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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Dec 08. 2021

핸드폰은 떠나기 전 마지막 의리를 지켰다

갑자기 찾아온 이별에서 찾는 작은 운


핸드폰이 갑자기 고장 났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타이밍에 손 쓸 틈 없이 망가져서 지난 며칠을 스마트폰 없는 비문명인 상태로 살아야 했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끼고 사는 평범한 스마트폰 중독자는 갑자기 벌어진 비극에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라 매우 당황스럽고, 속상하고, 불편했다. 심지어 이력서를 넣어둔 상황이라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그런데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기에는 너무 작고 소소한 사건이란 생각도 함께 들었다. 가까운 가족과 친구 몇몇에게 '핸드폰이 고장 났다'라고 짧게 이야기한 걸 제외하면 고장 난 핸드폰을 붙들고 씨름하는 며칠 동안은 나 혼자 모든 고통을 감내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상된 이별이긴 했다. 일단 핸드폰을 쓴 지 2년 반이 훌쩍 넘은 상황이었고,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 핸드폰은 늘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워낙 물건을 험하게 쓰는 편이라 핸드폰을 떨어뜨린 횟수를 어림잡아도 100번은 족히 넘을 것이다.


사용하는데 큰 지장이 있는 게 아니면 변화에도 무딘 편인데, 핸드폰을 사고 6개월이 넘은 시점에 우연히 핸드폰 뒤판 유리가 깨져있는 걸 깨달았다. 이틀에 한 번꼴로 알코올 스왑으로 핸드폰을 닦아주는데 왜 바로 눈치를 못 챘는지 의문이지만, 핸드폰은 뒤판이 깨진 상태로 2년을 버텼다.


어차피 모든 물건은 소모품이고 적당히 쓰다가 적당한 때에 바꾸면 되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내 무신경함에 복수라도 하듯이, 비바람이 몰아치던 겨울날 갑자기 사건이 터졌다.


식탁에 올려놨을 뿐인데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한 핸드폰은 아무리 충전기를 바꿔봐도 충전이 되지 않았고 메신저 앱 하나 열어보기도 힘들게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 배터리 문제인 줄 알았고, 배터리를 교체했다. 핸드폰에 돈 들이는 게 아까웠지만 일단 시간을 벌어놓고 생각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나의 이런 잔꾀를 간파한 핸드폰은 배터리를 교체한 그날 저녁 완전히 꺼졌고, 다음날 새 핸드폰을 사고 자료 백업이라도 할 요량으로 배터리를 교체했던 센터를 다시 찾아서 메인보드까지 교체해봤지만 센터에서 집으로 가는 10분 사이에 영원히 꺼졌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이틀 사이에 핸드폰 수리에 쓴 돈만 10여만 원. 상태가 많이 안 좋고 그간 내가 험하게 쓴 건 알지만 그래도 이 정도 성의를 보였으면 백업할 시간은 줄줄 알았다. 겨울이라고 해도 요 며칠 하늘은 맑았는데 하필 딱 비바람이 몰아치던 이틀을 고른 것도 괘씸했다. 우산이 꺾이는 거친 바람을 가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센터를 왔다 갔다 했는데 결론은 돈은 돈대로 날리고 자료는 살리지 못하다니. 심지어 나는 원래 직구 핸드폰을 쓰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고장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국내 자급제 폰을 사야 했다. 한 마디로 이 며칠 사이의 비극 동안 내 마음대로 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단 것이다.


가장 괘씸한 부분은 센터에서 집으로 가던 10분 사이에 핸드폰이 꺼진 부분인데, 안전하게 집까지 모시고 가려던 노력과 달리 순식간에 꺼져버린 까만 화면에 며칠 간의 노력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조작이 전혀 안 먹히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나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이러고 싶지 않지만 이쯤 되면 핸드폰이 3년간 나에게 당한 수모를 되갚아주기 위해서 마지막에 일부러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고장 난 구 핸드폰을 책상 구석에 던져놓고 늦은 밤까지 새 핸드폰을 세팅했다. 다행히 클라우드에 저장해둔 일부 자료는 찾을 수 있었지만 1/5도 안 되는 수준이라 지금도 기존에 쓰던 어플을 깔 때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 찾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에 메인보드 교체는 안 하는 건데.'

'돈은 돈대로 쓰고 참 운도 지지리 없다.'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해... 근데 난 왜 이리 운이 없는 거지?'


속이 부글부글 거릴 때마다 구 핸드폰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망치로 깨면 속이 좀 시원할까? 완전히 고장 난 거니 팔아도 돈이 안 되겠지?

잠자리에 누우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일이 휘몰아칠 땐 수습하느라 바빴는데, 가만히 돌이켜 보니 모든 순간마다 최악의 선택을 했던 것 같아 더 속상했다.


정말 나는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하고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는데,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핸드폰을 험하게 쓰고 자료 백업도 해두지 않았고 고장 난 걸 고쳐보겠다고 돈을 들이고도 살리지 못했으니 바보 같은 건 맞는데, 그렇다고 내가 지지리 복도 없고 모든 선택지에서 최악을 고른다고 이야기하기엔 너무 비약이 아닌가 싶었다. 분명 그 와중에도 운이 따라준 순간이 있을 텐데?


가만히 처음부터 하나씩 상황을 복기해봤다. 마지막으로 센터를 찾았을 때 사장님은 핸드폰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니 중요한 자료부터 백업하라는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강조했다. 핸드폰을 받아 들고 집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15분 남짓. 팔 한쪽에는 우산을 끼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며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백업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센터를 나온 직후부터 핸드폰은 핫팩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이대로 무사히 집까지 가져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 맞어 자료 적어둔 게 있었지 가면서 그거부터 옮기자'


메모 어플에 중요한 자료들을 따로 모아둔 비밀글이 있었다. 사진, 연락처 같은 것은 자칫 시도하다가 핸드폰 상태가 악화될 위험이 있지만 비밀글의 내용을 옮기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신호를 기다리는 타이밍에 비밀글의 내용을 메일 앱으로 옮겼다. 그리고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과 연락처를 확인하려는 찰나, 핸드폰이 꺼졌다.


귀신같은 타이밍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래도 비밀글로 모아둔 자료 일부는 살렸다는 생각에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더 많은 자료를 잃었지만, 중요도가 낮거나, 조금 귀찮긴 해도 다시 모으려고 하면 충분히 모을 수 있는 자료들이었고, 비밀글로 모아둔 자료들은 찾으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이 자료들을 살린 것은 꽤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는 정신없어서 빠르게 잊어버렸는데,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때가 바로 내가 운이 없는 게 아니라는 증명이자, 핸드폰이 나에게 마지막 의리를 지켜준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갑자기 벌어진 사건과 잃어버린 자료, 의미 없이 날린 돈의 크기를 생각하면 운이 없었던 게 맞지만, 그래도 [지지리 운도 없지]라고 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어쨌든 돈을 투자해서 고쳤고, 내가 중요한 메모 자료를 백업하는 순간까지 핸드폰이 가지 않고 기다려줬으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고장 난 물건 하나에 뭐 이리 감정이입을 하느냐 할 수 있겠지만, 고작 그 물건 하나 때문에 우울하고 자존감이 떨어지던 며칠에 새로운 시야가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이런 마음이 듦과 동시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래 이런 일도 있는 거지''다음부터 백업에 더 신경 써야겠다' 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예전부터 항상 가지던 의문이 있었다.


[나는 왜 이리 운이 없을까?]

[남들은 다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리 볼품없고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을까?]

[도대체 운이 뭘까]


여전히 답은 알 수 없지만, 내가 어느 부분을 바라보고, 생각을 어디서 멈추고, 행동을 어디까지 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사건도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는 어렴풋하게 깨달은 느낌이다.


[갑자기 핸드폰이 고장 나서 돈도 없는데 새 핸드폰을 사야 했어. 자료 백업도 못했고]

[고장 난 핸드폰을 고쳤는데 10분 만에 꺼지긴 했지만 그 사이에 중요한 자료 일부를 백업할 수 있었어]


나는 어느 쪽에 내 삶의 시선을 두고 싶은 걸까.

이제까지 전자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전자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깨달았다.


오래전부터 운에 대해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지금이 내 삶의 작은 운들에 대해 돌아볼 적기가 된 것 같다.

한땐 열심히 하면 모든 걸 바꿀 수 있을 것 같았고,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과 풀리지 않는 상황, 나에게만 없다고 여겨지는 운 때문에 끝없이 우울하고 속상했는데, 이제 드디어 생각을 뒤집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뒤집어 보다 보면 뭔가 하나는 나오겠지.


마지막까지 원망만 했던 나에게 큰 가르침을 안겨준 핸드폰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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