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고성의 일출들

일출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하여

by yeji

여행을 가면 어떤 순간을 가장 기다리시나요? 몇 년 전의 저라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었거나, 함께 한 일행과 기억에 오래 남을 대화를 나눴거나, 독립서점에서 좋은 책을 발견한 바로 그 순간을 꼽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성을 다니게 된 후로는 오직 한 가지 순간을 온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요. 그건 바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출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고성은 강원도 최북단에 위치해 있어요. 속초보다도 더 위로 올라가야 하는 곳이지요. 뿐만 아니라 고성 지역 자체도 위아래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고요. 고성은 아침 해가 가장 빨리 떠오르는 곳 중의 하나이면서도 일출이 장관인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미 조선 시대부터 소문이 나서 고성8경으로 선정된 명소들도 있을 정도니까요. 화암사, 천학정, 능파대, 청간정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는 화진포까지 다음 주 2026년의 첫 해를 보기 위해 일찍부터 고성을 점찍어둔 분들도 많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맨 처음 고성에 갔을 때는 고성의 일출을 그렇게 챙겨볼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고성이라고 해서 해가 유독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바다 위에 해가 떠올라 일출을 볼 수 있는 다른 지역도 많고요. 저 역시도 일출을 보면 좋고 아니어도 크게 아쉽지 않은 정도로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왜 고성의 아침 일출을 가장 기다리게 되는 걸까요?

일출은 매일 일어나는 필연적인 사건입니다. 해가 지고 뜨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어김없이 일어나는 일이죠.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루틴한 일이고요. 하지만 일출은 매일 똑같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도 합니다. 구름에 가려져 떠오르는 해를 한순간도 보지 못하는 날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해를 볼 수 없는 날이죠.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주변이 어느 정도 밝아지면 그제야 이미 해가 떴구나 깨닫습니다. 또 어떤 날은 구름 때문에 일출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진작 포기했는데, 구름의 아주 작은 틈 사이로 해를 마주하게 되는 날도 있어요. 넓고 넓은 하늘에 아주 작은 구멍, 그 작은 틈 사이에 해가 뿅 나타나죠. 그럴 때면 기쁨을 잘 표현하지 않는 저마저도 신이 나서 펄쩍 뛸 정도입니다. 일출은 그렇게 필연적이지만 우연적인 사건이에요.

세상 모든 일이 필연적이기도 우연적이기도 합니다. 그것에 필연과 우연을 이름짓는 일도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겪은 일이니까요, 그 누구도 대신할 수는 없죠. 도저히 안되겠다고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다가도 우연히 마주친 무언가에 인생을 걸게 되는 것도, 자신있다고 잘 될 거라고 만만하게 생각하다가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 내가 그것을 결국 무슨 이름으로 매듭지을 것인가는 내 몫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불끈 힘이 납니다.

매번 같은 모습으로 일출을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어떤 날은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아 음악을 듣고, 어떤 날은 손을 호호 불며 따뜻한 커피를 마십니다. 어떤 날은 해변가를 오가며 산책을 하고 때론 작게 소리 내어 기도를 합니다.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 바로 눈앞에 있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어서일까요?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의 끈질김을 신기하게 느낄 때도 있습니다. 파도를 타고 유유히 떠다니는 갈매기를 보며 그의 생을 부러워하다가, 암석 위 자리를 지키는 새들을 든든한 친구처럼 느끼는 날도 있어요. 그러다가 바다와 파도 위로 비치는 선명한 햇빛에 감탄을 하는 날도,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점점 커져 천둥처럼 들리는 날엔 깜짝 놀라기도 하고요.

제멋대로 사는 제가 일출을 기다리면서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아니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느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겠지만 한편으로 간절히 바라고 바라면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요. 지금 고민하는 것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지금은 사무치게 힘든 일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지나가리라는 것을요. 그러니 지금 작은 것에 너무 아파하지 말고, 큰 것에도 주눅 들지 말고, 그저 저의 필연적이고 우연한 하루를 살아내라고요. 바쁘게 살다가 쉽게 잃어버렸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고성 바다 앞 일출이었어요.

마치 깔려 죽을 것만 같은 큰 고민이 이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저는 시원한 해방감을 느낍니다. 지금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더 사랑해야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열렬히 아껴야지, 미워하던 것들을 잘 놓아주어야지. 오늘과 내일을 같은 마음으로 씩씩하게 대해야지. 고통에 움츠리고 불안에 수그렸던 제 모습을 거울처럼 마주하면 그 사실만으로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저를 보게 되어요. 그렇게 매번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하면 달라진 모습을 잘 체감할 수 있게 된답니다. 제 마음이 제 자리로 돌아가게 만드는 방법을 깨닫게 된 저를요.

만일 누군가에게도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면, 저는 고성의 아침 바다로 향하길 권할 거예요. 그리고 적어도 10번의 계절을 제가 지나는 동안 깨닫게 된 것들을 꽤나 비슷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마치 해가 떠오르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거예요. 그리고 제가 고성 일출을 보러 다시 바다 앞으로 돌아가는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루틴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떠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이에게 고성 바다와 일출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아주 작은 위로가 있었다는 사실을요.




일요일 연재
이전 06화좋아하는 고성의 공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