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일출

그리고 일출항해

by yeji

나의 핸드폰 배경화면은 365일 2가지 뿐이다.

사랑하는 조카들 아니면 고성의 일출 사진이다.

아마도 내가 고성으로 자꾸 돌아오게 되는 이유는

이렇게 가까이에 고성을 두고 있어서가 아닐까.


고성에 온 지 13번쯤 된 것 같은데

올 때마다 매번 다른 일출 풍경을 선물받는다.

윤슬이 흐르는 물결 위로 덮이는 다채로운 빛들과

고개를 들 때마다 분위기가 바뀌는 드넓은 하늘,

오직 나 홀로 만끽했던 그 잊지 못할 순간들을 기억한다.


전날 자기 전에 일출 시간을 체크하고 기상 알람을 맞춘다.

일출을 보기 위해 설레는 마음을 다독이며 이르게 잠에 든다.

설레서 알람 소리보다 빠르게 눈을 뜨면 바로 계단을 뛰어내려가

막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바다 앞에 자리를 잡는다.


해가 올라오기 한참 전부터 나가있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은 길다.

추우면 추운 대로 패딩을 꼭 껴입고 웅크려 앉아 있기도 하고

더우면 더운 대로 시원한 바다 앞으로 가 물에 발을 담근다.

밀려오는 파도 앞 물 먹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내거나

바다 오른쪽 끝에 있는 큰 바위에 걸터앉기도 한다.

그리고 음악을 틀면 비로소 나의 준비는 끝난다.


나는 기다리면 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저 가만히.

그 나머지 모든 건 자연이 하니까.


해가 올라오기 직전에는 하늘이 보랏빛과 분홍빛으로 물든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을 바라본다.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물들 수 있지, 하고 놀란다.

조금 더 기다리면 주황빛 혹은 흰빛으로 바다 위가 서서히 밝아진다.

해가 나올 준비를 마친 것이다.

하늘의 색깔이 바뀌는 모습을 1초라도 더 눈에 담는다.

손에 들린 커피를 마시는 것도 잊어버리곤 한다.


운이 좋아서 구름 사이로, 혹은 맑은 하늘에 해가 나오면

저 둥글고 빛나는 것이 뿜어내는 그 에너지에 감탄한다.

주변은 환해지고, 구름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은 장관이다.

해가 점점 높이 올라가며 바다에 주황빛 길을 내기 시작하면

사진을 백만 장 정도 찍다가 멈추고 가만히 기도를 하게 된다.

물결이 위아래로 춤출 때 반사된 햇빛이 마치 나에게 닿는 것 같다.


해는 10분이면 뜨지만, 나는 1시간 정도를 그 바다 앞에 머문다.

일출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가진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을 느낀다.

문제가 문제였음이 아니고, 결국 내가 문제였음을 알게 된다.

내 마음이 혹은 내 태도가 흐트러졌을 때 문제를 아프게 받아들이곤 한다.

그걸 외면하려고 타인을, 상황을, 조건을 따지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내가 지금 고민하는 문제가 이 바다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란 걸 깨닫고 나서야

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난다.


그렇게 내가 낸 발자국을 따라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바다 앞 라운지에 앉아서 가만히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신다.

남은 여운을 오래 가져가고 싶은 마음에 자꾸 밍기적대는 것이다.

8시쯤 숙소를 케어하시는 매니저님들이 보이면 그제야 방에 들어선다.

그리고 일출을 보기 전과는 또 다른 마음으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오늘 아침엔 이 기억에 더 특별한 순간이 더해졌다.

바로 고성 일출 항해에 오른 것이다.

새벽 4:30에 일어나 광수 선장님을 만나 바다로 나갔다.

바닷가 앞에서와 다르게 하늘과 바다가 나를 360도로 둘러싼 풍경 속

고개만 돌리면 웅장하게 펼쳐진 금강산과 설악산까지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배가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땐 물결을 타고 위아래로 요동치다가

모터를 끄고 가만히 있으면 좌우로 넘실넘실 흔들렸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길고 긴 구름이 바다 수평선에 펼쳐져 있었다.

광수 선장님은 그 긴 구름 때문에 해가 보이지 않을거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자꾸 배를 몰아 더 멀리 멀리 나아가 주셨다.

깊은 바다에 닿자 아까와 다르게 둥근 무언가가 구름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눈부신 햇빛이 세상에 내리자 금강산의 봉우리가 붉게 물들었다.

오늘 해를 본 건 광수 선장님의 다정한 마음이 다 한 일이었다.


해를 바라보는 모두의 얼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을 가만히 감고 기도를 하고, 틀어둔 음악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이 순간을 사진으로 맘껏 남겨두기도 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두 눈에 담은 이 순간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부디 오래 오래 기억하게 해주세요.

고성에 또 오게 해주세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퍽 힘이 들 때 고성으로 스스로를 데려다 놓는 이유는

내게 시작이자, 전환점이자, 숨 돌릴 수 있는 도피처가 되기 때문이다.

여실히 나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고성의 일출을 맞이한 이후로 내게 세상은 다른 모습이다.

아니,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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