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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Apr 08. 2020

편집실에서 사라진 피디를 2년 뒤 새 팀에서 만났다

[도망가봐요 방송국의 숲] 어디 숨든 금방 찾아낼 수 있으니


“피디가 한 명 더 있는데, 일이 있어서 좀 늦는데요. 곧 올 거예요.”


본능적인 직감이 들 때가 있다.

어떤 계기 없이,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감정이 번쩍 고개를 드는 순간.

그리고 이런 직감은 높은 확률로 적중했다. 다만 실체를 마주하기 전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게 단점이지만.     


그 날은 새 프로그램의 첫 정식 회의 날이었다. 모든 제작진이 처음으로 모이는 날. 그때 나는 며칠 전부터 준비한 회의 자료를 다시 읽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하러 들어온 팀장님의 한 마디에 알 수 없는 예감이 든 거다.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흘려 넘긴 이 한 마디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람이 떠올랐다. 유쾌한 기억도 아니고, 존재도 잊고 있던 사람이 번쩍.     


‘에이 설마. 이 바닥이 아무리 좁아도 그건 아니지.’     


뚜렷한 이유가 없는 예감은 계속 내 본능을 툭툭 건드렸지만, 곧 회의가 시작됐음으로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내 안일함을 비웃듯,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회의 시간이 길어지고 슬슬 지루해지던 찰나,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불쑥 사무실에 들어왔다. 팀장이 말한 그 ‘한 명 더’ 있는 피디 같은데 회의 중간에 들어와 놓고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문 옆에 빈자리에 앉았다. 모두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지만 곧 흩어져 버렸고, 나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다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피디’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역시 직감은 무시할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상대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 존재를 인식했지만, 외면한 것이다.     


‘이거 봐라?’     


지루하던 회의가 급 흥미로워지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리고 방송국에 떠도는 불문율이 하나 떠올랐다.          



「방송국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



2년 전 편집실에서 사라진 피디와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평범했던 오늘이 누군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는 경우가 있다.

저마다 생각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내가 말하는 경우는 보편적인 생각과는 거리가 좀 있을 것 같다.



오늘 함께 일한 동료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경험



사직서도 없이 하루아침에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지만, 방송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한 번은 겪는 흔하다면 흔한 일이다.


정말 사고가 났거나, 말 못 할 일이 생겨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만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이렇게 증발한 사람들은 얼마 안가 소식이 들리는데, 그 내용은 다른 팀에서 멀쩡하게 일하고 있다가 대부분이다.


전체를 싸잡아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당수는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이 팀에서 일을 못하겠어서, 말하고 그만두면 복잡하니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걸 방송판에서는 「잠수 탄다」고 하는데 세부적인 카테고리도 다양하다.

사람만 증발하는 경우, 사람과 짐이 함께 사라지는 경우, 방송 자료를 몽땅 지우고 사라지는 경우, 물건에 손을 대는 경우까지. 마지막 경우의 경우 법적인 영역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흔하진 않다. 대부분은 짐과 함께 사라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전략이 많은 편이다.


방송 관련 일을 하는 분들 중에 이런 이야기가 공개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방송 일을 하지 않는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같은 팀, 회사의 직원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경험이 있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사람이 왜 사라져? 성인이?”



이 묘한 경험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오늘 함께 촬영하고, 회의를 하고, 다음 방송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내일 보자’라고 돌아선 것이 알고 보니 마지막 만남이었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경험을. 다음날 회사에 출근했을 때, 증발한 사람으로 인해 어수선한 분위기는 정말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렇게 헤어진 사람들을 지금 떠올려 보니, 당장 생각나는 사람만 6명.

최근 1년 사이 어떤 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소식 들은 거만 3건 정도.     


그래서 내가 경험해본 일들과, 이런 일이 생기는 원인에 대해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나의 첫 증발 경험은 조연출이 사라진 일이다.

막내작가 때 했던 프로그램 중 하나에서 만난 사람으로, 바쁜 일정에도 성실하게 일한다는 평가가 있었고, 서로 비슷한 처지라(작가팀 막내, 연출팀 막내) 나름 대화를 많이 했던 사이였다. 그 대화 중에 견디지 못할 만큼 괴롭히거나, 고민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내가 불만이 많았으면 많았지 조연출은 항상 웃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사건이 있기 전날도 퇴근 전에 먼저 간다고 인사했더니 ‘나는 오늘 일이 있어서 밤새야 할 거 같아’라고 말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 출근해보니, 편집하느라 밤을 새운 피디님들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심적으로(?) 가장 가까웠을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어봤다.


“혹시 어제 뭐 기억나는 일 없니?”


이 질문에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이런 말을 왜 물어보는지 이해조차 못했고, 내 얼빠진 표정에 피디님들은 아니야 하고 자리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조연출은 우리 팀에서 영영 증발해버렸다. 원래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아무도 조연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평소와 똑같이 방송을 준비하는 팀 분위기에 떠밀려 일하면서도 나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평범한 하루였던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사라진 것도 충격

짜증은 좀 냈지만 그 누구도 큰 동요가 없었다는 것이 두 번째 충격

이튿날 바로 새 조연출이 와서 빈자리를 채웠다는 것이 세 번째 충격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라졌는데 다들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그럼 나도 관둬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까?’



정말 힘들고 그만두고 싶었던 날이 많았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는 것은 그 전까진 상상해본 적도 못해봤다. 일을 그만두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제대로 된 마무리는 필수라고 생각했다. 내 경직된(?) 사고를 아주 말끔하게 깨준 사건이었고, 일이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나도 그냥 저렇게 다 놓아버리면 안 되나 한참 갈등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배들은 이미 이상기류를 느끼고 있었고, 이런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어본 지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정도로 넘겼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인 나만 매우 심각했던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같은 팀 작가가 사라진 일이었다.

한 프로그램에서 같이 일하던 선배 작가였는데, 어떤 상황이 와도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이 멋지다고 느끼던 선배였다.


나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 촬영 진행상황에 따라 감정이 휙휙 바뀌는 타입이었고 초년생 때는 특히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나에 비하면 항상 초연한 선배는 신처럼 보였었다.


그 프로그램의 메인작가님은 사실은 사무실의 토템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나는 법이 없던 분이었다. 오전 10시부터 밤 12시까지 자리를 지켰고 화장실도 자주 가지 않았다. 식사도 자리에서 먹는 분이었으니 말 다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고, 당근보다는 채찍으로 팀을 이끌어가는 타입이었다.


그 선배는 내가 멘붕이 오면 달래주고, 방송을 코앞에 두고 촬영이 엎어져도 차분하게 상황을 수습하고 다른 대안을 내놓던 사람이었다. 늘 초연한 모습이라 메인작가님의 주타깃이 되었던 언니는 겉으로 보기엔 전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어쩜 언니는 감정을 잘 조절해요? 저도 더 일하면 언니처럼 될 수 있을까요?”


내 말에 그저 웃기만 하던 선배는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때는 첫 번째 사건의 20배쯤 더 충격이 컸던 것 같다. 당장 일정도 바쁜데 사람 하나 줄었다고 화내는 메인작가님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고, 처음에는 언니가 왜 그랬을까 원망도 들다가 나중에는 내가 도움은 못 될망정 짐이 되었나 하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선배가 증발하듯 사라지고 두 달 뒤 프로그램은 종영했다.

그리고 그 후에 들어간 새 팀에서 선배와 다시 만났다.


그때는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도저히 더 버틸 자신이 없어 도망쳤다고 했다. 오랜만에 선배를 본 반가움과 원망들이 섞였지만, 나도 그 팀의 일원으로 일하면서 정신적으로 시달려 왔기 때문에 그 선택을 마냥 원망할 수는 없었다. 방법이 좀 극단적이었고, 잘못된 것은 맞지만, 이해가 된 달까.




그리고 세 번째가 편집실에서 사라진 피디다.

물론 그 전후로도 사라지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지금까지 이 피디가 단연 최고지 않을까 싶다. 내 지난 방송생활을 통틀어 가장 신선한 충격과 재미를 준 사람 탑 쓰리 안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몇 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있을 때였다. 한참 해외 촬영이 트렌드였던 시기였고, 그 프로그램 역시 해외 촬영이 주가 됐다. 내 첫 아이템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고, 덕분에 인생 계획에 없던 지구 반대편을 가볼 수 있었다. 하지만 촬영 시작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제작비가 적은 탓에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촬영을 가야 했고, 일주일 동안 24시간 얼굴을 맞대고 있으려니 정말 사건사고가 많았다. 그때 나는 연차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애매한 시기였고 슬슬 ‘내 아이템’ ‘내 방송’에 대한 욕심이 커지던 시절이었다.


동행한 피디 역시 본인 프라이드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둘 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지지 않는 성격이었고, 서로에게 불만이 쌓이고 쌓여 촬영 나흘째 되던 날은 폭발해 촬영을 중단하는 일까지 발생했었다. 잘 찍어보겠다는 욕심은 같지만, 서로 생각이 달랐고, 상대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다행히(?) 서로 감정만 누르고 불만만 쌓기보단, 한 번 터뜨리면서 생각의 차이를 알게 됐고, 가장 연장자였던 카메라 감독님이 중재한 덕에 감정의 골이 깊게 남지 않았고 그다음부터는 서로 나름대로 자기 의견을 낼 때 조심하며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일하면서 의견이 안 맞아 싸우고 충돌하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아무 말 않고 꽁하게 있다가 뒤늦게 불만을 말하느니 방향 수정이 가능한 현장에서 내 생각을 말하고 조율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건은 큰 문제가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바로 다음 아이템 준비, 피디는 촬영본 편집을 하며 착실히 방송을 준비했다. 그렇게 싸워가며 서로 더 잘 찍겠다고 난리를 피웠으니 아이템에 대한 자신감도 좀 있었다. ‘지랄 맞긴 해도 방송만 잘 나오면 되지’라고 생각할 즈음. 사건이 터졌다.          




사건은 스튜디오 녹화 직전에 발생했다.


최근 예능 트렌드는 선 VCR 촬영, 후 스튜디오 토크 형식이다. <나 혼자 산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형식인데 이런 포맷의 경우 촬영 후 스튜디오 녹화를 한 번 더 준비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날은 스튜디오 녹화 이틀 전으로 현장에서 플레이할 영상을 점검하고 수정해야 했다. 1차 시사 전(편집된 영상을 팀 전체가 보며 수정사항을 이야기하는 시간) 피디와 편집본을 보고 회의했고, 수정사항에 맞춰 정리해 시사를 받자고 정리하고 편집실을 나섰다.


그리고 15분쯤 흘렀을까? 바로 옆 편집실에 있던 같은 팀 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언니> 너네 피디 짐 싸는데???

나>   무슨 소리야? 나 좀 전에 봤는데?

언니> 아냐 진짜 짐 싸! 나갔어


놀란 나는 사무실을 나와 바로 편집실로 달려갔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편집실에는 편집을 하고 있던 피디들과 작가들이 당황스러운 눈빛을 날리고 있었고, 좀 전까지 회의를 하던 편집실은 텅 비어있었다.     


그간 다양한 사례를 들었지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홍해를 가르고 나갔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목격자들의 따르면 피디와 팀장 간에 말싸움이 생겼고 별안간 안 한다며 짐을 들고나갔다는 것이다. 그전부터 둘 사이에 쌓인 일이 있어 폭발한 것이라고 하지만 내 알바 아니었고, 이 황당한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당연히 전화를 해봐도 피디는 받지 않고, 그렇게 나는 한순간에 피디가 증발되는 사태를 겪은 것이다. 일단 녹화를 해야 하니 여러 사람이 붙어 수습했지만, 이미 내 자존심에는 스크래치가 갈 만큼 갔다.


나름 괜찮게 찍힌 내 아이템에 이렇게 흠집을 내다니. 무엇을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 싸웠는가. 무엇보다 자신이 맡은 방송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함과 그 여파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 건 나와 내 아이템이란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 없었다.     


녹화가 잘 풀리지 않은 경우도 있고, 내 생각과 달리 다른 사람이 볼 땐 그냥 재미없던 경우도 있었지만, 팀원이 증발하면서 촬영의 1/10도 못 보여준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나서 마주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감정이 가라앉기도 하고, 무엇보다 종종 들리는 그 피디의 소식에 전의를 상실했다. 가만히 있어도 그 피디가 프로그램을 옮길 때마다 소식이 업데이트됐고, 그곳에서도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았다는 말이 이어지니 말해봐야 입 아프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흔하디 흔한 자발적 증발자, 나에게 빅엿을 준 1인 정도로 잊어가던 어느 날, 스스로 내 앞에 나타난 거다. 그것도 도망갈 수도,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없는 공간에






처음엔 모른 척할까 싶기도 했지만, 정확히 나를 인지하고도 외면하는 모습에 내면에 잊고 있던 분노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 그때 행동이 정당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잖아? 정당하지 않은 짓을 왜 하지?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처음에는 지켜보기로 했다. 예상대로 그 피디는 내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인사는커녕 마주쳐도 외면했고, 심지어 촬영 날도 최대한 대화를 섞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럴 거면 왜 그랬냐?’    

 

싶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자신 있게 박차고 나갔으면 뻔뻔하게라도 행동하던가.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누가 봐도 자기가 저지른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모습에 어이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든 스스로를 합리화하겠지만, 내 속이 답답하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그때의 분노를 갚아줘야겠단(?) 결론이 들었다. 찌질해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참고는 못 살겠다.  



“피디님 오랜만이네요. 왜 나 모른 척해요?”  



적당한 타이밍을 노렸다. 그리고 팀 전체 회식 날 그 피디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피디 앞 빈자리에 앉았다. 자리로 돌아오던 피디는 자기 자리 앞에 앉은 나를 보고 다른 곳으로 가려했고, 나는 피디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으라고.          


“아 나 작가님 있는지 몰랐죠.”

“지난주에 촬영도 같이 갔는데 몰랐다고요? 2년 만에 보내요?”


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할 짓을 하냐? 이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지만 참았다. 한 달 가까이 일해 놓고 서로 아는 사이인지 몰랐던 팀원들은 이 상황에 놀란 눈치였다. 내가 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지나갈 줄 알았는지 피디는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러더니 주변 시선이 느껴지자 태세를 바꿔 친근한 척 오랜만이네 그간 어떻게 지냈냐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와 조금 전까지 모른 척하더니 이렇게 태세를 바꾼다고?

아 이 사람은 자기가 잘못했단 생각을 안 하는구나.'




그 피디가 말하는 걸 보고 있자니 조금 남아있던 전의도 사라져 버렸다.


이 사람은 애초에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는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알고 있지만, 절대 인정하지 않고 이렇게 넘기려고 하는구나.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고 내 속만 더 터지겠구나. 화내서 뭐하냐, 말해서 알아듣는 사람이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이런 생각이 들자 눈앞에 상대에 더 이상 에너지를 쏟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단 판단이 들었다.          




내가 먼저 아는 척한 것을 화해의 신호로 잘못 받아들였는지, 피디는 그 이후로 필요 이상으로 친한 척을 해왔다. '우리 사이에는 다른 사람하고 다른 교류가 있잖아요' 같은 말이나 해대고 밤샘 작업할 때 잠깐 보자는 등 연락을 해대서 적당히 무시하며 업무적인 대화 위주로만 교류했다.


일은 해야 하니 업무적인 대화는 해야 했지만, 그 이상의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무엇을 위해 그간 화를 냈는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 같다.


내 시큰둥한 반응에 사적인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 피디는 함께한 두 번째 프로그램에서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 이 프로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다른 팀으로 옮겨가 버렸다. 출연자와 국장님까지 모인 마지막 회식 때는 오지도 않는 것을 보며,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또 한 번 느꼈다.




이런 일이 왜 반복되는 걸까.

내 생각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먼저 제대로 된 고용계약 없이 일하는 방송가의 습성. 최근에는 본사 프로그램을 기점으로 고용계약 후 업무를 시작하는 일이 늘었지만, 아직까지 구두계약(이라 쓰고 통보)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말만 오가고 업무가 시작되니, 계약이 주는 무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낮은 문턱을 이용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방송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지지 않는 것 다른 문제라 본다.


이런 시스템이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똑같은 상황에도 책임감을 갖고 일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훨씬 많다. 오죽하면 그만둘까 그 심정을 이해해주는 것과 책임을 지지 않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엄연히 분리되어야 한다.     


누구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있고, 불합리함을 다 견딜 필요는 없지만 사회인으로 일을 시작했다면 제대로 된 마무리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게 정당화되지 않으니 말이다.     


잘못된 곳이라고 판단이 되면 제대로 마무리하고 떠나는 것이 가장 큰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저 피디가 이미 무책임한 사람으로 평가됐듯이, 무책임한 행동을 하면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갖는 평가에 불만을 가질 수도 없을 것이다.



남들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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