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씨앗을 심어준 사람들

26월 1월 15일~17일 고성에 다녀와서

by yeji

2026년 새해가 시작되고 첫 고성을 다녀왔습니다. 고성에만 다녀오면 어김없이 글을 쓰게 되는데요, 다시 한번 느끼지만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좋은 공간이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독서모임을 함께 하는 멤버 한 분과 2박 3일 간 고성을 열심히 돌아다녔는데요, 이번 여정에서는 이번 글감에 대해 한번 남겨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바로 저에게 고성을 갈 수 있도록 씨앗을 심어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여정에서 그분들 중 2분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거든요. 계획했던 것도 아닌데 타이밍이 딱딱 맞아떨어졌으니, 참으로 우연이란 신기한 것입니다.


시작의 씨앗을 심어준 선정님

제가 워케이션을 막 다니기 시작했던 2022년 하반기에는 지금처럼 고성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주로 동해안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리모트 워크를 했었어요. 특히 지역 내 워케이션 지원 사업을 참여하게 되는 경우에는 혼자서 갔더라도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지원사업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바로 강릉이었습니다. 각자 일을 하는 시간도 많았지만 다 같이 강릉의 숨은 편집샵과 독립 서점을 돌아다니거나 밤이 되면 라운지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몇몇 분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 모임에서 만났던 분들은 다 좋은 분이었지만 당시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을 꼽으라면 바로 선정님을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첫 만남에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선정님은 영화제의 마케팅 팀장이자, 디자이너이자, 커뮤니티의 모임장이라고 소개했어요. 그다음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서울 - 춘천 - 하동 3군데를 오가며 살고 일을 한다고 했었어요. 당시 제게 일을 한다는 것은 조직에 속하거나 조직에 속하지 않는 형태로 해야 하고, 사는 곳 또한 서울에 살거나 서울에 살지 않는 선택지만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정님은 처음 만난 삶의 레퍼런스가 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당시 선정님은 아주 행복해 보였어요. 그 지점이 무척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요즘도 참 행복해 보입니다.)


제가 워케이션을 다니거나 커뮤니티를 하며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다양한 삶의 레퍼런스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선정님이라는 삶의 레퍼런스를 처음 만난 이후로 어쩌면 제 마음에 서울과 그 어딘가를 오가며 일할 수도 있겠구나, 본업도 있지만 생업은 또 따로 운영하는 형태로도 충분히 일할 수 있겠다는 씨앗이 심겼습니다. 그게 어떤 씨앗으로 자라날지는 몰랐어도 가끔 물을 주고 햇빛을 비추며 가꿨더니 어느새 잎을 내고 뿌리를 내려 지금 2026년의 제가 된 것이지요.


저는 강릉 워케이션 이후로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녀의 일상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자유롭게 행복하게 일하고 있는 선정님이 가끔 고성에 와서 일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이번 주에 갑자기 그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올린 실시간 스토리를 보고 선정님도 맹그로브 402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준 것이지요. 그것도 바로 제가 바로 옆방인 401호에 있던 순간에요! 벽 하나를 두고 강릉의 인연이 이어진 것입니다.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대단한 우연이었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1층 키친에서 만나 엊그제 강릉에서 만났던 것처럼 반갑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선정님은 로컬에서 일할 수 있는 청년이 너무 부족하다며 일단 마음을 먹고 오기만 한다면 많은 기회가 앞에 놓일 거라 했어요. 특히 고성은 작년부터 큰 규모의 문화지원사업이 시작되어 더욱 기회가 많을 거라고요. 연고 없는 로컬에 이주한 선배로서 선정님은 정말 해봐야만 알 수 있는 여러 꿀팁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주를 선택한 저의 결정을 축하한다고도 말해주었어요. 저는 선정님에게 제가 결심한 삶의 시작점에 선정님이 있었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그것도 고성에서 우연히 만나 고맙다는 이야기를 직접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참 오래 기억될 여행이었습니다.


고성 이주에 대한 씨앗을 심어준 무사 사장님

고성에 대한 글을 쓰고 싶게 만들었던 강렬한 순간을 몇 가지 떠올려보면 무사 사장님을 꼽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시 썼던 글 "고성에 오세요.") 무사에 앉아 대화를 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까먹을까 걱정하면서 나와의 대화창에 대화 내용을 막 받아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와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는 당시 함께 여행했던 유진님과 거의 3시간 동안 무사 사장님이 해준 말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보며 복기를 했었어요.


사는 마음에 대하여 말해주고 씨앗을 심어준 무사 사장님을 오랜만에 다시 뵈었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이번 여행은 단 2명이서 떠났던 여행이라 함께 간 분이 혼자서 술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일정을 취소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다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던 멤버 분이 갑자기 합류하게 되었어요. 무사를 참 좋아하는 멤버 분이었기에 두 분을 모시고 무사로 향했습니다. 마침 자리도 딱 3자리가 남았었던 상황이었으니 마치 저희를 위해 준비된 자리 같았습니다.


거의 7개월 만에 온 건데 무사의 분위기는 여전히 사장님을 닮아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여전히 주방을 오가며 바쁘게 요리를 하고 계셨어요. 여전히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안내를 해주셨고요. 밤이 깊어지자 어둑하게 조도를 낮추고 온도도 조절해 가며 공간을 살펴주셨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바에 앉아 술을 시켜두고 대화를 떨었는데 아무래도 공간이 작았던 탓에 우리가 나눈 대화를 다 들으셨던 모양입니다. 제가 5월의 그 '고성을 좋아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었다는 걸 기억해 내셨습니다. 원래 먼저 말을 거시는 분은 아닌데, 고성에 여전히 자주 오냐고 살 계획이 있냐고도 넌지시 물어보셨지요.


저는 작년 무사에서의 대화를 생각하며 그 이후 하반기에 고성에 올 마음을 굳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성에 오기 위해 작년엔 업을 바꾸었고, 늦어도 올해 여름엔 고성에서 살고 있을 것 같다고요. 사장님은 무던해 보이는 편이신데도 조금 놀라신 듯했습니다. 서툰 고백을 하듯 사장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제가 고성에 와서 살 수 있도록 결심하게 만든 분이시라고요. 결국 와서 살아봐야 안다고, 더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살게 될 거라고 말씀하신 그분이었으니까요.


저번보다 훨씬 편한 모습으로 사장님과 농담도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아 있으니 모든 일들이 부쩍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고성으로 올 마음을 먹는데 거진 1년쯤 걸렸습니다. 자신이 없었던 제가 일을 핑계로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무심코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더니 어느새 꽤나 자라나 있던 무언가를 본 것이지요. 뿌린 이도 키운 이도 제대로 몰랐지만요. 그제야 이 마음을 잘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턴 정말로 주변에 선언을 하듯 고성으로 가겠다고 이야길 했고요. 그건 어쩌면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선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게 마침표처럼 확신을 준 이들은 저처럼 고성을 사랑한 많은 이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집니다. 저의 마음을 슬며시 드러내면 그들은 어디서나 공명하듯 응답해 왔습니다. 나의 선택은 불완전해서 확신이 없을 수 있지만 제게 슬며시 고성을 사랑한다 고백하는 수많은 이들을 믿습니다. 고성이 가진 힘은 이렇게 조용하고도 거대해서 많은 이들을 이미 품고 있더라고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이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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