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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특집은 있어도 추석휴무는 없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누구든 제발 이번 연휴도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세요

by 심미금

프리랜서로 10년간 살다 보니 나 혼자 갖고 있는 로망이 몇 가지 있다.


정규직, 정해진 출퇴근 시간, 그로 인해 생기는 교통체증

정해진 날짜에 들어오는 월급, 연차, 유급휴가

그리고 황금연휴


말 그대로 로망인 이 단어들은 노동법 밖에 있는 프리랜서인 나에겐 단 한 번도 적용된 적 없는 단어다.

가져본 적이 없으니 쓸데없이 환상은 크고 이 당연한 것들을 위해 평소에 직장인들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안다고는 말해도 실제로 온 마음을 다해 공감하기는 어렵다.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니 말이다.


특히 연차와 휴무를 붙인 황금연휴에 대한 나의 마음은 조금 복잡 미묘한데, 용에 대한 생각과 비슷하다. 용이 나오는 온갖 작품을 보고 들어서 매우 익숙하지만, 직접 만져본 적은 없으니 실체를 알 수 없고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떨 땐 좀 무섭다. 실체를 본 적이 없어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이 매우 크다.


황금연휴에 대한 설화를 가장 많이 듣는 것은 직장인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인데 이번 설, 추석 연휴는 주말 포함 며칠이고 연차를 붙여 이때 요리조리 붙여 쉬면 최대 며칠을 쉴 수 있는지 계산하는 걸 보고 있으면 '진정한 직장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미리 1년 치 계획을 세울 수 있다니'같은 생각이 든다.


다만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을 얹진 않는데,

'너는 프리랜서라 원할 때 쉴 수 있지 않냐' '니 일은 명절 하고 관계가 없잖아' 등의 답변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아니 나는 장기계획 못 세우니까... 지금 프로가 언제 끝날 지도 모르고 연휴 때 표 잡아놨다가 일하게 되면 못 가니까' 하고 소심하게 의견을 피력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한다. 내가 직장인들의 고충을 모르듯 친구들도 프리랜서, 특히 방송작가의 고충은 모를 테니 서로 모르는 분야에 대해 백날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어서기도 하다


아무튼 일반 직장인들이 연차와 빨간 날을 이용해 긴 휴식기간을 갖는 황금연휴 시즌이 되면 방송가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특히 그 시기에 하고 있는 프로가 본사에 있으면 기묘한 기분은 더욱 강해지는데, 빨간 날에도 여지없이 출근해 일해야 하는 제작진과 오랜만에 긴 휴가를 가질 예정인 그 외 직장인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때문이다.


방송사 정규직 중 빨간 날 나와서 일하는 건 실제 제작에 참여하는 인원들이고 홍보팀, 기획팀 등 그 외의 팀들은 회사를 비우기 때문에 휴가 기간 동안 일 연락이 오지 않도록 바빠진다. 보도자료에 배포할 기사를 더 빨리 달라고 주문하고 언제부터 언제까진 연락이 안 될 것이니 필요한 부분은 언제까지 제출하라고 이야기한다.


방송제작에도 문제가 생기는 점이 연휴 때는 모두가 자리를 비우니 섭외도, 방송제작 진행도 쉽지 않아서 연휴 한 달 전부터 미리 그때 해야 할 일들을 당겨서 처리해야 한다. 보통 방송일 기준 2주 전에 촬영을 진행하는 편인데 추석이 한 달 남았다고 하면 [추석 전전 주, 추석 전 주, 추석 주, 추석 다음 주] 한 번에 4개 방송 준비가 시작되어야 한다. 공문 하나 보내려고 해도 연휴라 모두 자리를 비웠으니 답이 오기까지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방송 날짜는 밀리지 않고 계속되니 담당 작가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시끌벅적하진 않아도 항상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로 넘쳐나는 게 방송국이라지만 명절, 황금연휴 시즌은 거리부터가 한산한 느낌이 강하다. 제작진이 모여있는 방을 나서 긴 복도를 걸을 때면 새로운 공간으로 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조명이 꺼져있고 깨끗하게 정리된 수많은 빈 책상들을 보며 '이것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명절은 수백 년 전부터 정해져 있으니 미리 준비하고 같이 쉴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미리미리 준비하려 해도 할 수 있는 방송 시스템과 TV가 24시간 켜져 있는데 방송일 하는 사람들이 휴무가 어디 있어하는 윗분들의 마인드가 합쳐지면 실무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차라리 이 시기에 일을 안 하거나 제발 하느님이 돌봐주시어 이 난관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랄 뿐.




4년 차 때쯤 한 생방송 프로그램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가뜩이나 예민하고 섭외가 어려운 시사 아이템을 담당하게 되어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한참 섭외를 진행해야 할 시기에 추석 연휴 기간이 딱 끼인 적이 있다. 연휴 시작 전날 아이템이 정해졌으니 당연히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은 없고, 연휴가 끝난 직후가 방송이라 아이템이 정해진 그 직후부터 스트레스로 위에 구멍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속도 모르고 "추석엔 집에서 쉬자~"고 말하는 팀장님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이 좋아 명절에 쉬자는 거지 그날 쉬는 건 본인 뿐이고 명절 직후 방송을 만들어야 하는 실무자들은 눈에 안 보이게 각자 집에 짱 박혀서 일하라는 뜻 아닌가.


내 아이템은 특정 병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환자들을 인터뷰해야 하는 거였고, 대학병원과 환자를 섭외해야 하는 두 가지 미션이 떨어졌다. 아이템이 정해진 시기가 이미 병원 홍보팀이 퇴근할 즈음이라 전화연결 자체가 미지수였지만 일단 까라면 까가 만연했던 당시 분위기상 나는 아이템이 정해지자마자 전국의 병원 홈페이지를 뒤져 전화해볼 만한 곳을 리스트업 했다. (이미 이걸로 거의 밤을 새웠다) 그리고 아침 8시가 되자마자 온갖 병원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당연히 연결이 되지 않았고 최소한의 당직자가 연결돼도 '담당자가 없으니 다음에 다시 연락 달라'는 말만 돌아왔다.


'네 알겠습니다'하고 끊는 게 당연하지만 선배에게 이 상황을 그대로 전했다가 '니가 코너 담당 작가인데 그렇게 무책임하게 해도 되냐'는 꾸짖음을 들으며 나는 일하지 않는 작가, 책임감 없는 작가가 되어버렸다.


안 되는 걸 왜 시켜 안 해 하고 뒤집을 정도의 용기는 없었던 20대 중반의 나는 다시 핸드폰을 붙잡고 정중한 말로 나를 거절했던 곳에 다시 전화를 걸어 '제발 담당자님 개인 연락처를 알려주실 순 없냐 아니면 내 개인번호를 드리고 연락 달라고 하셔도 좋다 제발 부탁드린다'를 연발하며 사정사정했다.


임창정이 꺼져버린 전화번호를 누르는 건 소주 한 잔에 취한 상황 이기라도 했지 맨 정신에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억지와 부탁을 하던 그 날은 추석 연휴 첫날이었다. 명절 음식을 준비한다며 아침부터 친척들이 집에 와있었고 나는 내 방 문을 잠그고 바깥의 소음과 음식 냄새를 외면하며 계속 전화를 했다.


그런 나를 불쌍히 여겨 교도소에 사식을 넣어주는 것마냥 가족과 친척들은 전이며 과일 등 먹을 것을 방에 밀어 넣어주었다. 하지만 그걸 먹었다간 더 얹힐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예의상 몇 입 입에 물고 전화에만 집중했다. 기적이 일어나서 섭외를 마무리하고 남은 하루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으면 좋겠다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열심히 하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고 순진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와 통화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분들에게 죄송할 다름이다. 연휴만 바라보고 기다렸는데 웬 방송작가가 계속 연락해서 사정을 해대니 얼마나 난감했을까. 도와주고 싶어도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연휴의 첫 시작에 나와 겨우 연결된 당직 직원이 해줄 수 있는 최대의 호의라곤 내 번호를 받아 적어 주거나 담당자에게 문자를 남겨보겠다는 답변이 최선이었다.


결정권자들은 일을 맡겨놓고 다 쉬는데 결정권도 없고 쉴 수도 없는 최하위 계층들의 대화는 평행선을 그리기 마련이었고 개중에는 '방송이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되냐'는 당연하고 날 선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상대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방송국의 갑질로 느끼는 게 당연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 죄송하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은 다음 리스트업 했던 병원 이름을 지우며 엉엉 울었다. 스스로도 납득 안 되는 요구를 해야 하고 내가 생각해도 당연한 반응을 받으면서 또 똑같은 요구를 하기 위해 어딘가로 전화해야 한다는 현실이 매우 암담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온갖 병원과 단체, 인터넷에 검색해서 나온 개인에게까지 연락을 돌리다 하루가 지났고 전국에 전화한 병원 리스트와 그들이 했던 답변들을 정리해서 선배에게 보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이렇게 많은 곳에 연락해 이러한 답변을 받았고 더 이상은 진행이 안 된다는 것을 축약한 그야말로 내가 일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식 페이퍼]였다.


내가 보낸 자료를 식사 중이라며 한참 뒤에 읽은 선배는 '추석이라 섭외가 어렵나 보네 알겠어'란 답변을 보냈다. 방송국에서 하라면 해야 하는 똑같이 선택권이 없는 선배 입장에선 이렇게 노력을 해본 다음에야 우리가 해볼만큼 해봤지만 안 되는 걸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날린 내 시간과 에너지 소모는 누가 보상해주나? 이게 무슨 똥개 훈련인가 싶고 서러운 마음에 나는 팅팅 부은 눈을 붙잡고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밖에선 가족들이 식사하고 TV 보는 소리가 들렸지만 TV 프로그램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니 브라운관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잠시 멍 때리며 아무 생각이나 하다가 '환우회나 협회 쪽으로 검색해보면 환자는 연결지 않을까?'란 쓸데없는 희망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놈의 노예근성이 다시 고개를 들며 잠시 검색해보다가 내가 왜 이렇게 됐나 싶어 핸드폰을 내려놨다. 이것이 하청의 하청의 하청. 친구들이 프리랜서라고 부러워하는 방송작가의 삶인 것인가. 그럼 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해? 뭐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결국 어떤 섭외도 하지 못한 채 연휴의 마지막 날(여전히 달력에는 빨간 그 날!) 회사에 출근했다. 회의에 내 발언권은 없었고 그 대신 선배가 내가 작성한 리스트를 보여주며 '추석이라 섭외가 안 된다. 얘가 이만큼 전국에 돌려서 연락했는데도 안 되는 걸 보면 이 아이템은 어려울 거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팀장은 '그럼 아이템을 바꿔야지 뭐'라며 아주 가볍게 내 고생을 접어 고이 날려버렸다.


연휴 직후에 방송 예정이었는데 방송은 뭐가 나갔냐고 물으신다면, 방송 전날 터진 사건 하나를 잡아서 그날 오후에 찍어와서 밤에 편집하고 새벽에 원고를 써 방송을 내보냈다.


그렇게 방송을 겨우 막고 난 다음 주 월요일, 찌질거리며 전화했던 어떤 작가의 도움을 잊지 않은 감사한 몇 분이 연락을 주었다. 그분들의 감사한 도움으로 추석 다음 주에 그 아이템으로 방송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하면 된다]라던가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가 아니다. 내가 일하면서 가장 싫어하게 된 말이 '거봐 하면 다 되잖아'다. 물론 일단 해보고 보자라는 정신으로 살고 있긴 하지만 그건 내가 내 자신에게 이야기할 때만 적용할 뿐, 타인에게 그 말을 하는 것은 극도로 싫어한다.


이 경험도 그렇고 방송일을 하다 보면 열심히 이리저리 고군분투하는 노력이 가상해서 귀인이 등장한다거나 다른 방향으로라도 해결점이 나타나곤 한다. 불가능을 가능 캐 도와주신 따뜻한 손길은 평생 잊지 말고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하라는 관행은 분명히 바뀔 필요가 있다.

애초에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지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TV가 24시간 나와도 모든 프로그램이 생방송이 아니듯, 미리 길게 플랜을 보고 차근차근 준비하는 인식이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제작진이 쉬어야 일 년에 몇 안 되는 연휴를 즐기는 무고한 직장인 분들을 괴롭히는 사태도 없어질 테고 말이다.


지금도 작가 단톡방이 끊임없이 울리는 걸 보면 누군가는 연휴와 상관없이 방송 준비를 하고 촬영하고 섭외를 하며 밤을 새우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번 연휴에 해야 하는 일이 있지만 그리 급한 일도 아니고 내 시간을 쓰면 될 뿐 다른 누군가를 괴롭히진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괴로운 방송작가가 최대한 없는, 그 괴로운 작가로 인해 연휴에 모르는 번호를 받는 사람이 없기를.

해피 메리 추석

그리고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향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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