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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작가가 된 지 5일 만에 생방송하게 된 썰

돌다리는 건너기 전에 오조오억 번 두들겨도 부족함이 없다

by 심미금



“너는 왜 나영석, 김태호 피디 프로그램 안 해?”

“너도 유재석이랑 방송하면 좋겠다. 넌 왜 유명한 프로 안 해?”



한때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주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근황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데, 다들 방송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가 어떤 프로그램을 했는지는 물어볼 때마다 대답해줘도 기억 못 하지만 이런 내용은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한다.


어릴 때는 ‘지금 나를 먹이는 건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니 ‘너무 고생하는데 똑같이 힘들 거면 결과가 더 좋으면 좋겠다’ 정도의 위로로 받아들이고 넘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고민하는 것들은 대략 이렇다.



‘음... 안 하는 게 아니고 못하는 거라고 하면 실망하려나?’

‘유명함의 기준은 뭐지? 전에 했던 프로도 매번 실검에 올랐는데 그건 좀 약한가?’



설명하자면 복잡하고, 그렇다고 구체적인 시스템이 정립된 것도 아니라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피곤할 것이 분명할 이야기는 해봤자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성공하면 너를 잊지 않을게. 미리 사인해줄까? 정도의 농담으로 넘긴다.




일단 명확하게 정리부터 하자면

김태호, 나영석이 하는 프로그램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원래 인기가 많을수록 경쟁률도 높고 문턱도 높지 않은가. 모두가 유명하고, 복지 좋고, 돈 많이 버는 대기업을 원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소수이듯이 말이다.


지금도 TV를 틀면 수많은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온다. 이중 대중에게 각인된 프로는 몇 개나 될까?


일반적으로 한 예능 프로그램 작가 수는 평균 8-10명. 두 팀이 운영된다고 해도 많아 봐야 15명 내외가 전부다. 심지어 연차가 높아질수록 여러 프로그램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중복되는 인원을 빼면 자리는 정말 몇 개 되지 않는다.


게다가 오래전부터 방송국은 재정난을 이유로 제작비를 줄여왔다. 제작비를 줄이면 가장 먼저 타격받는 것은 ‘작가 월급’ 줄어든 제작비로 일해야 하니 10명이서 하던 일을 7명으로 줄여 그 소수의 인원으로 좋은 퀄리티가 나올 때까지 쥐어짜는 게 만연한 풍토가 되었다.


심지어 ‘메이저 작가 팀’이 한 번 결성되면 큰 이변이 있지 않은 한 이탈자가 발생하지 않는다. 유명 피디일수록 호흡을 맞춰본 사람들과 계속 일하길 원하기 때문에, 메이저는 메이저 프로그램만 옮겨 다니며 일하고 새로운 인원 충원도 그 소수의 메이저 안에서 이뤄진다.


메이저 진입에 성공한 소수에게만 기회가 계속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메이저에 진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메이저팀의 막내작가로 방송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말이 쉽지 삼성 임원진이 되려면 어릴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명문대에 진학하고 삼성의 신입사원이 되어라와 같은 이야기다. 결론은 어렵다.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 다른 사람은 어떡해?

기회조차 없는 거야?


어쩔 수 없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다. 프리랜서는 자신의 필모그래피가 전부다. 방송작가는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했던 프로그램만 이력서에 적기 때문에 일단 그 리스트로 1차선별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력이 전부는 아니고, 메이저에 일해야만 능력 있고 다른 작가는 그렇지 않단 뜻도 아니다. 실력 있는 작가는 충분히 많다. 하지만 이력서로 면접자를 골라내야 한다면, 자연스럽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쪽에 시선이 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5년 차에 예능으로 전향한 케이스다. 그전까지는 교양 프로그램, 생방송 위주로 일했다. 교양 프로그램의 제작 시스템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다른 형태의 방송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뜻이 된다.

반면 같은 기간, 누군가는 실내와 야외를 넘나들며 유명 예능 프로그램으로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그 작가는 예능의 제작 시스템, 실내·야외 프로그램의 차이를 몸으로 습득해 잘 알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놓고 봤을 때, 경쟁력에서 밀린다.



처음에는 이런 부분이 불만이었다. 이력서를 넣어도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 처음 일을 시작할 땐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 업계에 들어오고 싶어 일을 시작했는데, 그 첫 선택이 10년 뒤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마냥 억울하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발전이 없는 것을. 원래 우물은 목마른 자가 파는 거고, 맞는지 알았던 길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다시 돌려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면 된다. 기간이 좀 늘어나고 험난해도 어쩌겠는가.



그렇지만 첫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방송작가를 꿈꾸는 누군가가 있다면, 막연한 동경만 갖고 준비 없이 덤벼들었다가 어떤 호된 경험을 할 수 있는지 미리 알아두면 현실로 닥쳐도 덜 당황스럽지 않을까?


꼰대 같은 소리일 수 있지만, 나름 길을 개척하며 하고 싶은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나도

때론 ‘첫 시작을 좀 더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프로그램이 별로였단 소리가 아니다. 모두 훌륭한 프로그램이었고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고,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다만 신중하지 않았고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내 과거를 탓하는 거다.


‘자신감’과 ‘필요한 사람’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첫 방송은, 참으로 기묘했고, 가끔은 내 발목을 잡는다.






고3 시절, 나는 문학뽕에 차있었다.

수능을 장렬하게 망친 후 성적에 맞춰 수도권 4년제 대학에 지원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현실적인 충고를 무시하고 ‘저는 글을 쓸 거예요!’를 외치며 전문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문예창작과는 개인플레이 성향이 강했고, 손으로 가득 쥐면 스르르 흩어지는 모래알과 같았다. 수업 일정과 과제는 넘치게 많았지만, 예술대 특유의 집합이나 군기는 다행히 없었다. 선배와 동기들 모두 옹기종기 모여 수업을 듣고 교수님이 자리를 뜸과 동시에 다들 모래처럼 스무스하게 흩어졌다.


결계처럼 12년간 나를 옭아매던 국영수를 벗어던지고 시, 소설, 비평, 극본을 쓰는 일은 정말 즐거웠다. 밤새서 글을 써도 힘들지 않았고, 나름 과에서 탑 3 안에 들며 광명의 날들을 보냈다.


애초에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글공부를 하고 방송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진행했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문학을 더 공부해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져버렸다. 그래서 졸업 후 편입 준비를 빙자한 잉여 생활을 즐기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두 번째 편입을 준비 중이던 23살 겨울. 졸업과 동시에 방송작가가 된 대학 동기를 만났다.

소설 수업 때 항상 맨 앞자리에 함께 앉아 수업을 듣던 친구였다. 문예창작과 답지 않은 적극성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던 친구는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대외활동을 열심히 했고, 꽤 유명한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일하던 선배의 눈에 띄어 졸업과 동시에 방송국에 입성했다.


내가 방황이라 쓰고 놀고먹던 사이 친구는 이미 앞서가고 있었다. 실제 현업에 뛰어들어 들어 몇 개의 프로그램에서 일했고, 이 일이 자신과 맞는지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자신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프로그램을 찾아 새로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방송작가가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졸업 후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내 고민은 제자리였다. 20살 때와 똑같은 소리나 하는 내가 한심할 법도 하지만 친구는 그런 내색 없이 자신이 겪은 방송업계의 힘듦, 처음 일할 때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열심히 조언해주었다. 중요한 건 나는 여전히 친구의 멋진 모습만 바라보고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는 것이다.


“네가 일하겠다고 하면 말리지 않겠지만... 너무 힘들어. 그래서 추천은 못하겠어.”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사이에도 쏟아지는 일 연락에 정신없었던 친구는 이런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머릿속을 맴돈 생각은 단 하나였다.


‘촬영장에 나간다니 진짜 대단하다. 멋있어’


그때의 나는 단순했고, 현실감각이 없었으며, 내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알아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방송작가가 되겠다면서 편입해서 문학공부를 더 하겠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그러면서 막연히 황금빛 미래가 펼쳐질 거라 자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그 해 편입에 실패했다.

예비번호 3번. 그해 예비자는 단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만약 이때 덜컥 붙기라도 했으면 방황하는 기간이 2년 더 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20대 중반에 나는 또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며 방황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 내 나이가 너무 늦은 게 아닐까’라는 고민까지 더해서 말이다.


편입 실패도 그렇지만, 그날 친구와의 만남이 약간의 기폭제가 된 모양이다. 내면의 남아있던 미세한 양심이 마지막 힘을 내서 나를 붙잡았고, 나는 내 미래 계획을 세우겠다는 명목으로 내일로 여행을 떠났다.

혼자 남도를 돌며 나름의 자아성찰(이라 쓰고 먹으러 다니기)을 시전하고 돌아가던 길, 친구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구성작가 홈페이지에 보면 구인구직 글이 올라오는데 볼 수 있어.
보통 아카데미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실전에 돌입하는 것도 방법같아.”



지금 생각해도 친구의 이야기는 통찰력 있고 현명하다. 또 방황하며 헛짓거리를 할 바에는 직구가 낫다는 조언. 물론 여기에는 ‘충분히 생각하고’ ‘제대로 알아본 다음에’ 도전하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지만, 앞뒤를 쿨하게 잘라먹은 나는 구성작가 협회에 들어갔다.


지금은 구성작가협회에 올라오는 글이 많이 줄었지만, 그때는 꽤나 활성화되어있던 시절이었다. 경력자를 찾는 글이 대부분이었고, 페이지를 넘기던 중 매일 저녁 부모님과 보던 생방송 정보 프로그램에서 막내작가를 구하는 글을 발견했다.



막내작가 구인

경력 : 3개월 이상

출근여부 : 바로

열정이 있다면 무경력자도 환영합니다



경력자를 구한다는 속뜻도 못 읽을 정도로 무지했던 나는, 과감히 이 프로그램에 지원해보기로 했다.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유명한지, 내 성향과 잘 맞는지, 어릴 때부터 꿈인 ‘라디오 작가’가 되는데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또 미루면 차일피일 미루다 올 한 해도 이렇게 지나갈 거란 불안감에 급 휩싸였고, 좀 전까지 여행 다니며 놀고먹어 놓고선 갑자기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양 초조해진 것이다. 충동적으로 든 계획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집에 돌아가자마자 [이력서]를 검색해서 나온 포맷을 하나 다운로드하여 그 안에 사진과 생년월일, 연락처, 주소, 출신학교와 자기소개를 달랑 적어 보냈다.




이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알려면,

방송작가 구인 시스템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방송작가는 구성작가로도 불린다. 다시 여기서 분류가 나뉘는데, 교양 예능 라디오다.

보통 라디오/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성향이면 교양, 예능을 좋아하면 예능으로 일을 시작한다. 물론 중간에 계열을 옮기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첫 스타트를 끊고 나면 방향을 바꾸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각 분야별로 암묵적으로 일을 배우는 루트가 있는데,



[교양]

시사 계열 : 그것이 알고 싶다, 궁금한 이야기Y 등

스튜디오/정보계열 : 아침마당,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생생정보 등

다큐 계열 : 나는 자연인이다, 인간극장 등


[예능]

야외 ENG계열 : 무한도전, 런닝맨, 놀면 뭐하니, 1박 2일 등

관찰/리얼리티 계열 : 나혼자산다, 동상이몽, 공부가 뭐니 등

스튜디오/토크 계열 : 라디오스타, 냉장고를 부탁해, 수미네 반찬, 연애의 참견 등



보통 첫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비슷한 계열의 다음 프로그램으로 연장된다. 그렇게 한 계열로 쭉 일하며 ‘그 분야의 전문 작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첫 프로그램을 한 후 계열을 옮기는 경우도 많지만, 첫 스타트 후 방향을 바꾸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하는 일이 비슷해 보여도 프로그램 성향과 톤에 따라 아이템도, 방송 제작 시스템도, 섭외 대상도 현저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 첫 프로그램이 매우 중요하고,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는데, 20대 초반에 이런 정보를 얻기는 쉽지 않으므로 아카데미에 등록하는 경우가 많다. 그곳에서 교육을 이수하고 아카데미에서 알선해준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가 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좀 더 드문 경우로는 ‘문예창작과’, ‘방송극작과’ 등이 있는 학교에서 졸업한 선배가 후배를 차출해 가는 방식이다. 내 친구가 일을 시작하게 된 루트인데 이 경우는 인맥, 학연 등이 동원된 경우라 첫 프로그램의 결정권은 크지 않지만 선배를 통해 방송계에 대해 알아가고 감을 잡는 것이 좀 더 수월하다.


가장 드문 경우가 아무런 경력도 없이 이력서를 무작정 보내는 경우다. 사실 구성작가협회의 구인 글은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작가가 일자리를 구할 때 활용하는 방식이고, 무경력자가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뽑히지도 않는다.


적어도 내가 일하면서 만난 작가 중에는 그렇게 무모한 시도를 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 무식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메일을 보낸 당일 수신확인은 됐지만,

당연히 연락은 오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희망을 갖고 메일함을 들락거렸지만 쉽게 불타오른 희망은 쉽게 사그라들었다. 알바를 새로 해서 아카데미에 등록할까 고민하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작가죠? 혹시 내일 면접 올 수 있어요?”


작가... 작가라니?!

내 이름 뒤에 붙는 낯선 수식어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간 민들레 홀씨마냥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내가 갑자기 중력이 생겨 땅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느낌이었다. 안정적이면서도 불안하고, 이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감정.


대학 졸업 후 제자리였던 내 삶이 갑자기 바퀴를 달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날은 가슴이 두근거려 제대로 잠도 못 잤었다.


다음 날 여의도 근처의 한 외주제작사에서 면접을 봤다. 나를 땅으로 붙인 그 전화보다 100배는 더 무거운 현실의 공기가 나를 꽉 누르는 기분이었다. 엄청난 포스와 매서운 눈매를 가진 작가님과의 면접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엉망으로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력도, 준비도 제대로 한 적 없이 덜컥 이력서를 넣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매일 재밌게 봅니다’ 정도였으니...


편도 1시간 30분을 걸려서 간 면접은 10분도 채 안 돼서 끝났고, 나는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여의도역으로 다시 향했다. ‘이 정도면 환승도 가능하겠는데?’ 란 농담도 안 떠오를 만큼 머릿속이 백지장 같았다.


평일 낮 시간, 여의도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냥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내가 그간 얼마나 갇힌 세계에서 안일하게 있었는가를 느끼게 해 줬다. 이게 그간 내가 외면한 실제 세상이구나.



그리고 면접 일주일 뒤,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면접을 잘 봐서가 아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면접을 본 날 면접에 왔던 다른 작가가 뽑혀 바로 출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주일도 안 돼 도망갔고, 당장 다음 방송을 막을 사람이 필요했던 차에 내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순간, 진짜 고양이가 나타났고

과연 이것을 써도 될지. 급하다고 다 삼켜도 될지 진지한 고민이 이어졌던 것 같다.


그렇게 얼떨결에 출근한 날은 금요일. 생방송까지 남은 날은 5일.

방송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취직해버린 나는 가뜩이나 바쁜 선배들의 짐덩이가 되었다.


일을 가르쳐줄 시간도 부족해서 예전에 했던 자료들을 넘겨받았고, 그 자료들을 최대한 스캔하고 눈치를 보며 정말 아무런 기술이 필요 없는 일 위주로 일했다. 촬영 본을 보며 30초 단위로 장면과 영상 속 멘트를 체크하는 프리뷰도 할 줄 몰라서 진작에 공부 좀 해둘걸. 편입 공부할 시간에 아카데미 다녔으면 이런 기본적인 내용은 다 알 텐데 하며 뼈저린 후회를 했다.


시간이 차고 넘쳐 매일 새벽에 자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일어나던 잉여에서, 초단위로 큐시트를 짜고 일주일에 1시간짜리 생방송을 위해 돌아가는 방송작가의 세계로 급 뛰어들었고, 이 엄청난 간극에 적응할 틈도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부모님은 첫째 딸이 드디어 밥값을 한다며 뿌듯해하셨을지 모르지만, 나는 며칠간 이어진 밤샘 작업 동안 도움이 되지 않는 나를 짐 혹은 애초에 없는 존재처럼 여기는 시선을 견뎌야 했고, 눈치를 보고 위축되어 있었다.


처음 가보는 방송국 내부와 스튜디오에 신기해할 틈도 없었다. 스튜디오와 부조를 뛰어다니며 큐시트를 전달하고, 소품실 위치를 몰라 아무나 붙잡고 소품실이 어딘지 물어봐야 했다. 큐사인을 줘야 하는 위치조차 몰라서 눈치를 보다 결국 생방송 직전에 선배에게 큰 소리를 들었다.


어찌어찌 화요일 저녁 6시의 생방송은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되었고, 스튜디오에 빨간 온에어 불빛이 꺼지자 며칠간 참고 있던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일주일 전에 나는 이 시간에 마음 편히 저녁을 먹고 누워 TV를 봤는데, 이제 그 생활은 끝났다는 사실을 확인당한 느낌이었다.


평화로운 시간은 갔다 인생은 실전이다


방송 준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선배들은 이 악의 없고 무식한 막내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다.



“첫 방송 축하해”



꿈은 이뤘지만, 그 꿈은 상상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안일했던 나에 대한 원망, 선배들에 대한 설움, 생방송의 짜릿함과 희열이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울렁임이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첫 시작은 정말 중요하다. 두 번 세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실전은 매우 다른 문제지만, 무언가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무턱대고 시작하기보단 적어도 스스로 생각해보고 경로를 잡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꿈을 방치했고,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시작해 지금도 경로를 잡는데 문제가 많았다. 과거에 내가 했던 프로그램들을 지워버리고 싶은 것은 아니다. 분명 첫 시작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 초반에 고생이 많았지만, 그때 그렇게 무작정 시도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방송작가가 못 되었을 수도 있다.


내가 겪은 프로그램들은 모두 훌륭한 프로그램들이었고, 좋든 싫든 참 많은 것들을 배우고 성장했다.

내 경험상 100% 실패는 없다. 경로를 잘못 탐색했고, 가는 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그래서 직진으로 갈 수 있는 길을 국도도 타고 바퀴에 펑크도 나며 너덜너덜 돌아가지만, 헛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방향이든 나에게 자양분이 되었고 지금도 나침반이 되어주고 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걸 하고자 할 때 그 길을 쭉 걸은 사람보다 좀 더 많이 걸어야 하고 좀 더 많이 부딪쳐야 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뜻이다. 더 적은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피곤함에 대해 알고 시작한다면 조금 덜 피곤하고, 창밖의 풍경도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시작의 중요성은 엄숙하게 알되, 포기하지 않고 계속 굴러가는 용기 또한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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