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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Dec 22. 2021

이 세계 짱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비 3번 #1

내 우물의 크기는 얼마인가


대학에 다닐 때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서울에 있는 모대학의 문예창작과를 2년 다니고 졸업했는데, 학교를 다니는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정말 글을 잘 쓴다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체능 학과다 보니 시험보다는 과제로 성적을 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시, 소설, 극본 등 모든 수업에서 항상 최상위권 성적을 받았다. 교내 백일장에 작품을 출품하면 상을 받았고, 졸업작품전에도 큰 액자에 내 시가 걸렸었다.


이 시기는 내 인생에 다시 올까 말까 한 황금기라고 해도 될 정도인데,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어딜 가도 눈에 띄지 않는 고만고만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만 있으면 세상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 조연 같은 존재랄까. 공부도, 운동도, 하다못해 사교성마저도 중간 언저리를 맴돌던 내가 대학에서는 동기들을 제치고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되다니. 어느 날 눈 떠보니 이 세계 짱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항상 칭찬에 목말랐지만, 그렇다고 칭찬해주기엔 애매한 학생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쏟아지는 관심에 처음에는 몸 둘 바를 몰랐고, 다음 학기에는 익숙해졌으며, 2학년이 되고는 기고만장해졌다. 학교 정문을 통과하는 그 순간 다리가 바닥에 둥둥 뜨기 시작하고, 예체능 건물 7층 짱은 나지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다. 2년이니 망정이지 4년을 다녔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하다.


학교에서 인정받는 게 뭐 나쁘냐 할 수 있겠지만, 나의 문제는 발전하려 하지 않고 칭찬에만 익숙해진 게 문제였다. 애초에 내가 문예창작과를 들어온 이유는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글 쓰는 법을 배우면 방송작가의 꿈을 이루기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책 보는 것도, 글 쓰는 것도 좋아했지만 순수 문학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안 된다는 것쯤은 매우 잘 알고 있었으므로 순수 문학을 전공으로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면서 점점 칭찬을 듣다 보니 '아니 어쩜 내가 정말 능력이 있는 걸지도?'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까지도 좋다. 정말 몰랐던 재능을 발견할 것일 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생각에서 멈추고 더 이상 발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환경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칭찬받는 무한 긍정의 굴레가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다. 당장 2년 뒤면 끝날 일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다 보니 어느새 졸업 시즌이 다가왔고, 나는 초조해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졸업 후 방송작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 되는데, 편안한 나의 세계를 두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영 탐탁지 않았다.


'바로 취업하지 말고 좀 더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니?'


그즈음 교수님이 몇몇 학생을 불러 따로 면담을 진행했다. 문학 공부에 의지가 있어 보이는 학생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힘을 주기 위해 만든 자리였는데,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교수님 입장에선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있으니 당연히 문학 공부에 대한 열망이 클 거라 여길만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높은 성적을 받는 게 좋을 뿐 문학을 업으로 삼고 싶단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진학하면 이런 환경이 더 이어지려나? 취업은 좀 나중에 해도 되지 않겠어?'


일하지 않을 핑곗거리를 찾던 나에게 교수님과의 면담은 아주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렇게 덜컥 편입을 목표로 잡게 되었고, 22살 나는 처음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이 되었다.


이쯤 되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입시를 선택해놓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3개의 4년제 대학 편입과 2개의 예술대 입학에 도전했는데, 당시 내가 보기엔 준비할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과 특성상 영어시험은 보지 않았고, 창작과 면접으로 이뤄지는데 2년간 글 뽕에 취해있던 나는 '실기는 하던 데로 하면 되지 않나?' 하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공부 대신 아르바이트를 선택했고, 그야말로 놀면서 한 해를 보냈다. 매일 아침 아르바이트를 가고, 일이 끝나면 놀러 나가거나 야구를 보고, 새벽에 자는 생활에 대해 부모님은 어떤 터치도 하지 않으셨다. 평생 일탈이라곤 한 적 없는 딸이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두신 것이다.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낙관으로 들어간 무책임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시고.


죄책 감 없이 쾌락으로 꽉꽉 들어찬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흘렀고, 그해 겨울 나는 첫 입시를 치렀다. 5개 학교 중 4곳의 1차 실기에 합격했고, 2차 면접을 위해 서울을 찾았다. 추운 겨울, 패딩 입고 돌아다니는 수험생과 재학생들, 넓은 캠퍼스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대학 건물을 보며 나는 이미 그 학교 학생이 된 듯 애교심에 가득 차 있었다. 곧 이 교정을 거니는 핑크빛 미래가 그려질 것이며, 그곳에서도 글을 쓰면 칭찬받는 생활이 이어질 거라 여겼다.


그리고 나는 2차 면접을 봤던 네 학교 중 세 곳에 불합격했고, 예술대학 한 곳만 예비번호를 받았다.

예비 3번. 웬만해서는 합격할 수밖에 없는 그 숫자에 나는 또 기고만장해졌다.


'23살에 신입생이라... 문예창작과는 신입생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니까 괜찮겠지.'


그리고 그 해 추가합격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2차 추가 합격자 발표날 확인한 내 번호는 여전히 3번이었다. 내 앞사람이 합격하면 자동으로 빠진 숫자만큼 번호가 앞당겨지는데 내가 3번이라는 것은 아무도 추가 합격하지 못했단 뜻이 된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그때는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나의 실력을 의심할 수 없었으므로 애초에 선발 학생수도 적고, 인기 있는 학교라 경쟁률이 높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저런 예비 1번 안 됐네'


자기도 떨어진 주제에 얼굴도 모르는 1번을 걱정하며 이 사건을 술자리 영웅담으로 떠들어댔고, 자연스럽게 두 번째 입시 시즌을 시작했다. 불합격했지만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그전과 다를 것 없는 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23살 즈음에는 주변 친구들의 생활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미 졸업하고 취업한 친구도 있었고, 유학을 결심한 친구, 대기업 공채를 준비하는 친구 등 대학에 입학할 때만 했도 비슷했던 삶의 궤적들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던 시점 같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오랜만에 대학 동기를 만났다. 나와 함께 교수님 면담에 갔던 친구였는데, 졸업 직후 방송작가로 취업해 2년째 일하는 중이었다.


방송 시스템의 불합리함과 적은 월급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그 일을 계속할지 말지 고민하던 친구는 나에게는 절대 방송작가를 하지 말라고 조언해줬다. 그리고 그 친구와 만나는 내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있었다. 이미 꿈을 이룬 그 친구가 대단해 보였고,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을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봤지만 물음표만 남았다. 심지어 문학 공부를 더 하겠다고 입시 준비를 하면서 2년 동안 제대로 책을 읽은 적도 없었다.


그제야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진학 열차에서 내리는 건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어차피 꿈이 방송작가라면 당장 뛰어드는 게 맞다는 생각과 문학 공부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계속 괴롭혔고,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또 한 번 엉망진창인 결론을 냈다.


'일단 입시 봐서 합격하고! 그다음에 갈지 말지 정하자. 합격해도 안 간다고 하면 그럴듯해 보이잖아'


떨어질 것을 염두한 입시 준비라니 정말 비겁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제야 나는 예전 기출문제들을 풀어보고 유명하다는 작품들을 찾아보며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두 번째 입시 시즌이 밝았다.



입시를 여러 번 겪었다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그나마 장점을 말하자면 나름 이 상황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험을 볼 즈음에 나는 고3 때를 비롯해 두 번의 입시 시즌을 이미 겪은 상태였고, 합격하든 불합격하든 방송작가 취업으로 도망갈 계획까지 세워둔 상태였으므로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시험을 치를 수 었었다.


긴장을 하지 않으니 머리가 팽팽 돌아갔고 1차 실기시험은 내가 시험을 보던 교실에서 가장 먼저 작문을 끝내고 펜을 내려놓는 지경이 되었다. 이번에도 5개의 학교 중 4곳의 실기에 붙었고, 매우 무덤덤하게 면접에 임할 수 있었다. 다년간의 서비스업(아르바이트)으로 단련된 말솜씨로 교수들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실컷 떠들었고, 매우 산뜻한 기분으로 면접 일정을 클리어해나갔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학교는 작년에 내가 예비 3번을 받은 예술학교였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내가 가장 가고 싶은 학교였고 19살 때부터 남몰래 매년 입시를 봤지만 매번 예비번호를 받은 애증의 학교였다. 그래도 가장 가고 싶은 학교였다고 다른 학교 면접 때보단 조금 더 긴장했는데, 적당한 긴장감이 아드레날린을 대폭발 시켜서 면접장에서 교수들을 웃게 만들 정도로 떠들어댔다.


'새 학기 때 보자'

'네 교수님 새 학기 때 뵙겠습니다'


면접을 마치고 면접장을 나가려는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교수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무슨 대화가 오갔길래 웃음소리가 들렸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수험생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교정을 빠져나갔다. 누가 봐도 방금 면접을 매우 잘 봤고, 이제 학교에 다닐지 취업을 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해 입시에서 나는 또 예비 3번을 받았다.


화면에 예비번호라는 글씨가 떴을 때 기분은 진짜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태어나서 처음 가졌던 강한 확신이 알고 보니 착각이었다는 사실. 내가 이 세계 짱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수많은 조연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다시 마주하고 나니 하늘에서 땅 끝으로 처박힌 것 같은 절망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즈음에 대학 동기 몇몇이 예술 대학 입시와 편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중에는 친한 친구도 있었는데, 나도 면접을 봤던 대학에 편입했다고 했다. 물론 나는 탈락에 가까운 예비 번호를 받은 곳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행운에 축하하면서도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2년 전 학교에 다닐 때는 분명 내가 모든 분야에서 학과 탑이었는데, 왜 나는 계속 입시에서 떨어지고 다른 친구들은 합격하는 거지? 내 노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도 안 한건 아닌데?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모든 학교의 입시 최종 결과가 나왔고 나는 두 번째 입시도 불합격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합격하지 못한 예비는 그냥 불합격이다. 그리고 그제야 20살 이후로 둥둥 떠다니던 두 다리가 현실에 붙는 느낌이 들었다. 글 좀 쓸 줄 안다고 착각하던 그때가 사실 운이 좋았던 거고, 나에게 찾아온 운을 잘 활용해서 더 넓힐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현실에 안주하려고 한 결과가 요 모양 요 꼴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빠른 시간에 잘못된 걸 깨달아서 다행이긴 한데 그땐 몇 년간 내가 믿고 있던 세상이 무너진 느낌이라 패닉 그 자체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고 당장 움직여서 뭐라도 해야 한단 생각이 들면서도, 어떤 의지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잠깐이라도 이 현실을 외면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입시 발표 다음날 가방을 챙겨 들고 짧은 국내 여행을 떠났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잠시 숨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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