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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Oct 21. 2020

2인 대전인 줄 몰랐어요

미리 알려주시지 그럼 내 귀한 시간 안 쏟았을 텐데


요즘 부캐 열풍이라더니, 나는 최근 내 본캐로 돌아왔다.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열심히 일하던 방송작가인 부캐를 내려놓고 집에서 뒹굴거리고 평일 낮의 여유를 즐기는 간헐적 백수의 「백수」 포지션으로.


기왕이면 열심히 살며 사회에 이바지하는 쪽을 본캐라고 하고 싶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평일 오후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쪽에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아주 조금 남은 양심이 외치는 소리를 외면할 만큼 뻔뻔하진 못하다.


아무튼 본캐로 돌아온 지금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뒹굴거리기, 차 끌고 여기저기 쏘다니기, 그리고 친구 만나기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나를 만나주는 고마운 친구들에게 감사하며 여기저기 친구들을 만나러 다닌다. 지난 주말에는 4년 전 함께 일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한 명은 방송작가, 한 명은 요식업계에서 일하려고 준비 중인 친구다. 우리의 만남은 원래 9월 초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된 후 좀 더 사태가 안정되면 보는 것으로 마무리됐고, 1단계로 내려간 지난 주말 드디어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원래 편한 사이는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듯한 느낌이 들고 한 이야기를 또 해도 즐거운 법.

약 6개월 만의 만남은 그간 쌓아둔 이야기와 옛날에 했던 이야기의 반복들이 섞이며 한참을 이어졌다. 결론은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일하기 싫다고 귀결된 채 그날의 만남은 마무리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옛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 번 추억 여행을 떠나면 끝이 없다더니, 이어지고 이어지던 생각 중에 문득 잊고 있던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처럼 딱 백수이던 시절 겪은 황당한 면접 이야기다.






「내 친구 새 프로그램 들어갔는데...」

「새 프로그램? 어떤 프로인데?」

「XXX 방송국 $$$이라던데?」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나는 탱자탱자 노는 배짱이었고, 프로그램에서 탈출한 지 얼마 안 된지라 친구들이 편한 일정과 장소에 얼마든지 맞출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겸비한 상태였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한 친구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다. 얼굴은 본 적 없지만 건너 건너 자주 들어 이름은 꽤 익숙한 한 방송작가의 이야기였다. 백수생활을 청산하고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재취업해 일하고 있단 이야기였다. 작가들의 근황을 이야기하다 보면 의례 나오는 이야기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이 내가 얼마 전에 면접을 봤고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 나 거기 떨어진 덴데"

"아 너도 면접 봤었어?"

"엉ㅋㅋㅋ 나 그날 대박이었잖아"


내 반응에 친구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감지한 듯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는 간만에 겪은 신선한 썰을 풀었다.




어느 일이나 그렇듯 작가 세계에도 몇 가지 룰이 존재한다. 면접을 보는 팀에서는 메인작가 혹은 세컨작가 정도의 결정 권한을 가진 작가 1-2명 정도가 나오고 1대 1, 2대 1 정도의 면접이 진행된다. 가끔 팀 전체가 오거나, 한쪽에서 일하고 있는 사무실로 부르는 일도 있지만 면접을 보는 사람이 1명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면접자들이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2-30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부르고, 면접 보는 사람들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면접자들만 바뀌어가며 면접을 진행한다. 면접을 보러 갔다가 내 바로 앞 뒤 타임의 사람과 마주치는 정도는 있어도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경쟁하듯이 면접을 봐야 했던 적은 없었다. 일반적인 회사 면접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면접자도 여러 명일 경우 미리 공지하지 않나 싶은데 그 팀은 이런 내 상식을 아주 깨끗하게 깨 주었다.


꽤 오래 백수로 놀고 나서 '이제 슬슬 일해야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던 즈음에 그 프로그램 공고를 접했다. 모 방송국에서 내부 제작으로 기획 중인 예능 프로그램이었고, 새로 팀을 세팅하는 중이라 거의 전 연차를 뽑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내 연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간단한 포맷과 첫 방송 일정 외에는 결정된 사안이 없었고 당연히 프로그램 정보는 전무했다. 기획 단계에 투입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따르지만 「내부 제작」 프로그램은 공고도 잘 올라오지 않고 알음알음으로 작가진을 세팅하기 때문에 그 구인 글은 꽤 귀한 존재였다. 이를 입증하듯 그 구인 글에만 조회수가 폭발했고 나 역시 공고에 혹해 간만에 이력서를 보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팀에 들어가는 것이 부담이긴 하지만 내부 제작이면 여러모로 환경에서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방송사 내부 제작이나 외주제작이나 작가가 하는 일에 큰 차이는 없지만, 내부 제작에 관심이 몰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업무환경이 훨씬 쾌적하다. 화장실 수도 많고 관리도 잘 되는 편이고 식사도 구내식당에서 할 수 있다. 여사님들이 계속 관리해주시는 덕분에 부대시설도 꽤 쾌적하게 유지된다. 밤샘 작업을 할 때 잠시 눈 붙일 수 있는 수면실도 갖춰져 있다. 물론 방송사마다 수면실은 가위가 눌린다던가 귀신이 나온다는 루머(?)가 돌곤 하지만 외주제작사에서는 단 한 번도 빤 적 없는 라꾸라꾸 침대가 전부인 것을 감안하면 귀신과 나란히 누워 자는 쪽이 여러모로 더 쾌적하다.


팀마다 다르지만 사무실도 꽤 쾌적한 편인데, 규모가 작은 외주제작사의 경우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있다거나 한 방에 팀을 다 몰아놔서 편집용 책상이 작가 책상을 둘러싸는 학익진을 펼칠 때도 있다. 인구밀도가 높다 보니 잠시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나기만 해도 너무 튀어서 여러 시선이 동시에 꽂히고, 이런 현상이 반복되다 보면 지금 내가 일을 하는 건지, 감시를 당하는지 모를 기분이 느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돈 떼 먹힐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본사는 정확한 월급 책정 체계와 지급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일하고 전산에 내가 등록된 후부터는 착실히 계산돼 일한 만큼의 월급이 정해진 날에 꽂힌다. 다행히(?) 나는 그간 일한 돈을 떼 먹힌 적은 없지만 종종 일하고도 돈을 못 받는 사태들이 발생하곤 한다. 돈이 없다며 두세 달은 기본, 6개월, 1년 이런 식으로 작가가 포기할 때까지 돈을 주지 않고 버티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첫 월급을 받기 전까지 가슴 한편에 불안감을 갖고 있게 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점이 있지만 일단 지금 생각나는 이점은 이 정도다.


'본사 제작이니 경쟁률이 꽤 높겠군'


내가 좋다고 생각하면 남들도 좋다고 느끼기 마련이기 때문에 경쟁률이 치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면접 기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이력서를 넣은 다음 날 바로 연락이 왔고, 이력서를 넣은 지 이틀째 되는 날 면접을 위해 방송사로 향했다.


사실 그때까진 기분이 좋았다. 본사 제작 예능 면접 기회가 온 것도 좋았고 백수 생활을 청산할 기회도 생겼고(정확히는 돈 벌 수 있는 기회) 내가 한 번도 일해보지 않은 방송국이라 어떤 형태로 제작될지, 내부는 어떤지 구경할 생각에 즐거웠다.


문자에서 온 면접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해 연락하니 곧 로비로 조연출이 마중 나왔다. 내가 보낸 이력서를 체크하더니 카드키를 찍고 나를 데리고 지하 면접실로 향했다. 그쯤엔 이제 실전이란 생각에 긴장감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손 끝이 차가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면접장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 다른 의미로 손끝이 차가워짐을 느꼈다.

면접실 밖 복도에는 긴 의자가 있었고, 언뜻 봐도 10명 내외의 작가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복도 코너를 돌아 내가 등장하자 그 눈동자들은 모두 나를 향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십 쌍의 눈이 나를 향하는 것도 놀라웠고, 복도 안을 감도는 묘한 긴장감과 불편함은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그 말을 마치고 조연출은 면접실 안으로 향했고, 나는 작가들 사이에 눈치를 보며 있다가 구석 남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머릿속을 꽉 채운 의문에 혼란스러워했다.



「아니 대기자가 왜 이렇게 많아? 시간 계산을 잘못한 걸까? 무슨 일이 있어서 딜레이 됐나?」



앞서 이야기했지만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내 앞뒤 차례의 작가를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가 면접을 하는 입장이 됐을 때도, 보는 입장이 됐을 때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 세계의 암묵적인 면접 룰에 많이 벗어난 상황이었고, 나 외에 다른 작가들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래 원래 면접이 이런 거니까... 여기 문화는 이런가 보지」



이렇게 일을 쉬고 있는 작가들이 많고 경쟁률이 높구나. 쉽지 않겠다 정도의 생각을 하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불편해도 일을 구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하지만 진짜 놀랄 일은 따로 있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연락받은 시간보다 조금 일찍 온 걸 감안하면 딱 내가 안내받은 면접 시간이 되었을 때다.

면접실 문이 열리더니 이전 타임에 면접을 본 작가가 나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그 모습을 본 나는 감정을 숨기는데 실패하고 말았는데, 당연히 한 명일 거란 내 예상과 달리 두 명이 면접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함께 면접을 본 것이 분명한 두 작가는 자신들을 쳐다보는 수많은 눈빛에 매우 당황한 듯 보였고 빠르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각자 가는 것을 봐선 일행이나 아는 사이 같아 보이진 않았다.


「두 명이 동시에 면접 보는 거였어? 이거 나만 몰랐던 건가?」


내가 본 면접 공고 어디에도 단체 면접이란 말은 없었다. 내가 놓건가 싶어 빠르게 공고를 다시 읽어봤지만, 공고에도 단체면접이란 말은 전혀 나와있지 않았다. 나 혼자만 놓쳤다고 보기에는 대기하는 작가들도 술렁이는 분위기였다. 서로 아는 사이인듯한 작가들은 이야기 중이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무언갈 연실 치고 있었다. 확실한 건 모두 당황했고 이곳에 온 사람들이 모두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합의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내가 지나온 복도를 돌아 새로운 작가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다 작가가 증식되고 증식돼서 복도를 꽉 채우는 거 아냐?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불편한 감정을 넘어 불쾌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면접을 보는 쪽이 갑이라는 건 알겠지만, 사전에 공지한 면접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도 무작정 기다리게 하면서 한 마디 없는 것도 불쾌했고, 같은 시간대에 여러 명을 불러놓은 것도 갑질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다수의 면접자가 한 번에 면접에 참여하는 단체면접이란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일반 회사에서는 이렇게 하는지 몰라도 작가 세계에서의 면접하면 떠올리는 일반적인 모습은 면접자가 1명인 1대 1, 혹은 1대 다수의 면접이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형태와 다른 모습의 면접이라면 사전 공지가 필수 아닌가? 일반 회사들도 그냥 말없이 단체면접을 진행하나? 아니 지금 일반 회사가 무슨 상관이야 이 팀이 문제지.


그리고 그 순간, 면접실 문이 열리더니 조연출이 이력서를 보며 두 명의 이름을 불렀다.



"A 작가님, 대기작 작가님 면접실로 들어오세요."

"잠깐만요. 이거 단체면접이라고 사전 공지됐나요?"



깊게 생각해볼 틈도 없이 나는 손을 들었다. 조연출은 시키는 데로 할 뿐 죄가 없다는 걸 알기에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분명 내 말투가 톡 쏘게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미 그즈음에 나는 이 프로그램은 합격해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계산을 마친 상태였고, 그냥 가면 매우 속 터질 거 같으니 갈 때 가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단 생각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 질문에 복도에 있던 작가들과 조연출의 시선이 나로 향했다.

내 말에 당황하던 조연출은 잠시만 기다려달라 말한 뒤 다시 면접실로 사라졌다. 그리고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더니 곧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부터는 A 작가님부터 한 분씩 순서대로 보실게요."


A 작가 한 명만 면접실에 들어갔고,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 수군거리는 느낌이 계속됐다. 그리고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았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느낌이 매우 매우 들었다. 내가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왜 굳이 그런 말을 해서 분위기를 나쁘게 만드나, 조연출은 무슨 죄야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면접보던지 보지 말고 걍 나올걸.

어디 가서 말도 잘 못하면서 꼭 이럴 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뇌보다 입을 먼저 거치는 말 때문에 고민해놓고 또 반복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대로 자리를 뜰까도 생각했지만, 모양새가 더 좋지 않을 것 같아 내 순서를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면접은 망했고, 이 면접을 보기 위해 대중교통을 타고 온 시간만 1시간 30분.

이제 다시 돌아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왕복 3시간을 길바닥에 쏟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대로 가긴 억울하니 이미 노난거 이 팀 얼굴이나 봐 둬야 지란 생각을 하며 내 차례에 면접실로 들어갔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두 분씩 진행한 건데 불편하셨으면 죄송해요"



면접실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나온 첫마디였다. 어느 인간이 이 면접에 태클을 걸었는지 그들도 궁금했겠지.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간 봤던 일반적인 면접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보통 작가 면접에는 작가들만 참여하는 편이지만 면접실에는 본사 피디 2명, 메인작가, 서브작가 2명까지 대규모 군단이 앉아있었다. 게다가 조연출은 면접 내내 문 바로 옆에 서서 대기하듯 서있었다.

사면초가가 이런 거였나...!



"괜찮습니다. 제가 공고에서 못 본 내용이 있나 해서 물어본 거였어요."



나는 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속으로 침을 삼키며 괜찮은 척 대답했다.

2인 대전인 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죠란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걱정과 달리 면접은 무난하게 진행됐다.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간 했던 업무, 성향 등에 대해 일반 면접에서 하는 평범한 내용들이 오갔고 마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은 주최 측과 참석 측 간의 생각 차이에서 온 가벼운 마찰 정도로 마무리됐다.

이미 눈앞의 상대와 일할 일은 없다는 것을 서로 암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10분 정도의 짧은 면접을 마치고 면접실 문을 열었을 때, 다시 수많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 갖는 일이 많지 않은 지라 머쓱하게 고개를 숙이고 후다닥 도망치듯 방송국을 나섰다. 영 본새가 없지만, 처음 내가 복도에 들어섰을 때보다 어째 기다리는 사람의 수가 더 늘어난 느낌이라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있었다.


다시 편도 1시간 30분을 써서 집으로 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만날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고, 무엇보다 돈도 없고...

원래 면접 직후에는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보는데 이번엔 시작 전부터 텄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어찌 됐든 그 상황은 내가 만든 것이란 걸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려 방송국 근처 유명 빵집으로 향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마음이 허할 때는 탄수화물과 알코올이 최고라는 것을 오랜 임상실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내 하루를 달래줄 아이템을 가득 안고 집으로 향했고 그날 면접은 당연하게 탈락했다.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았을까?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고 어떤 일이든 100% 옳은 선택은 없지만, 오랜만에 글을 쓰며 그때를 돌이켜보니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았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내가 한 행동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제작진의 행동이 악의가 있는 행동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면접을 보는 팀에서는 일정도 촉박하고 팀 세팅을 해야 해서 많은 사람들을 봐야 하니 '이 정도면 괜찮겠지'정도의 안일함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상식 기준에 벗어나는 행동에는 참지 못하고 꼭 한 마디를 얹는 스타일이라 그 상황을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한 것이고. 서로 상생이 안 맞았던 것이다.


확실한 건 다시 시간을 돌려 그때로 간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나는 손을 들었을 것이라는 거다. 말하는 타이밍은 조금 볼 지언정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내 옵션에 「안 한다」가 없는 걸 보면 이게 내 답인가 보다.


어떤 상황이 든 간에 사람 사이에는 기본적인 예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좀 더 위에 있는 입장, 갑에서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신경 써야 한다.

그렇게 해도 님들은 잃을 게 없잖아요.


오랜만에 빵과 와인으로 영혼을 채워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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