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오게 되는 마성의 고성

2025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by yeji

지금 막 고성에 다녀온 참입니다. 두 시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와 허기를 달래고 얼른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이번 여행은 오래 남기고 싶은 순간이 많아서 이 기억이 생생할 때 글로 남겨보고 싶습니다. 사실 오늘(이제 어제군요!) 새벽 3시가 넘어 잠들었다가, 일출을 보겠다고 일찍 일어난 바람에 그리 좋은 컨디션은 아니지만 이번 여행이 가장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는 않네요.


이제는 고성에 다녀온 횟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15번은 확실히 넘는 것 같고 20번이 곧 될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게 뭐 중요하던가요? 제가 이번 달도 고성에 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이번에는 혼자 출발해서, 둘이 되었다가, 셋이 되었다가 다시 혼자가 되어 여행을 했습니다. 아끼는 지인 분들이 같이 가셨거든요. 그 덕분인지 이번엔 여러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번에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제가 처음으로 차를 빌렸다는 것입니다. 방금 머릿속으로 그게 뭐가 대단하지?라고 생각하진 않으셨나요? 제게는 천지가 개벽할 일입니다. 저를 가까이서 본 분들이라면 제가 가게 문만 열고 나와도 방향 감각이 리셋되고, 네이버 지도가 없으면 잘 살아남지 못할 유형의 사람이라는 걸 아실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고성을 다닐 땐 직접 운전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나마 저번 여행에서 터미널에 마중을 나가야만 해서 용기를 냈던 것이 고성에서 첫 운전이었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기 싫은 일을 해내버린 거죠.


이번엔 좀 달랐습니다. 일단 저번에 어떻게든 운전을 한번 했더니 제 마음에 작은 용기가 생겼고요. 고성은 위아래로 길쭉해서 쭉쭉 달리기만 해도 대부분 오갈 수 있거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소개하고 싶은 곳이 많아지다 보니, 거기 가고 싶다고 말하면 바로 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쏘카를 빌려 운전을 해봤는데, 세상에! 너무 좋은 거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니! 물론 장대 같은 비가 왕창 쏟아지는 바람에 정말 아찔했던 순간도 있지만, 여기 제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까요 :) 직접 운전을 하니 갈 수 있는 세상이 넓어졌습니다. 좀 더 편하게 빨리 갈 수 있었고요. 차를 빌리는 경험을 통해 또 한 번 제 안에 있던 벽을 하나 허물어 낸 느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전거를 타고 옆 동네로 놀러 가기였습니다. 아, 자동차에 이어 자전거라니. 제가 그래도 자전거는 잘 타는데, 문제는 길눈이 어둡다 보니 항상 가봤던 루트로만 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나마 고성에서 자전거를 탔던 기억은 첫 번째 고성 방문 때 가까운 막국수 집에 가려고 시도했던 단 한번뿐이네요. 그런데 이번 여행에 함께 한 지인 분은 길을 잘 보는 편이었어요. 새로운 길을 가는 것도 겁내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전거를 좋아하셨고요. 고성에는 해파랑길을 따라 자전거 도로 표시가 있는데요. 이걸 따라서 쭉 달리면 위아래 동네에 갈 수 있다고 말씀드리니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하셔서 자전거를 빌렸습니다. (TIP: 맹그로브 고성에서 1시간에 5,000원에 빌려준답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습니다. 거기다 제가 큰 결심을 하고 무려 차도 빌려왔는걸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편하게 카페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인 분이 하고 싶다고 하면 같이 하는 거죠, 뭐! 막상 달리기 시작하니 바람도 너무 좋고 상쾌한 기분에 정신이 확 깨어났던 것 같아요. 목적지는 차로 하면 한 6~8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청간정 옆 카페 태시트였는데요, 자전거로 가보니 한 15~18분이면 가더라고요. 이 좋은 걸 왜 안 했을까? 싶었습니다. 차를 탈 때와 다른 시선에서 너른 바다들도 구경할 수 있었고요, 언덕에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다 서로의 모습을 보고 깔깔 웃기도 하다 보니 금방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도착해서 먹은 커피와 디저트는 달디달았습니다. 올 때는 더 빠르게 올 수 있었어요. 지인의 취향이 저에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줬습니다. 제대로 경험을 했으니 다음 고성 여행에선 자전거 타기가 아마 신규 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세 번째는 제 지인들과 함께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엔 저의 지인 두 분이 각각 따로 합류했습니다. 두 분은 각각 저와 일로 엮인 사이였고요. 각자 생각하신 일정이 있다 보니 혹시 셋이서 만날 수 있을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제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던 계획이 한번 틀어졌습니다. 코스도 어쩐지 2박 3일 내내 겹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 저녁, 자정이 다 되어 배가 고프시다길래 편의점에 갔다가 맥주 4캔 행사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다른 지인 분이 그 시간에 라운지에서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라 혹시 혼자 있는 시간에 방해가 될까 봐 연락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냉장고 앞에 서서 두 캔만 살까, 고민을 하고 있으니 지인 분이 그래도 연락하고 싶으면 해 보라고 말해주셨어요. 그랬더니 지인 분이 냉큼 오신다는 겁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고 불편할 수도 있는데 오신다고 하니 막상 제가 놀랐어요.


다행히도 재미있는 주제를 하나 던져주신 분이 계셔서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는데요, 그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제가 한 생각은 바로 이거였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마음을 생각하고 배려한다고 하는 일들이, 사실은 상당히 이기적인 것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요. 저는 성향상 기본적으로 내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까,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짐작하고 걱정하는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레짐작으로 그만두는 일이 참 많아요. 제가 하지 않으면 적어도 불편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을지언정, 새로운 연결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넘겨짚지는 말 것, 상대가 대답할 기회를 빼앗지 말 것. 앞으로 제가 해야 하는 숙제이겠지요.



마지막 네 번째는 해가 지는 시간을 기다려 독서를 하는 것이었어요. 맹그로브 고성에서는 언제든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독서를 할 수 있습니다. 제 지인 분도 이번 여행에서 몇 번이고 바다에 나가 독서하시는 모습을 보았었고요. 하지만 문제는 저녁이 되면 맹그로브 앞바다엔 아무런 광원이 없어서 밖에서 독서를 하는 건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녁엔 테라스를 열어두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독서를 하거나 아침에 일출을 보고 난 뒤에 독서를 했었어요.


하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고성을 벗어나 속초등대해변에서 더 왼쪽으로 가다 보면 맹그로브 앞바다처럼 이름 모를 바다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 바다 앞에 앉아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간부터 흐릿했던 달이 선명해지는 시간까지 깊은 독서를 했어요. 저만 그랬냐고요? 아뇨, 양 옆으로 따로 또 같이 온 분들이 바다 앞에 앉아 모두 한껏 집중한 채로 독서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올해 혜성처럼 속초에 등장한 이동식 독립 서점, 세발서점 덕분이지요. 원랜 오후 시간에 영업을 하시는데 오늘이 하필 시월의 마지막 심야 영업을 하는 날이었고, 제가 지인 분들을 모두 서울로 보내고 혼자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타이밍이 너무 잘 맞아떨어진 것이죠.


사실 세발서점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성도 아니고 굳이 속초 앞바다에서 그것도 어두워지는 일몰 시간에 독서하는 것이 제가 맹그로브 앞바다 앞에서 독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했었어요. 직접 해보니 완전히 다른 경험이더라고요. 일단 사장님이 추천해 주시는 스폿에 앉으면 교암리보다 훨씬 큰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요, 하늘에 약간 노을이 지면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고요. 세발서점 앞바다에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아서 파도 소리에 귀를 맡기고 책에만 몰입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는 것, 그건 진짜로 직접 해봐야만 아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의 여정을 멋지게 마무리해 준 대망의 피날레였죠.



올해 유독 누군가와 함께 고성에 가게 되는 이유는 꽤 분명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에 보다 쉽게 기회를 내어주게 될 거예요. 매번 같은 고성으로 떠나는 여행이지만, 매 순간 완전히 다른 여행이 됩니다. 특히 이번 여행은 더욱 그런 순간들이 인상 깊게 남은 것 같아요. 제게 고성을 왜 여러 번 다시 오는지 묻는 분들이 있었는데요, 저는 아직도 고성에 가면 처음 갔던 그 2023년의 여름의 마음처럼 고성이 좋습니다. 갈 때마다 이렇게나 다채롭고 새로운 여행이 펼쳐지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저는 11월에도, 12월에도 고성에 갈 예정입니다. 저를 고성에 불러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일정을 맞출 거고요, 그러니 우리 함께 갑시다. 당신과 나의 세계를 함께 확장하기 위해서요.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