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이브
연말이 다가워 올 수록 온 세상에 빛이 더해지고 있었다. 거리는 눈이 부시게 트리와 별로 장식되었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들떠있었다. 명동 거리로 나선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대학생 때 왔던 기억 이후에 왔는지 아닌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마도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기피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그럼에도 이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으로 향한 것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자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 즈음 도착한 명동 거리에는 이미 사람들의 물결이 대단했다. 3 발자국쯤 되는 노포 사이를 건너가기가 쉽지 않았다.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길만 잃지 않는다면 목적지로 최단 거리를 파악해 효율적으로 가는 타입인 나는 연말 저녁의 명동 거리가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쩌겠어, 좋아하는 이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싫어하는 일도 꾹 참고 해내야 하는 것. 직진, 직진하여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유진님은 명동돈가스를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거기가 어딘지도 몰랐으나 그래서 더 좋았다. 들어가니 마치 일본 어느 카츠집에 온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이 없는 듯 평온했으나 안에는 이미 웨이팅도 제법 있었다. 정면엔 조리대가 있었는데 부위별 고기와 밀-계-빵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오른쪽엔 양배추 샐러드가 담긴 그릇이 순서대로 착착 쌓여 있었다. 서버 분들은 소스, 물컵을 계속 체크하며 반이 채 비기도 전에 리필을 해두고 있었다. 오픈한 지도 오래되었고 늘상 맛집이라 사람이 북적거렸을 이 집은 군더더기 없이 저마다의 할 일이 잘 배분되어 있었다. 국과 장국, 카츠까지 금세 차려졌고, 먹기 시작하자 그 집의 일하는 방식을 닮은 깔끔한 맛이 느껴졌다.
배가 불렀지만 마지막 한 조각까지 기어코 다 먹었고, 거리를 조금 돌아다니다가 명동 CGV로 향했다. 애초에 상영관이 몇 개 되지 않았으니 작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더 작았다. 매점에선 단짠 팝콘과 대용량 콜드브루를 사서 들어갔다. 예매를 할 때 외따로 떨어져 있는 두 자리를 골랐더니 상영관 문 코앞에 있어서 실컷 웃었다. 고개를 정면보다 위로 들어 의자에 빳빳이 기대고 앉았다. 아마 내 인생 영화관에서 가장 앞줄에 앉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주토피아2를 보았다. 이미 2번이나 연기했던 영화약속이었다. 주변에서 미리 본 분들은 다 반응이 좋았다. 현실이라면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모 아니면 도겠지만(빽도인가?), 영화에선 그 차이를 적정한 선에서 잘 끊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미 내겐 현실에선 너무 피곤한 주제였으므로 웃고만 싶었다. 두 주인공이 오해와 갈등으로 잠시 헤어져 있다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는 걸 고백하는 순간에 감동스러웠다. 나란 뻔한 인간. 그 미숙함이 사랑스러웠다. 내가 저들의 사정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일까. 나의 현실도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영화가 끝나고 나는 내가 닉인지 주디인지 생각해 봤다. 처음엔 닉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내 안의 주디가 고개를 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거라는 약간의 오만, 열정적인 내 모습을 스스로 사랑하고, 그런 기준을 남들에게도 강요하는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열정만큼 되진 않아서 실망하는 일도 많고, 세상에 한탄도 하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토끼. 나는 닉의 탈을 쓴 주디였다. 그러나 나는 주디만큼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내년엔 더 솔직해지자. 그게 나의 약점이 되더라도.
마지막으로 코인 카페를 가서 아포가토에 나온 아이스크림 4덩이를 보며 성탄절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웃었다. 주인 분을 닮아 안락한 분위기와 넉넉한 마음이 좋았다. 캐럴이 다양한 버전으로 흘러나오는 공간, 아마도 한 달 전부터 이렇게 꾸며져 있었겠으나 그것마저도 기분이 퍽 좋아지는 더할 나위 없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