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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Apr 01. 2020

청순하게 우는 TIP

[system] 빡치면 레벨업 하세요



“너 울 때 청순하다”


드라마 대사 아니고요, 영화 대사 아닙니다.     


사람이 청순하게 운다는 개념은 브라운관 속 손예진 외에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지만, 어쨌든 이 문장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실제로 들은 말이다.     



여기서 확실히 할 점이 있다.

이 대화를 할 때 절대 술은 안 마셨단거다.



나와 대화 상대가 만취해서 사리분별이 안 됐다거나, 사랑하는 감정이 너무 쏟아져서 눈코입 형태만 있어도 상대가 원빈, 김태희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협박해서 억지로 들은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말은 정말 사고처럼 툭 튀어나왔다.

심지어 장소는 방송가가 밀집한 상암의 한 족발집.     


첫 방송을 열흘 남짓 앞둔 주말, 밤새서 해야 할 일들을 잔뜩 쌓아두고 ‘일단 먹고 하자’고 들어간 식당에서 이런 촌극이 벌어진 거다.          



멘트가 90년대 청춘 드라마 같을 거면,

눈앞에 멋진 남자라도 있던가.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일요일 늦은 저녁 족발 집은 한산했고, 나는 청순보단 청승에 가깝게 족발을 모셔두고 울었다. 혼나거나, 감정이 격해질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누가 보면 죽은 돼지의 명복을 비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심지어 내 앞에는 나보다 한참 연차 높은 작가 선배들이 앉아있었다. 일반 회사 직급은 잘 모르지만 대리가 부장님 앞에서 운 느낌이라고 하면 좀 와 닿을까...?     


20년 가까이 방송계에 있으면서 별별 일을 다 겪은 선배들은 좀 전까지 멀쩡하게 일 이야기를 하던 후배가 울기 시작하니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 이 난감한 상황을 깨기 위해 정말 아무 말이나 던지다 나온 말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아무 말이란 뜻이다.



원래 울지 말라고 하면 더 우는 법

선배의 멘트는 꽤 효과적이었고,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던 눈물은 저 청순 한 마디에 쏙 들어갔다. 눈물 대신 닭살이 돋았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선배의 기술은 성공한 셈이다.


다시 족발을 먹는 나에게 선배들은 소주 대신 사이다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래 네가 고생이 많지. 잘 알아 우리도 고맙게 생각하고...

근데 진짜 미안한데 할 일은 해야 한다.”


  

이 말에는 그냥 웃음이 터졌다.

그렇지 이래야 방송국이지.     


냉정하고 서운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일단 우리 앞에는 해결해야 하는 공통과제가 있었다. 첫 방송.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감성에 젖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엔 우리에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웬만해서는 TV 방송은 중단되지 않는다. 내가 울든, 족발집에서 청승을 떨든 시간은 흐르고 본방송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맥락 없는 눈물로 선배들을 당황시킨 것도 있으니, 이쯤 해서 내가 빨리 상황을 종료시키는 게 서로에게 좋다.     


그날의 사건은 ‘청순’이라는 다신들을 수 없을(?) 역사적인 멘트만 남기고 지나갔다.    





      

사회생활하면서

내가 연마한 두 가지 기술이 있다. 



첫 번째, 소리 안 내고 울기

두 번째, 최대한 빡침을 돌려말하기



초년생 때는 전자가 발달했고, 후자는 지금도 연마 중이다. 태생이 앵그리 버드라 쉬운 작업은 아니다.


지금은 문제가 생기면 떠들 동료들도 생겼고, 어느 정도 의견 피력이 가능해졌으니 전보다 낫지만, 막내 때는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기 바빠 아무것도 못했다.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선 정말 잠만 자고 나오고.

내 시간은커녕 나 혼자 있을 공간도 없던 시절.

일만 생각해도 마음이 답답할 때였다.     


원래도 소주잔 사이즈 정도밖에 안 되는 좁은 마음을 가진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쏟아지는 일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소주잔에 계속 소주를 따르면 넘치듯이,

타고난 그릇을 넓히는 게 불가능하다고 일찍 깨달은 나는

내가 깨지지 않기 위해 흘려보내는 기술을 연마하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연마한 첫 번째 기술이

바로 선배가 말한 청순하게 우는 스킬이었다.

정말 손예진처럼 눈물만 또르르. 아름답고 청순한 분위기는 아니고, 입을 꽉 다물고 소리를 덜 낸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처음부터 그랬냐?라고 하면 그렇지 않았다.

나는 주로 억울하거나 화나면 우는 편이었고, 화나서 운다는 건 분노 표출을 포함하고 있다. 매우 시끄러운 편에 속한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는 집에서는 ‘애가 왜 이렇게 유난스러워’ 밖에서는 ‘그 집 딸은 또 난리야?’ 정도의 요주 인물이었다고 한다. 유치원 졸업, 초등학교 입학, 이사 등의 큰 사건은 물론이고 사촌동생 생일파티에서 촛불 못 끄게 한다고 우는 흔하고, 엄마를 난감하게 하는 아이였다.


어릴 때, 잠실 롯데백화점 대리석 바닥에 머리 박으며 운 이야기는 하도 말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니까.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건지, 초등학교 고학년에 들면서는 왼쪽 눈 아래에 있는 눈물점이 원인이 아닐까. 이걸 빼면 좀 나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24살

방송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부터였다






모든 첫 사회생활이 그러하겠지만

아르바이트와 직장생활은 너무 달랐다.     


아르바이트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있었다. 방송작가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TV를 끄면 모든 게 끝나듯이, 일도 생방송과 동시에 끝나는 줄 알았다.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은, 매일 같은 시간에 방송은 송출되고, 1시간짜리 방송을 위해 얼마나 긴 준비기간이 필요한지 몰랐다는 것이다.     


프로그램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생방송 정보 프로그램은 각 요일별로 팀이 정해져 있고, 그 팀이 매주 방송을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예를 들어 화요일 생방송 팀이라고 하면 아래와 같다.      




[화요일 생방송 팀 주간 일정]

화요일 : 생방송

수요일 : 휴무 & 아이템 서치

목요일 : 아이템 회의 & 섭외

금요일 : 섭외ing 및 촬영 구성

토요일 : VCR 촬영

일요일 : VCR 촬영 및 촬영본 백업 시작

월요일 : 생방송 준비 (밤샘 DAY)

화요일 : 생방송




막간 퀴즈!

Q. 이 일정에서 없는 것은?

A. 쉬는 날      




아이템 서치를 하면서 휴무가 어떻게 가능한가부터 코미디지만, 정말 당연한 듯이 저렇게 일했다.


물론 미리 아이템을 정하고 섭외랑 촬영도 몇 주치를 준비 해두면 얼마든지 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이 잘 풀릴 때 이야기고 일주일에 5일, 비슷한 포맷의 코너가 넘치다 보니 좋은 아이템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나는 그 팀의 제일 꼬리칸인 막내였음으로 선배들이 하는 모든 코너를 서포트해야 했다. 선배들이 부탁한 아이템 찾기, 섭외 전화하기, 회의록 작성, 촬영 진행상황 정리, 소품 리스트 작성 및 구해오기, 촬영 테이프 라벨링 등


각 코너마다 진행상황이 달랐고 모든 일에 조금씩 붙어 있다 보니 내 삶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막내였던 나의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

퇴근 시간은 알 수 없음



보통 막차를 타고 퇴근했는데, 그 시간이 나 혼자 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마저도 언제 어떤 사람에게 연락이 올지 모르니 항상 긴장상태였는데, 쏟아지는 연락과 매주 쳇바퀴처럼 도는 일정을 따라다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24살은 사라지고 없었다.          




막내 생활을 한 지 1년쯤 됐을까 그날도 겨우 막차를 탔다.


막차 타임에는 의외로 사람이 많은 편이다. 그 시간까지 일에 시달린 사회인들이 다 모여 있는 버스 안은 서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드문드문 자리에 앉아있었다.     


내 지정석은 버스 맨 뒷자리 바로 앞 오른쪽. 자리에 앉아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창밖을 바라봤다. 밤의 서울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봄이 슬슬 다가오고 있어 창문을 조금 열어놓으면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던 날이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이유도 모르고 특별히 서러운 것도 아닌데 그냥.     

참으려고 입술을 꽉 물고 허벅지를 꼬집어 봤지만 눈물은 멈추긴커녕 내 노력을 비웃듯이 계속 나왔고, 콧물까지 나오기 시작해서 난감해졌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후드티를 더 깊게 눌러쓰고 옷을 끌어올려 눈 아래까지 가렸다.

거북이처럼 고개를 움츠리고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 버스 안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긴 나를 아는 사람이 없지?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이잖아?’



끝자리에 앉은 덕분에 사람들의 뒷모습만 보였고 가끔 눈이 마주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버스에 내렸으므로 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뭔가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내가 운다고 김은숙 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빠질 것도 없단 것이다.


우는 걸 보이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상대에게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무관심이 이렇게 위로가 되긴 처음이었다.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다들 자신이 내릴 때가 되면 내렸고

나도 내 안에 쌓인 감정을 흘려보내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버스에서 내리면 됐다.

의도치 않게 큰 깨달음을 얻은 날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에게 작은 일과가 하나 더 추가됐다. 퇴근길 버스에서 울기


큰 실수를 한 날은 소리가 날 때도 있었지만, 연습은 성공의 어머니 아닌가. 매일 꾸준히 훈련하는 것만큼 기술을 올리는데 최고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내 스킬은 나날이 진화했다.


눈물은 휴지나 손등으로 닦기보단 무표정하게 흘려보내고 어느 정도 증발하면 남은 물기만 살짝 해결하면 그럴듯 했다. 특히 눈가는 비비지 않고 집에 들어가서 빠르게 세수하면 얼추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다는 생활의 지혜까지 생겼다.     


혼자만의 공간이 없는 나에게 그때만큼은 버스가 내 공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잘생긴 남자가 와서 위로해주면 좋겠다. 이렇게 로맨스가 생기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일단 생각이 딴 데로 새기 시작하면 평소보다 눈물이 빨리 멈췄다. 내가 어떻게 하든 시간은 똑같이 흘렀고,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고 나쁜 일이 생기기도 하며 너무나 정직하게 흘러갔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 안에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풀 시간이 생겼다는 것.

이 짧은 배출 시간은 사회초년생의 분노를 깎는데 효과적이었고 내일 다시 출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일을 하면 이런 일이 없겠어?

첫 사회생활은 다 이렇게 힘들고 고달픈 거지

해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이런 생각으로 나를 위로했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나게 발전적인 사람이 됐거나 큰 성공을 거둔 건 아니지만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또 알게 된 사실은, 감정을 배출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지고 나니, 의외로 눈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엉망으로 깨진 날

‘야 오늘은 버스 왕복 오열이다’ 이란 생각으로 버스를 타도, 막상 자리에 앉고 나면 ‘됐다. 뭘 우냐 그런 거로’ 하고 넘길 수 있는 날들이 늘어난 것이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쳐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자연스럽게 서로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갔다.


그리고 이 일탈은 그해 여름, 갑작스럽고 불미스러운 팀 내 사건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팀이 와해되고 백수가 되면서 끝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청승맞은 행동이었다.

버스에 앉아서 무섭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그때 버스에서 나와 마주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몇 달간 이어온 일탈의 시간 동안, 누구도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울든 말든 버스에서 알아서 내리게 뒀다. 버스 인테리어 일부분처럼 무심하게 지나쳤다.


다들 본능적으로 그게 최고의 도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를 다니든, 공부를 하든, 일을 쉬고 있든 모든 사회인에게는 고민이 있고 울지 않고 견디기 힘든 괴로운 순간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나를 보며 자신의 사회 초년 시기를 떠올렸던, 혹은 우연히 본 신기한 구경거리 정도로 지나갔든 간에, 섣부른 위로보다는 혼자 두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두는 게 낫다고 본 게 아닐까.


아닐지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아름답게 기억하련다.     


지금의 나라도 누가 버스에서 울고 있다면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릴 것 같다.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다 보면 의외로 마음 편히 울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인 마음은 무언가 쌓이지 않게 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짧은 경험으로 땀이든 눈물이든 배출하는 것과 아닌 것은 천지차이다. 취미생활과는 다른 영역이다.          


그때의 시간들이 더해져 지금은 자주 울지 않지만, 팔자에도 없던 청순 소리를 듣는 영광의 순간을 맞이하게 해 줬으니. 역시 인생에서 그냥 흘러가는 경험은 하나도 없다는 걸 또 한 번 느끼게 한다.



샤머니즘 최고 포춘쿠키와 오늘의 운세가 없었으면 내 방송생활은 더 험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난날을 발판 삼아, 요즘은 앵그리 버드가 되는 길을 닦고 있다.


최종 목표는 [화를 덜 내고 논리 정연하게, 나의 빡침을 전하자]인데 그 길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무래도 어렵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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