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도망칠 곳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여러 명에게 공통적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예지님이 부러워요.”
“제가요? 왜요? 어떤 부분이요?”
“저도 고민 없이 떠나고 싶은데 솔직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의 목적지는 언제나 고성뿐이다. 떠나는 방법도 늘 똑같다. 집에서 10분이면 도착하는 동서울버스터미널을 이용한다. 속초에 도착하면 시외버스터미널 앞 택시를 탄다.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면 9시가 채 되기도 전에 숙소에 도착한다. 길치라서 늘 지도를 켜고 다니는 내가 고성에 갈 때는 어플을 켜지 않는다. 고향인 수원에 갈 때처럼, 이제 고성에 가는 길이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이 바뀔 때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지만 고성으로 가는 길은 이제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런 내가 잊을만하면 고성의 사진을 올려대니 그런 장소가 없는 이들에겐 고민이 되었을 법도 하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없이 목적지가 단 하나뿐인 나. 그리고 커다란 지도를 펼쳐놓고 목적지부터 골라야 하는 사람들은 시작부터 쓰는 에너지의 크기가 다를 것이다. 갈 곳을 정했어도, 어떻게 갈지, 언제 갈지, 가서 뭘 하고, 끼니때가 되면 뭘 먹을지도 하나하나 알아보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의 연속일 테니 그 부담감에 떠나기도 전에 지쳤을 수도 있겠다.
어떻게 지금의 목적지를 찾았는지 묻는 이들도 있지만 역시나 별 것 없다. 갈 수 있는 곳 중에 최선을 골랐다. 내가 사는 곳을 고려했을 때 기차보다는 버스로 닿을 수 있는 곳. 허리가 썩 좋지 않은 편이니 편도 3시간 이내로 도착할 수 있는 곳. 사람이 북적거리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으니 숙소가 너무 크지 않은 곳, 그러면서도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하니 너무 작지도 않은 곳. 무엇보다 바다가 가까워서 자주 갈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강릉이나 묵호, 제주 같은 도시들도 가봤지만 그 시절의 내게는 고성이 가장 잘 맞았다.
고성이 처음부터 100점짜리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50점은 넘겼기에 만족했다. 더욱이 자주 와서 익숙해지다 보니 나중엔 80점, 90점이 되었다. 빈도가 늘어가며 시간이 쌓이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 내게 꼭 맞는 100점짜리 장소를 찾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았었다. 어느 곳이든 딱 50점만 넘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내가 불편한 것보다 좋은 점을 보면 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당시 내게는 매달 도망칠 수 있는 곳을 만든다는 결심을 지체하지 않고 실현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일전에 <시대예보: 호명사회>를 읽고 불안함과 조급함을 주제로 썼던 독후감의 일부를 다시 꺼내어 봤다. ‘불안함과 조급함이 나를 뒤흔드는 순간에 재빨리 안전한 나만의 구역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평소에 나를 나답게 만드는 안전한 공간이나 시간을 잘 파악해두어야 하겠지요. 그런 시간과 공간이 모여 결국 나를 내 이름으로 서게 만드는 시작점이 될 거예요.’ 이 생각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이름을 찾기 위해 나는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고성으로 도망친다.
아직도 어디로 갈지 고민만 하고 있다면, 나처럼 몇 가지 조건을 두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마음이 가는 곳을 일단 골라보자. 그리고 무조건 떠나라. 진짜 그곳이 나랑 맞는지는 가봐야 안다. 설사 그곳이 아니었다고 해도 다른 곳에 가보면 된다. 100점이 아니라, 50점만 찾겠다는 마음으로 떠나자. 안 가고 주저앉아 고민만 하면 맞는지 아닌지 조차도 알 수 없다. 감기 걸리면 당연하게 약을 챙겨 먹는 것처럼, 지치고 힘들면 그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도 꽤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그 몇 번의 발걸음들이 모이면 꽤나 안온한 당신만의 도피처가 생길 거라고, 당신도 분명히 당신만의 시작점을 찾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니 올해는 누가 누가 자주 도망치는지 우리 한번 겨뤄보자. 남은 2025년, 꾸준히 도망치도록 함께 노력해 보자.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내 독후감에 달렸던 코멘트를 덧붙인다. 당신도 당신만의 고성을, 벤치를 찾으면 꼭 내게 이야기해 주면 참 기쁘겠다.
“사람들이 '도망'이라고 표현하는 그 공간들이 저는 '벤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스포츠 경기를 보다 보면 단순히 선수의 기량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선수가 경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때 감독이 선수를 교체해 줌으로써 잠시 벤치에서 쉴 시간을 주거든요. 그런데 그 시간이 마냥 휴식을 위한 시간은 아닌 것이 벤치에 있는 선수들은 혼란했던 운동장을 빠져나와 이제 넓은 시야에서 경기를 조망할 기회를 얻는 거거든요.
그러니 예지님께도 고성은 '벤치' 같은 공간일 수 있겠다 싶어요. 불안과 조급함이 밀려올 때 나 스스로 잠시 그라운드를 떠나 그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금 멀리 경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일 테니까요. 그 모든 것은 다시 우리가 경기에 집중하기 위한 시간들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