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기 #36

나도 잊어버리고 말았구나

by yeji

과거로부터의 선물

오늘은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전월에 예약해 둔 고성 일정을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알게 되어 화들짝 놀란 것이다. 캘린더를 열심히 읽던 언젠가 '왜 이 일정에 고성 일정이 잡혀있지? 금-일 일정을 잘못 등록해 뒀나?'라고 생각하면서 일정을 삭제했던 기억도 있다. 당시 나는 고성을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수-금 일정을 바로 예약해 버렸던 것이다. 그것도 스위트 더블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면 고성으로 떠날 일정을 휘리릭 잡는 것이 나의 오랜 루틴이긴 하다. 특히 이번에 가는 건 독서모임 멤버들을 모시고 가는 것이기에 혼자 있을 시간이 없겠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소개해서 고성에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알게 모르게 신경이 많이 쓰이기 때문에 당시의 나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고성을 많이 갔지만 이번처럼 일정을 아예 까먹고 있던 것은 처음이라 스스로도 당황했다. 여름옷 담을 20인치 캐리어 하나 들고 가게 생겼다. 거기다가 이번 주에 팀원들이 월-화 모두 휴무라서, 수요일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하면 수-목은 바쁘게 일만 할 수도 있다. 차라리 잘 되었나, 그 덕분에 방을 떠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오늘 부랴부랴 쏘카를 빌리고, 버스를 예약해두었다. 큰일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틀 전에라도 미리 알게 되어 다행이다. 만약 내일 문자로 예약 전 알림을 받았으면 놀라서 뒤집어졌을 수도 있겠다.

올해 간 고성은 모두 누군가와 함께 갔던 일정뿐이니 진짜 혼자서는 오랜만에 간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다시 설렌다. 혼자 갔던 고성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 좋았고,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일출도 마음껏 보고 사진도 마음껏 찍고, 겨울은 고성의 비수기라 사람이 없어 한적하니 더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간 못 갔던 가게들을 다시 가야겠다. 좋아하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서 양보했던 나의 행복들을 다시 찾아서 손에 쥘 기회가 될 것 같다. 리스크가 있어서 같이 가지 못했지만 좋아 보이던 곳들을 새롭게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더니, 까먹고 있다가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해야겠다. 이제 곧 고성에 간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되는 마음은 2년이 넘어도 여전하다. 참 다행이다.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좋아할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