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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초딩에게 라디오를 들려주니 방송작가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너무 생각 없이 정해버렸다

by 심미금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에 문차일드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때는 2000년. 세상이 멸망한다는 무시무시한 예언이 비껴가고 맞이한 새로운 세기의 첫 해였다.


2000년대의 첫 시작은 과거부터 이어진 전통도, 새롭게 태어난 문화도 많았다.

밀레니엄과 함께 시작된 테크노가 범람하고 있었고 90년대 말 탄생한 1세대 아이돌 왕조는 더욱 굳건해져 각각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며 거대한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H.O.T. 멤버의 생일 때면 박하사탕을 주던 중학교 언니들은 그룹의 해체를 앞둔(하지만 그때는 몰랐던) 2000년 초반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수학공식, 현재진행형은 까먹어도 선배들의 1대1 과외는 절대 잊어버리는 일이 없는데, 동네 만화방 언니가 H.O.T. 를 쓸 땐 반드시 점을 찍어야 한다며 사탕을 줬기 때문에 20여년 지난 지금도 표기를 지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 언니는 1년 뒤 내가 진학할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가장 고학년이 됐지만 아직 미성숙한 교실에서는 서양 섬나라에서 건너온 초록 눈에 번개모양 흉터를 가진 꼬마 마법사 이야기와 만 13살에 데뷔한 소녀 가수 보아 이야기, 어제 했던 호기심천국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지금과 달리 인터넷은 부모님의 통제 아래 사용할 수 있었고 TV 외에 매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성있는 이야기를 와글와글 떠들던 때였다.


문차일드를 좋아한다고 말한 친구는 학교에서 소위 잘 나가는 아이였다. 나와 생일이 같고 자음 순서 때문에 출석부 앞뒤 번이었던 키 큰 여자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았고 같은 반을 세 번이나 했지만 교실에서 그녀와 나의 삶은 매우 달랐다. 어느 교실에 있을법한 흔한 아이였던 나와 달리 큰 키에 활달한 성격, 잘 나가는 언니들의 사랑을 받던 그녀는 어디서나 눈에 띄는 아이였다.


워낙 부류가 다르다 보니 그 애와 내가 대화할 일은 많지 않았는데, 어쩌다 그런 이야기 나온 지 모르겠지만 쉬는 시간 여러 명이 함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문차일드를 좋아해”



H.O.T. 도 젝스키스도 god도 신화도 조성모도 아닌 문차일드 라니?! 그게 뭔데...?

삼사 방송국에서 하던 음악 방송을 챙겨보고 매달 친구들과 잡지책을 사서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부분을 나눠 가졌지만, 문차일드라는 이름은 그때 처음 들었다. 다른 친구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지라 그 아이는 자신의 오빠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며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올해 데뷔한 락 밴드인데 노래가 너무 좋아. 내가 듣는 라디오에 나와서 알게 됐는데...”


낯선 그룹명, 락 밴드, 라디오를 듣는다.

이런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라디오를 듣는다니. 이 무슨 로맨틱하고 성숙한 소리인가. 눈으로 보는 매체에 홀려 쫓아다니기 바빴던 초딩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던 역사적인 순간이다. 그리고 무심코 내 세계에 던져진 이 충격은 돌고 돌아 20년 뒤의 내가 방송작가가 되는 뿌리가 되었다.


그전까지 나에게 라디오는 집에 있는 인테리어 장식품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오후 4시쯤 퇴근한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며 종종 틀어두는 일상의 소음 정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와 닿지 않았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데 어른들은 왜 이런 걸 틀어둘까. 괜히 마음이 갑갑하고 TV나 보며 와하하 웃고 싶은 딱 그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13살.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로만 들어야 하는 콘텐츠의 매력을 느끼기는 힘든 나이였다. 그리고 개인적인 과거사가 라디오에 투영되어 인식이 좋지 못한 탓도 있었다.






모든 사건의 시작은 태어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경기도 신도시에 위치한 아파트촌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전국 각지에 모여든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서울에 오래된 빌라촌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 9년간 5층 언저리의 낮은 건물만 보던 나에게 거대한 아파트 숲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생김새도 높이도 제각각이었던 주택들과 달리 아파트는 성냥갑처럼 생김새가 똑같았고, 구불구불한 골목 곳곳 놀 친구가 넘쳐나던 고향과 달리 네모반듯한 이 동네에서는 내가 스스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함께 놀던 언니 오빠 친구들은 사라지고 이미 자기들의 세계가 형성된 친구들 사이로 내가 접속을 시도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 집은 가장 마지막에 입주된 단지라 이미 한 학년 이상을 같이 보낸 친구들 사이에 끼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상황판단이 덜 된 어린 나는 골목에서 나대던 순진함을 맘껏 뽐냈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장렬한 적응 실패로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로 집안 사정이 안 좋아지며 학원에서 친구 만들기 조차 불가능해졌고 어린 나는 빠르게 왕따로 전락해버렸다.


그래도 3학년 때는 상황판단 안 되는 순진함을 무기로 버티며 친구들 사이에 뻔뻔하게 잘 끼어들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진들에게 제대로 찍히며 고독의 역사가 열렸더랬다.


학교에서는 일진들이 괴롭히지, 학원도 못 가지, 놀이터에는 모르는 애들 천지.


고작 한 살 차이인 주제에 동생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판단했고 결국 스스로를 집에 가둔 채 감금 생활을 자처하게 됐다. 특히 방학 기간에는 부모님이 어디를 데려가거나 성당에 가는 게 아니면 집 밖에 잘 안 나갔다. 하필 이때 또 인생에 마지막 찬스로 키가 다 커버려서...! 이때 좀 더 뛰어놀았으면 더 컸을 수도 있는데... 여러 모로 타이밍이 안 좋았다.




어쨌든 고독을 일찍 알아버린 11살에게

라디오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평일 오후 숨 막히는 적막에 몸부림치다 일에 지친 엄마가 집에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준비할 때면 라디오를 트셨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웃음소리와 음악, 세상 사는 이야기는 삶에 무게에 지친 엄마에겐 위로와 즐거움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석양과 더불어 숨 막히는 압박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창문 밖으로는 학원에 가거나 친구들과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와 함께 섞여 나는 라디오의 웃음소리는 평일 오후의 적막함, 친구가 없다는 고독감, 이 상황을 바꿀 엄두가 안 나는 무기력감, 그럼에도 개학 후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이 뒤섞인 상징이 된 것이다.


라디오는 자기 일을 한 것뿐인데 그냥 내가 내 마음을 투영해 미워했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사고해볼 정도의 능력도 되지 않았던 어린 나는 이 불행한 상황을 탓하고 미워할 존재가 필요했다. 밖에 있는 아이들은 내가 어울리고 싶은 존재들이니 무생물인 라디오가 당첨됐을 뿐이다.


시간은 흘러 새 학년이 됐고, 1900년대의 마지막 해에는 다행히 일진들과 멀어질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담임 선생님의 마지막 배려였던 것 같다. 왜냐면 새 학년, 새 반에는 나를 아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고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은 신기할 정도로 뒷 반으로 몰렸다. 그리고 나는 새 교실에서 다행히 마음 맞는 새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다 보니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진들의 시비는 무시할 수 있게 됐고, 때론 같은 반 남학생들이 방패가 되어주기도 했다. 집안 사정도 조금 나아져서 동네 보습학원은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엄마를 졸라 친구들과 동네 아파트단지에 있는 학원에 다니며 그렇게 라디오는 내 삶에서 조금씩 잊혔다.


나는 하교 후엔 놀이터로, 친구네 집으로, 학원으로 달려가기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줄었고 TV에 나온 호영 오빠의 눈웃음에 홀딱 반해 집에 있을 땐 오빠가 나온 방송을 챙겨보느라 라디오가 소리를 내는 시간은 점점 줄었다.


내 삶의 변화로 쓸데없는 적대감은 줄었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데면데면한 존재가 되어버렸던 라디오. 그렇게 내 인생에서 지나가나 싶던 라디오가 다시 부활한 거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의 대화에서.




13살 내 세상이었던 것들. 용돈 모아 산 라디오, 친구랑 나눠서 산 해리포터 책, god. 라디오 안에 수상한 공테이프를 발견했지만 뭐가 녹음됐을지 무서워서 듣지 않기로 했다..

왜 그랬을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화는 내 마음 속에 박혔고, 그날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처음으로 스스로 라디오를 켜봤다.


처음에는 아무 프로그램이나 틀어보았고, 그후에는 좋아하는 아이돌이 라디오에 나오는 스케줄을 확인해 공테이프에 녹음하는 겸 듣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한 프로그램에 정착해 매일 같은 시간 라디오를 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일과 학업에 치여 가족의 대화가 줄어들자 그 적막감을 채우기 위해 일부러 라디오를 틀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라디오는 항상 말을 하고 있으니까.



시험기간에 공부할 때도, 친구와 싸웠을 때도, 화해했을 때도, 무작위 뺑뺑이로 한 학년에 5명만 배정되는 산골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을 때도, 수능을 앞뒀을 때도 라디오는 변함없이 곁에 있었다. 파도 파도 소통에 목마르고 외로움이 디폴트 값이 된 10대의 나에게 라디오는 내가 지랄을 하든 울든 웃든 늘 변하지 않는 친구였고,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사교성 없고 예민하고 지랄 맞은 나에게 딱 맞는 우직한 친구

그리고 그 친구는 자연스레 내 미래가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자연스럽게

나의 장래희망은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이게 무슨 논리의 점프인가 싶지만 정말 그랬다. 중학생 때부터 누가 내 꿈을 물으면 '라디오 작가'라고 답했다.

깊게 고민해본 적도 없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어느 날부터 내 꿈이 된 그 단어는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열심히 자라났다. 물론 그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노래보다 팟캐스트를 더 많이 듣는 30대가 된 지금은 그 근 저리에 인접한 방송작가가 되어 살고 있다.



“얘는 어릴 때부터 꿈이 확고했잖아”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를 구제해줬지만 구제해준지 모르는 친구들은 내가 어릴 때부터 확고한 꿈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꿈을 흔들리지 않고 이뤘다고 말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심도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거다. 그냥 외로워서 라디오를 들었고, 듣다 보니 재밌어서 일단 장래희망에 라디오 작가라고 쓴 거고, 어쩌다 보니 방송작가가 되었고.


참 심플한 사고 구성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해버렸다.


그리고 나에 대해 글을 쓰기로 한 시점. 무슨 이야기를 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그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어릴 때부터 꿈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이 직업에 대해 사실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이 없다는 것을. 도대체 왜 이 직업이 꿈이 됐지? 생각하며 더듬어 올라가다 보니 그 날의 대화. 그 날의 교실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냥 흘러갈 수 있는 평범한 대화인데, 왜 유독 그 친구와의 대화는 강렬하게 남았을까? 왜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키를 그 친구와의 대화로 삼았을까?


아마 그 친구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러움과 동경, 사무치게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나를 정복하겠단 복합 작용이 평범한 대화를 특별하게 만든 게 아닐까. 나처럼 인간관계의 실패도, 고독감도 느껴본 적 없을 것 같은 친구가 내가 외로울 때 옆에서 떠들고 있던 ‘라디오’를 듣고 낯선 그룹의 ‘음악’을 듣는다는 말은 꽤나 있어 보였으니 말이다.


외로움과 그럴듯함이 만나면 어디로 튈지 모르게 부풀어 오른다.

팝콘 같은 건데, 인생의 어느 방향으로 튀어 오를지 모른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 같다.

그나마 적성에 맞고 힘들다 욕하면서도 할 수 있는 직업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생각이 적으면 인생에서 실수를 한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많으면 인생을 망친다」


얼마 전 대탈출 3 첫방에서 강호동이 하는 이야기를 보고 무릎을 쳤다. 간단하게 선택했는데 인생을 좌우하는 선택이 되는 경우도 있고, 신중하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별거 아닌 선택이 될 때도 있다. 인생을 좌우하는 선택은 물론 깊고 신중하게 해야 하지만,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결과는 알 수 없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과감하게 실행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완벽한 준비란 세상에 없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꿈을 좇았다고 생각해도 현장이라는 출발선 안에 들어서는 순간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나 역시 13살 때부터 방송작가가 꿈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지만 줄임말 조차몰라서 어버버 거리며 민폐 덩어리가 되었던 흑역사가 있다. 그나마 내가 어린시절 꿈을 꿈으로 끝내지 않고 서동요처럼 이뤄낸 건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행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무심코 던진 평범한 말 한마디가 정말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 친구는 영원히 모르겠지만은, 그래도 덕분에 고민 많은 성격답지 않게 직업만은 직진으로 선택할 수 있었고 밥벌이는 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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