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기작 Apr 15. 2020

테이블마운틴을 코앞에 두고 못 올라갔다

[해외 촬영 체험기] 대기업이 밑지는 장사하는 거 본 적 있어요?



3년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다녀왔다.


지금도 내가 지구 반대편에 갔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그때 찍은 사진들이 남아있는 걸 보니 '진짜 가긴 갔구나’ 감회가 새로울 때가 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아프리카에 간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나는 또래에 비해 늦은 편인 20대 후반에 처음으로 해외에 갔다. 그전에는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본 게 고작. 그렇다 보니 남들이 다 가는 유럽, 홍콩, 대만, 일본, 발리 등을 쫓아다니기 바빴다.


여행 쪼렙인 나에게 아프리카는 물리적 거리 이상으로 마음의 거리가 먼 <미지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남아공에 가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일 때문이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많이 줄어들었지만, 한참 해외 촬영 프로그램이 인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TV만 틀면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 독특한 문화가 경쟁적으로 쏟아지던 시기였다.


교양, 예능 할 것 없이 해외 아이템을 다뤘고, 나 역시 한 번쯤은 해외 촬영을 경험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이미 몇 번 해외 아이템을 다뤄본 경험이 있었지만 제작비를 이유로 정작 나는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해외 촬영이 주가 되는 한 프로그램에 들어가게 됐다.


그 프로그램은 해외에 살고 있는 가족이 주인공인 방송이었다. 단순한 관광지 소개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과 현지인이 아는 숨겨진 스팟, 해외의 이국적인 풍경을 담아보자는 취지였다. 나름 거창한 이 프로그램에 나는 후발주자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맡게 된 첫 아이템이 바로 남아공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행운이 따랐던 것 같다.

내가 원하던 해외 촬영이었고, 덤으로 많이 가는 미국 유럽 쪽이 아닌 생소하고 낯선 나라에 갈 수 있다니! 물론 지구 반대편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에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아프리카를 가보겠어.'라는 생각 했었다.



준비 기간은 2주 남짓
편도 비행시간만 26시간 2번의 경유



급하게 황열 주사를 맞았지만, 항체가 생기긴 했는지 의심스러운 시간 안에 다녀와야 하는 일정이었다.

다행히 남아공은 황열병 위험국가가 아니었던지라 필수항목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돈을 착실히 받아 나는 출근 전 대학병원에 들러 황열병 예방접종을 받았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제작진은 최소화. 해외 촬영은 처음인 내가 유일한 작가라는 사실이 부담스럽고 걱정됐지만, '어차피 다 경험할 일이다. 어떻게든 되겠지'란 생각으로 떠났었다.



인천 출발 → 싱가포르 1회 경유 → 요하네스버그 2회 경유(주유) 과정을 거쳐 도착한 케이프타운




해외 촬영을 다녀왔다고 하면, 부럽다는 반응이 뒤따른다.


외국도 다녀오고, 돈도 번다니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인가. 나도 떠나기 전까지는 해외 촬영에 대한 환상을 무럭무럭 키웠었다. 물론 힘들겠지만, 촬영하면서 덤으로 외국의 멋진 풍경도 보고 여권에 도장 하나를 더 찍을 수 있으니 좋지 않을까.


맞는 이야기다.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말할 수 있는 긍정적인(?) 경험 중에 하나가 해외 촬영이니 말이다.



#signal Hill / Lions Head #야경스팟 #일몰 촬영 #근처에 먹을만한 중국집 있음



케이프타운은 자연과 도심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였다.

도심 어디를 둘러봐도 대자연이 보였고, 한 블록을 건너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동물원은 비교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펭귄을 볼 수 있는 해변이 1시간 거리에 있었고

도시 전체가 보이는 산 위에서 해지는 풍경을 바라봤으며 촬영 마지막 날, 일출을 찍기 위해 찾았던 희망봉에서는 깎아지는 절벽에 서서 ‘세상의 끝 별 거 없네’라는 생각도 했었다.


남의 돈으로 비행기 타고, 현장 경험도 쌓고, 나 혼자서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내 기준에선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다시 해외 촬영을 가라고 한다면 선뜻 나서지는 못할 거 같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살짝 미화됐지만 해외 촬영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이다. 같은 포맷의 국내 촬영을 생각하면 내 체감으로 2.5배쯤?


어느 회사든 직원에게 이익만 주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특히 방송국 같은 대기업은 절대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는 걸 나노 단위로 느껴야 한다.




해외 촬영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빡센 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금 오버를 보태면 해외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1분 1초가 돈과 연결된다. 그러니 시간낭비는 사치다.

[시간은 금이다]는 말이 뼛속 깊이 공감 가는 시기다.



일단 촬영 기간에는 잠을 포기해야 한다.


거의 못 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거다. 남아공에서 진행된 일주일 간의 촬영 동안 내 평균 수면시간은 2시간 남짓. 가장 오래 잔 날은 모든 촬영이 끝나고 떠나기 전날 4시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작가들과 이야기해봐도 해외 촬영 때 잠은 포기한다고 이야기한다.


해외 촬영을 앞둔 작가에게는 공항에서 꼭 피로회복제 '포텐**이터'를 사라는 꿀팁을 전수해준다. 잠잘 시간도 없고 해외 촬영은 이동이 많아서 계속 뛰어다닐 일이 많으니 피로회복제에라도 의존해야 살 수 있다.


촬영인원의 규모와 상관없이 제작진이 해외로 떠나기 위해서는 많은 절차와 돈이 필요하다. 비행기표, 촬영 증명서, 비자, 까르네(촬영장비를 복잡한 절차 없이 통관할 수 있게 해주는 증서) 등은 물론이고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의 숙식비, 제작비, 현지 코디 인건비까지 더하면 숨만 쉬어도 돈이 새어나간다고 하는 게 맞을 정도다.

(*해외에 거주하며 사전 준비, 통역, 운전, 방송 진행 등을 돕는 사람을 해외 코디라고 부른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외 촬영 = 뽕을 뽑아야 한다> 인식이 자리 잡는다.



돈도 문제지만, 물리적인 거리상 재촬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서든' '더 멋진 그림을 찍어야 한다' '더 괜찮은 아이템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강해진다.


제작진이 이 정도니, 회사에서 투자한 만큼 기대하는 심리는 더 크다. 이 욕망은 해외 촬영 전 준비하는 일정표에도 반영된다.



촬영 타임테이블. 하루를 쪼개 예상 일정을 빡빡하게 넣는다. 물론 이 타임테이블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제작진의 체류 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찍어야 하는 분량은 많기 때문에 일정을 타이트하게 잡는 편이다. 원래 찍어야 하는 분량이 100이라면 +25 정도는 더해서 일정을 만들어 둔다. 이렇게 빽빽하게 일정을 짜도 막상 현장에 가면 수많은 변수가 생기기 때문에 계획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예를 들어 희망봉에 가기로 했는데, 기상상황이 안 좋아 못 가게 된다면? 제작진이 우왕좌왕하게 되면 스태프, 출영자도 당황하게 되고, 그 순간에도 금 같은 흐른다. 한번 끊어진 흐름은 되돌리기 힘들다.


다른 아이템으로 빠르게 대체해야 한다.

다양한 플랜 B를 생각해두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때, 작가가 현장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촬영지와 출연자에 대한 충분한 자료조사

출연자, 제작진과 끝없이 이어지는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그걸 기억하는 기억력과 권유 스킬


촬영 현장에서 작가 뭘 하느냐고 묻는다면, 계속 뛰어다니며 대화하는 게 일이다.


사전에 상대가 연예인이면 자료조사, 일반인이라면 전화 취재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일상, 관심사, 좋아하는 음식까지도 알아내고 그에 맞춰 촬영 계획을 짜야한다.


그리고 촬영 중 난관에 부딪쳤을 때는, 속으로는 대안을 고민하며 촬영을 지켜본다. 가능하면 제작진 개입을 없애기 위해 두지만, 도움이 필요하다 판단되면 과거 대화했던 내용 중 적당한 아이템을 꺼내 이렇게 진행해보면 어떨지 제안한다.



출연자가 동의하면 진행.

동의하지 않는다면 함께 고민한다.



카메라 앵글에 100% 리얼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찍듯이 제작진이 개입해 모든 장면을 의도한 대로 연기를 지시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최근 ‘리얼’ ‘관찰’이 대세가 되면서 더 조심하는 부분인데 제작진이 개입하는 순간 카메라 앵글 속 흐름은 깨져버린다. 그리고 어떻게 편집하고 만져도 미묘한 어색함과 인위적임은 사라지지 않고 시청자들은 단번에 그 어색함을 캐치해낸다.


내 경험이 100%라 할 수는 없지만, 제작진은 최대한 지켜보고 ‘제안’의 역할로만 존재한다. 게임 속 npc정도랄까.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게 출연자의 내면의 생각을 꺼내 다시 움직이게 하는 기술.

현장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일이라 하겠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꼼꼼한 기록은 필수다.


가끔 예능에서 제작진으로 보이는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하는 것이 찍히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은 현장 상황을 기록하고 하거나 현장에 없는 제작진과 소통하는 일을 하는 중이다.


스튜디오 형태의 프로그램은 한 번 카메라가 세팅되면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작가 중 한 명이 현장 프리뷰를 진행한다. 촬영의 전체적인 흐름, 주요 상황, 토크 등을 기록하는 일이다.


이동이 많은 야외 촬영의 경우는 핸드폰으로 기록한다. 그렇다 보니 계속 촬영 상황을 지켜보며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 보니 개인의 삶과 여유는 없다시피 하다. 물론 사람이니 쉴 때도 있지만, 해외에 체류하는 기간이 곧 촬영 시간이기 때문에 마음을 놓는 게 편하다. 핸드폰은 쥐고 있지만, 제작진 외에 누군가와의 연락은 쉽지 않다.


식사시간에는 쉬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출연자와 대화하며 컨디션을 체크하거나, 제작진 회의에 쓰이는 경우가 많다. 혼자 편하게 식사하고, 휴식을 취한다는 개념은 존재할 수가 없다.


식사시간이 아예 날아가는 경우도 많다. 촬영을 진행하다 보면 동선이나 스케줄이 꼬이는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는 경우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식사시간이다. 출연자의 식사시간은 보장해주더라도 제작진은 그 시간에 회의를 하고 이동하면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많다.


촬영이 끝난 후에는, 제작진이 모여 내일 촬영에 대한 회의를 한다. 꼭 찍어야 하는데 빠진 것, 촬영 진행하면서 새롭게 추가된 아이템 배치, 다음 촬영 일정 체크.


보통 회의가 끝나면 빠르면 자정, 대부분 새벽시간이 된다. 이로써 기나긴 하루가 끝난 거 같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촬영하며 틈틈이 기록해둔 내용을 촬영 일지에 정리한다. 아이템 진행상황과 순서, 특별한 사건들, 멘트들을 기록해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한국에 있는 제작진에게 상황공유. 진행상황과 더불어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1차 공유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미리 편집점을 잡고, 좋은 의견을 제시해 주는 용도인데, 가끔 보고에 집착하는 분들과 일하게 되면 [보고]가 또 하나의 업무가 되어버린다.


두 번째는 인터뷰를 위한 것이다. 예능을 보면 어떤 장면이 나오고 그 뒤에 바로 출연자의 인터뷰가 붙는다. 그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적당한 인터뷰가 찔러 들어가느냐에 따라 완성도와 재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개인적으로 편집 과정에서 가장 스트레스받는 요인인데, 하루 종일 촬영을 지켜보며 인터뷰할 내용들을 (나름) 꼼꼼히 정리해놔도 꼭 놓치는 질문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인터뷰를 놓치면... 진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 이유는 편집가이드용이다. 24시간, 며칠간 촬영된 방대한 분량을 기억에 의존해 편집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방대한 촬영 분량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편집 때 가이드로 쓰려는 목적으로 기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체크해둬야 나중에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장면이 빠졌을 때 증거로 내놓을 수 있다.




그리고 민첩함과 눈치는 필수다.


카메라 앵글 안에 잡히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 하고, 항상 카메라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몇 번의 경험에 의하면, 해외 촬영 때 카메라 감독님들의 열정은 102%쯤 더 상승하는 것 같다. 프로그램 구성과 연출을 신경 쓰는 피디, 작가와 달리 뷰파인더 안에 세상을 보는 감독님들 눈에 이국적인 풍경은 얼마나 욕심나는 존재일까.


어떤 촬영이든 카메라 앵글 안에 실수로라도 들어가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편이지만, 해외 촬영 때는 그 주의집중력이 2배쯤은 더 상승한다. 혹시라도 결정적인 장면에서 카메라 앵글 안에 내가 끼어 망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더 자주 카메라 위치를 확인하게 된다.


직선으로 가면 가까울 거리도 카메라가 있으면 빙 돌아서 최대한 앵글을 피해야 한다. 가끔 사람이 가도 되나 싶은 길로 가기도 하는데,


남아공 촬영 때 해변에 간 적이 있다. 출연자와 카메라가 먼저 해변으로 향하고, 뒤늦게 따라 가느라 카메라 각도를 보며 멀리 떨어져 촬영장에 접근하고 있었다.


'화면에 안 걸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빙 돌아 걷다 보니 어느새 바닷가에 가까워졌고 파도에 하나뿐인 운동화와 양말이 몽땅 젖어버렸다.


하나뿐인 운동화, 그것도 꽤 아끼던 예쁜 운동화가 소금물에 절여지다니...!


신발 안에 바닷물이 찬 기분은 찝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신발을 살 수 있는 곳도 없었고 내 신발 때문에 촬영을 중단할 수도 없는 일이라 찝찝함을 참으며 촬영이 끝나길 기다렸다.


바닷물에 절은 운동화가 반쯤 말랐을 즈음 현지 코디가 구해준 슬리퍼로 갈아 신고 나서야 소금 운동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남은 촬영 기간을 슬리퍼로 버텨야 했다.


#이름모를 해변 #펭귄이 접수 #이렇게 가까이서 뵐줄 몰랐네요 #좋겠다 너는 발이 젖어도 안 찝찝하니까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빠른 판단과 믿음이 중요하다.


나는 뒤로 미뤄두고, 카메라 안 앵글에 어떤 화면이 잡힐지를 최우선으로 선택해야 한다.


남아공 하면 도심과 맞닿은 아름다운 대자연이 포인트다. 촬영을 떠나기 전, 메인작가님과 팀장님이 모두 강조했던 것은 그거였다.


‘헉 소리가 나오는 멋진 대자연을 찍어와라.’


대자연을 찍어야 한다는 미션 강박에 빠져 있을 즈음, 출연자와 함께 테이블마운틴에 갔다.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된 곳으로 케이프타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지만 정작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단 이야기를 듣고 제안한 아이템이었다.


촬영이지만 한 번도 생각 못한 명소에 갈 수 있단 생각에 나도 들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현지 코디에게 부탁했던 촬영 허가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외국인이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촬영 허가를 미리 받아도 현장에서 거부당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미리 받은 허가증과 현지어에 능통한 코디가 나서 이야기를 해봤지만, 상황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미리 허가 다 받았는데 왜 이제 와서 이래?'라고 따질 수도 없다. 이번 촬영에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장소. 무슨 일이 있어도 찍어야 하는 곳이었다. 아예 못 찍는 사태가 생기기 전에 촬영을 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출연자랑 카메라 감독님만 가는 거로 해요.

우리는 밑에서 기다릴게요."



빠른 결단이 필요했고, 출연자와 최소한의 촬영인원만 올라가는 것으로 극적 타결을 했다. 카메라 감독님은 필수로 가야 했기 때문에, 작가와 피디, 코디는 산 입구에 남기로 했다.


그들이 떠나고, 갑자기 생긴 자유시간에 황망하게 앉아있었다. 세계 7대 자연경관을 코앞에 두고 올라갈 수 없다니. 카메라 감독님들은 계속 호흡을 맞춰온 분들이라 잘 찍어주시겠지만, 촬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볼 수 없다는 불안감까지 더해져 막막한 기분만 들었다.


“작가님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서 쉬어요.”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럴 땐 팀원들을 믿어야 한다.


방송은 혼자 만들어 가는 게 아니다. 모든 스태프가 함께 하는 것이고 내 팀원을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내 팀을 안 믿으면 누가 믿겠어


테이블마운틴은 못 올랐지만, 세계 7대 경관 근처에 간 것만 해도 만족이다.



#테이블마운틴 입구 #기념품 가게 옆 아이스크림 #완전 꿀맛 #고지대라 유제품이 더 맛있는 건가?



그래서 테이블마운틴 입구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샀다.

그리고 산이 잘 보이고, 출연자들이 촬영을 끝내고 돌아올 때 나올 입구 근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기다렸다. 갑자기 생긴 여유에 잠시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나 지금 남아공에 있어. 무려 테이블마운틴 앞이라고!
이런 일이 언제 또 있겠어. 다 내 복이지



 1시간여 촬영을 마치고 내려온 출연자들의 표정은 밝았다. 가족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 됐다며 좋아했고, 촬영 역시 잘됐다고 했다. 일말의 섭섭함을 내려놓고, 진짜 테이블처럼 평평하냐 이런 질문을 하며 다음 장소로 옮겼었다.



#케이프타운 #한시간 거리에 펭귄과 물개가 살고 #아이들은 축구를 하는 곳



해외 촬영은 분명 매력적이다.


힘든 기억도 많지만, 내가 모르던 세상을 볼 수 있었고 그간 일하며 터득한 방송과는 다른 현장 경험을 빠른 시간 안에 채울 수 있는 기회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레벨 업되는 느낌?


그리고 방송작가들 중에서도 해외 촬영 기회를 얻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누군가에게 이런 기회가 온다면 한 번은 경험하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다만, 여행과는 다르고 상상만큼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단 걸 알려주고 싶다.


유명 레스토랑의 위치와 메인 메뉴까지 모든 정보를 꿰차고 있지만, 정작 촬영 때는 그 앞에 서서 촬영이 끝나길 기다리는 게 작가의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출연자가 다양한 체험을 하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고 카메라 안에 잘 담기고 있는지, 그 앵글 안을 보며 마치 내가 경험한 듯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보기엔 수박 겉핥기, 진정한 체험은 못하고 근처에서 지켜만 봐야 하는 게 뭐야 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우리는 카메라 앵글 안을 위해 떠났으니까

이게 해외 촬영을 떠나는 작가의 마인드다





이전 07화 2인 대전인 줄 몰랐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