일하기의 반복.
이쯤되면 어떤 것이 진짜 나의 삶인지, 어느쪽이 신기루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언제 백수가 될지 모르듯, 백수 생활을 청산하는 것도 언제일지 알 수 없다. 벼락처럼 전화 한 통이면 당장 다시 일하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어떤 프로그램인지, 방송 예정은 언제인지, 페이는 얼마인지, 다음 주에 출근해라 정도의 10분 남짓 통화면 디엔드. 드디어 땅굴 파기를 끝내고 지상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떨결에 취업한 프로그램은 딱 한 달간 다시 가열차게 굴려진 뒤 스스로 박차고 나왔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지만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고 마침 새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와서 이직을 선택했다. 이직한 곳은 한 달간의 준비를 거쳐 1월에 방송을 시작했고, 그전에 일했던 프로는 여러 상황을 이유로 잠정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설 연휴 즈음 웹 콘텐츠 제안을 받았다. 원래 한 프로그램만 해도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서 힘들어하는 편인데 그때 무슨 생각인지 그 제안을 수락했다.
웹 콘텐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아 제작과정이 궁금하기도 했고 많은 일들이 지나갔지만 정작 이력서에는 지난해 7월 말 종영, 올해 1월까지 비어있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이력을 한 줄이라도 더 채우고 돈이나 벌어보잔 심산으로 고를 외친 것이다.
그리하야 2월은 팔자에도 없는 두 프로그램을 동시에 준비하며 정말 불태워지듯이 살았다. 달력에 단 하루도 일이 없는 날이 없었고 두 프로그램이 줄을 서서 나를 기다리는 상황이 무서울 정도였다. ’아 내가 그릇이 안 되는 걸 잊고 있었구나...!‘ 후회하던 2월 말. 웹 콘텐츠가 중단됐고 현재의 상황이 되었다.
돌고 돌고 돌아 제자리
이럴 줄 알았으면 에너지 소모나 하지 말걸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인데 두 프로그램 때문에 상암과 가산디지털단지, 강남을 옮겨 다니느라 차비만 더 쓰고 커피 값만 더 지출했다. 한 달간 일한 기획료라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준다고 했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답이 없는 걸 보니 부드럽고 나이스 하게 없던 일로 지나간 모양이다. 당사자인 나에게 이해를 구하는 말 한마디 없이.
가장 환장하는 포인트는 내 자신이 무덤덤해졌다는 것이다. 부당한 일에는 화가 나지만 그러다가도 곧 “뭐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하고 넘기고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부당한 상황에서 그럴 수 있지라니. 적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은 그렇다 치고 내 노동의 대가, 내 노력은 어떻게 되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게 당연한 건데...
학습이란 걸해서 사회화가 됐다고 넘기기에는 이건 아니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런데 어디 가서 하소연하고 따질 데가 없다.
솔직히 말해 용기도 없다. 따지면 어쩔 거야.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는데 적을 만들어서 좋을 게 있나? 이런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박명수가 빙의된 것처럼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듯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사랑하는데...
직업 특성상 트렌드에 민감하고 빠르게 뒤바뀌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즐거움이 오래 가야 이런 예상 못한 주옥같은 상황이 닥쳐서 더 행복하게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내 일을 사랑하려면, 그보다 더 내 삶을 사랑하려면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좀 더 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