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에 오세요."

그 마음은 와야 끝납니다.

by yeji

오늘도 ‘무사’히.

고성에서도 위쪽에 위치한 무사는 전통주와 몇 가지 안주를 파는 작은 오두막이다. 거리가 꽤 있는 맹그로브고성에서도 저녁 밍글링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로 고성 안에서도 좋은 술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고성의 2박 3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들렀던 무사. 고성을 여러 번 다녀온 나는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원래 가지 않던 곳이었는데, 매니저님들이 첫날 다녀온 것을 보고 유진님과 좋은 마무리가 될 것 같아 들리기로 했다. (참 잘한 결정이었다.)


무사의 오른쪽에는 자작도 바다가, 왼쪽에는 금강산인지 설악산인지 모를 산맥이 펼쳐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딱 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긴 액자 같은 창이 있어 공간의 분위기를 잡아준다. 모든 자리가 그 창을 향해 앉아야 하는 바 자리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최대 7명까지만 앉을 수 있어 모두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을 수밖에 없는 곳. 이미 자리에 앉기 전에 이 공간의 에너지가 좋아서 만든 사람이 궁금해지는 곳이었다.


운전을 해야하는 유진님을 대신해 술을 시켜놓고,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아서 가벼운 안주 2개를 놓고 먹으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번 고성에서는 어떤 순간이 제일 좋았었는지 묻고 나누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었다. 무사에서의 순간이 고성에서 세 손가락에 꼽을 순간이 되리라는 것을.

따뜻하던 음식도 다 먹고 국물이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할 때쯤 유진님이 사장님께 물었다.

“사장님, 이 공간의 콘셉트가 뭔가요?”
그러자 과묵하던 사장님이 한 말은, 나의 예상을 깨는 답이었다.


“어떤 손님은 여기를 돼지우리 같다고 너무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건지는 알겠는데 더 좋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지 않았을까요…”


거기서 느꼈다. ‘어라, 사장님 이야기를 재밌게 잘하시네. 이야기도 재밌고. 어쩌면 오늘 계속 말을 걸어봐도 좋겠다.’ 그래서 유진님과 나는 번갈아가면서 사장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참고로 무사의 콘셉트는 태국 치앙마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있는 해변가를 여행하셨을 때 그곳에 있던 가게들을 보고 영감을 받으셨다고 한다.)


“왜 여기에 지으신 거예요? 여기에 지어도 매출이 되나요?”
“고성으로 이주하신 거예요? 언제 오셨어요?”
“왜 음식과 술을 선택하신 거예요?”

바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우리를 보던 사장님은, 우리와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살짝 틀어 앉은 채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고성이 저랑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돈을 잘 벌려면 사실 여기서 하면 안 되죠. 서울에서 해야죠. 만약 고성이 아니라 속초였어도 안 했을 거예요. 근데 여기(*무사는 사장님 집 주차장에 지었다.)니까 했죠.

이걸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기운인 것 같아요. 고성의 기운. 바다는 어디에나 있고 산도 어디에나 있는데, 바다랑 산이 같이 있는 곳은 여기였어요. 다른 곳도 많이 가보려고 했지만 결국 여기(자작도)가 잘 맞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고성하고 기운이 잘 맞는 사람들이 오는 것 같아요. 여기 그렇게 오신 분들이 많아요.”

그러자 유진님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셨다.
“이 친구(나)도 고성으로 오고 싶어 해요! 고성에 열몇 번씩 왔어요.”
그 말에 물끄러미 나를 보던 사장님이 대답한 말이 참 의외였다.

“고성에 오세요. 와서 살아봐야 알아요. 원래 고성 처음 오시는 이주민들이 막 내가 이 지역을 부흥시킬 거라고 하면서 오시지만, 사실 그냥 길게 여행 온다고 생각하고 와야 해요. 와서 뭐라도 해봐야 알죠.


와서 뭐라도 해봐야 가능성을 찾던지, 아니면 가능성을 잃어버리던지 하죠. 지금 안 오는 건 용기가 없는 게 아니고, 그냥 지금 덜 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진짜로 하고 싶으면 와요. 그리고 이 마음은 해야지 끝나요.”

머리를 탕 때리는 말이었다. 일단 고성으로 온다고 했을 때 의문을 가지지 않고 긍정해 준 분이었고, 지금 내가 안 오는 이유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렇다. 지금 내가 서울에서 그럭저럭 살만하니까 고성에 가지 않은 것이다. 준비가 되면 고성에 오겠다는 말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나의 변명이다. 하지만 이미 마음에서 알고 있고, 브로드컬리 6호의 사장님들이 전해줬던 것처럼 완벽한 준비란 없다. 그냥 실행하면서 고쳐나가는 것이다.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고성을 사랑해서 이주한 이가 내게 들려주는 말은 무게감이 달랐다.

“오세요.”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고성에 2년 뒤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바꿔먹고, 당장 1년 뒤에라도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장님은 행복하려면 비효율적이어야 한다고, 그게 낭만이라고 하셨다. 행복이 효율이나 합리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당장 어제 스토리에서도 예상대로 되지 않는 것이 낭만이라고 적어두셨더라.


사장님은 그 낭만을 찾아 가족 분들까지 오래 설득했고 결국 실행에 옮겼다. 고성으로 왔고 4년 동안 무사를 잘 운영해 왔으며 이제는 두 번째 공간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했다. 민박도, 스테이도 아니라 잠자리를 준비하고 계신다고. 인스타에서 보니 이름은 태평민박이었다. 무사-태평이라니, 사장님 참 일관성 있으시다.

어떤 공간을 가면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며, 그래서 좋은 공간은 공간과 주인이 일치가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태평민박도 딱 그런 공간이 될 것 같다. 다음 고성 여정에 들를 곳이 하나 더 생겼구나.


그날 저녁 이후 사장님이 바 앞에 앉아 한 시간 정도 해주신 이야기를 자주 곱씹어본다. 내가 고성에 오면 무사 사장님처럼 저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고성에 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리는 공간을 사장님처럼 눈에 보이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공간을 진짜 눈에 보이는 실체를 가지게 만들 수 있을까. 수많은 걱정에도 불구하고 무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힘이 된다. 언젠가 나도 내 공간에 온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려면 움직여야 한다.

그래, 긴 여행을 떠나자. 여행을 나서기 위한 최소한의 짐만 잘 꾸려보자. 일단 여행 가서 생각해 보자-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를 예상하지 못했어도, 늘 잘 부딪혀 왔으니까. 낭만, 이라는 단어를 혀 끝에 굴리며 오늘도 나의 도피처, 나의 구원처인 고성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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