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고성 여행 요약기
지난주 고성에 다녀왔다. 왜 이리 다녀와도 매번 부족한 느낌이 드는지. 오래간만에 길었던 4박 5일의 고성 여행기를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
1일 차
늘 그렇듯 새벽 동서울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이른 아침 속초시외버스터미널로 도착했다. 이제는 쏘카를 빌리러 가는 길이 눈에 꽤 익었다. 길치인 나에게는 장족의 발전이다. 이번에 빌린 차량은 캐스퍼, 얼른 차를 몰아서 맹그로브로 향했다.
맹그로브에 도착하자마자 워크라운지에 앉아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심도 거르고 오후 미팅을 준비했다. 미팅을 당일에 준비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워낙 실시간으로 변동이 되는 사항이 많아 미리 준비하면 골탕을 먹기 일쑤다.
3시에 되어 스위트 객실로 올라갔다. 맹그로브에 딱 하나 있는 더블 스위트 룸은 객실 중에서 유일하게 주방이 갖춰져 있다. 거기에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인 리튼과의 콜라보가 진행되고 있어서 객실 곳곳에서 제품을 체험할 수 있었던 건 물론이고, 예쁜 도어 매트와 책갈피까지 선물로 받았다.
미팅을 끝내고도 정리를 하느라 7시가 다 되어 노트북을 덮었다. 하필이면 수요일, 원래도 휴무가 많은 요일이다. 수요일 그 시간에 교암리에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녹원식당에 재빨리 포장 주문을 넣었다. 다행히도 7시가 라스트오더였기에 주문을 받아주셨고 좋아하는 가오리찜을 포장해 왔다. 당연히 반도 채 못 먹고 배가 불러버렸다. 왠지 평소보다 가오리가 더 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잠깐 휴식을 취하려다가 불을 켜둔 채로 선잠이 들었다. 그 덕분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새벽에 일어나 바다에 뜬 고기잡이 배들을 구경하며 일을 했다.
2일 차
6시 50분쯤, 일하다 고개를 들었는데 창밖에 푸르스름하고 불그스름한 빛들이 수평선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후다닥 패딩만 걸쳐 입고 바닷가로 뛰쳐나갔다. 바닷가에서 바라보니 7시가 넘었음에도 내 객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요 몇 번의 방문 동안 해가 보이다 말다 했는데 이번엔 확실하게 둥근 해가 떠올랐다.
해는 생각보다 금방 떠오른다. 그 잠깐 사이에 딴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럴 땐 음악도 듣지 않고 해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 나의 루틴이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를 잘 마무리하게 해 주세요. 다가오는 내년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모든 것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원하지 않는 것에도 순응하는 법을 배우게 해주세요. 소중한 사람들이 부디 건강만 하게 해 주세요. 12월을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 시기를 준비하는 기도를 읊조리고 나면 번뜩 깨닫는다. 시간은 나의 흐름과 상관없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다음 날은 라운지에도 내려가지 않고 객실에서만 일을 했다. 그러다가 답답한 일이 있어서 주변에 노을을 볼 수 있는 카페를 찾아 나섰다. 저번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봤던 스위밍터틀로 향했다. 전면 통유리 창에 계단식이라서 바다와 하늘을 보기에 참 좋은 곳이었다. 구름에 노을이 잠깐 보이길래 재빨리 루프탑에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빈브라더스의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고성 부동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방문 예약을 했다. 매물이 많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볼 수 있으니 내일 아침에 오라고 하셨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반숙란과 어묵, 닭발을 사가서 객실에서 끓여 먹었다. 폴인에서 박찬용 에디터님의
강연을 들으며 나의 좀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다음 날은 멤버들이 오기로 한 날이기도 했고, 체크아웃도 해야 했기에 빨리 잠에 들었다.
3일 차
체크아웃을 하려고 준비하면서 일출을 틈틈이 구경했다. 맹그로브 고성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객실에서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장점을 120% 누리면서 아침을 보냈다.
부동산으로 가는 길에 어색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도 잘 가지 않는 부동산을 보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도착해서는 조건과 평수를 확인하면서 두 곳의 아파트를 구경했다. 워낙 잘 알고 있는 단지였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보았다. 다른 부동산의 실수로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있었지만 웃어넘겼다. 차를 다시 몰고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 트리니티로 가서 혼자 공간을 누렸다. 바닷가 모래사장엔 갈매기 수십 마리가 일렬로 파도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정신없는 업무 전화를 받고 나면 기가 빨린다. 12시 30분이 되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정신을 다잡으며 일을 쳐냈다.
점심이 되어 지아 님이 도착했다. 교암리를 둘러보실 수 있게 도보로 걸어 점심 식사 할 곳을 찾기로 했다. 원래 카레노카레를 가려고 했지만, 1시가 되기도 전에 이미 재료 소진으로 인한 조기 마감 안내가 붙어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식당으로 향했다. 한치튀김과 철판볶음을 먹으며 서로의 근황을 나눴고, 다시 걸어서 맹그로브로 돌아왔다.
갑자기 잡힌 줌미팅이 하나 있었다. 그 줌미팅을 하기 전에 폭탄 같은 메시지들이 날아오는 바람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내고 미팅을 최대한 빠르게 마쳤다. 평소 한 시간짜리 미팅이 두 시간이 넘곤 하는데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이유는 세리님이 곧 속초로 도착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아 님도 초행이라서 가급적 내가 가는 것이 2% 정도 나았다.
시외버스터미널은 언제나 붐비고 주정차도 금지되어 있다. 시간을 잘못 맞춰 나왔고, 금요일 퇴근길에 걸려서 도로가 혼잡했다. 평소보다 위험했던 순간을 몇 번 겪고 정차를 하지 못해 시내를 뱅뱅 돌고서야 세리님을 만날 수 있었다. 딱히 배고픈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슬로우댄스로 향했다. 이번엔 시그니처 메뉴인 고사리파스타를 먹었다. 저번에 먹었던 야채구이와 왜 있는지 모를 메뉴인 교자도 시켜봤다. 역시나 다 맛있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은 시간보다도 훨씬 더 한참을 떠들다가, 아야진으로 가서 밤바다를 잠깐 구경했다. 내일 갈 코스를 정하고, 숙소에 앉아서 내가 가져온 김제의 생막걸리와 세리님이 가져온 도쿄의 과자를 깔아 두고 수다를 떨었다.
4일 차
전날에 이미 일출항해가 어려울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뒤였기에, 이 날 아침 일출은 천학정에 가서 보기로 했다. 6시 40분에 나와서 천학정으로 향했다. 왠지 해가 예쁘게 잘 뜰 것 같아서 재빨리 두 분을 모시고 다시 숙소 앞바다로 돌아왔다. 일출을 보면서 따로 챙겨 온 그림책을 보면 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돗자리는 없었지만 요가매트가 있어서 2개를 겹쳐 깔고 셋이 나란히 앉았다. 지아 님과 세리님을 떠올리며 추렸던 '작지만 강한 /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 겨울과 음식을 주제로 한' 3가지 테마의 그림책 6권을 깔아 두고 번갈아 가며 읽었다.
그림책을 읽다 보니 해가 빼꼼 보이기 시작해서, 잠깐만 고개를 들고 일출을 보시라 말씀드렸다. 생각보다 해가 빠르게 떠오르니 지금은 충분히 보고 즐기시라고. 일출은 매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멤버 분들에게는 동그랗고 선명한 해가 떠올랐으면 했다. 그리고 그 염원은 여행 내내 이루어졌다. 그림책을 다 읽고 나서 아침 시간은 자유롭게 보냈다.
세리님과 지아 님은 카레를 무척 좋아하셨다. 카레에 대한 큰 애정은 없지만 카레노카레를 오픈런하기로 했다. 20분 전에 갔는데 이미 한 커플이 기다리고 있었다. 11시에 문이 열리자마자 착석해서 순서대로 음식을 받았다. 카레노카레와 버터치킨카레, 감자사라다, 반숙란과 음료가 다였기에 별로 고민할 것이 없었는데도 한참을 고민했다. 우리는 모두 카레노카레를 먹었고 감자사라다를 하나 시켜 나눠먹었는데, 카레도 맛있었지만 감자사라다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자카야를 가면 사라다를 시켜 먹는 걸 좋아한다. 여기 감자사라다엔 들기름과 핑크페퍼가 들어가서 그런지 맛의 임팩트가 있었다. 공간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도, 접객하는 태도도 무척 좋았다. 사장님이 도루묵축제가 열리는 것을 아냐고 해서, 마침 그 축제에 가려고 한다니 반가워하셨다.
카레를 먹고 북끝서점에 들렀다. 우리가 들어온 후에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해 금세 서점 안이 북적거렸다. 전에도 어느 한 장면과 전시를 할 때 유심히 레퍼프레스 카드를 본 적이 있다. 이번에 나온 크리스마스 카드를 큰 마음먹고 샀다. 그림책 두 권을 더 들였다. 지아 님도 세리님도 모두 한 권씩은 사서 들고 나왔다. 독립서점에 갈 때면 작가와 서점을 모두 응원하는 마음으로 꼭 한 권이라도 사서 나오려고 한다. 사장님들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 시간에 그 책을 그 장소에서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훨씬 책임감을 가지고 서점에 들어가는 편이다.
숙소로 돌아와서 테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도착했을 땐 사람이 많지 않았다. 타르트는 잠시 쉬어가는 시즌이었지만 스콘이 있었다. 평소 자주 먹는 과테말라가 솔드아웃이라 에티오피아를 시켰다. 카운터에 쿠폰이 갑자기 눈에 띄어 그동안 받지 못한 도장들이 눈에 스쳐갔다. 3개의 도장을 받아와서 쿠폰을 소중하게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아까 북끝서점에서 산 그림책을 바로 읽어보았다. 해에 관련된 그림책이 하나 있었는데, 마침 햇살이 정말 좋은 자리에 앉아있어서 어울렸다. 앉아 있는 내내 세리님과 지아 님 뒤로 햇살이 쏟아졌다. 나른한 분위기에 테일이가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너무 늦지 않게 도루묵 축제 현장으로 향했다. 오호항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가는 길에는 송지호 호수에 잠깐 들러서 혼자 있을 땐 절대 찍을 수 없는 날개 포토존에 앉아 기념사진을 남겼다. 오호항은 도착했을 때 이미 만차였다. 간신히 주차를 하고 나서 들어가 보니 꽤나 본격적인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초대가수분의 열정적인 맨발 무대 앞으로 온갖 먹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도루묵과 양미리, 새우를 묶어 내어 주시는 세트가 30,000원이었다. 불과 자리도 포함된 가격이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직접 구워 먹어야 한다는 게 내 흥미를 자극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금게라면과 오징어순대까지 시켜서 한상을 차렸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릇과 젓가락이 수시로 날아갔다.
한참을 떠들고 있는데 지아 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건너편 테이블의 누군가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세상에, 일준 사장님이었다. M을 할 때 메인 제작 공장의 사장님이셨고, 나와 2년 가까이 붙어서 일했던 사장님이셨다. 일준 사장님의 따님인 하연님도 나와 같이 팀으로 일했었다. 출산으로 퇴사하신 이후에도 밖에서 몇 번을 봤는데 나도 퇴사한 이후로는 연락이 뜸했다. 그때도 일준 사장님이 강원도 어디론가 가실 거란 걸 알고 있었는데 그게 지금 생각해 보니 고성이었던 것 같다. 사장님을 얼싸안고 잘 지내셨냐며 폴짝 뛰면서 어떻게 여기에 계시냐고 반갑게 인사했다. 사실 그 이야기는 내가 일준 사장님한테 들었어야 하는 소리였다. 듣고 보니 일준 사장님이 정착한 곳이 바로 오호리 어촌계였고, 사장님은 지금 집 근처 마을 잔치에 온 셈이었다. 그런데 거기 내가 그것도 하필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있었으니, 사장님이 사실 나보다 더 놀라셨을 것이다. 서울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여기 있었으니.
그렇게 감정 표현이 크지 않은 일준 사장님도 그땐 너무 반가웠는지 하연님께 바로 전화를 걸어서 앤이 여기 있다며 흥분해서 전화를 주셨다. 그때 영어 이름을 써서 나를 앤이라고 꼬박꼬박 부르셨었는데, 아직도 나를 보면 예지가 아니라 앤이라고 하시는 것이 왠지 뭉클했다. 극구 사양하는데도 막걸리에 도루묵찌개까지 막 사다가 안겨주셨다. 집이 근처였던 덕분에 하연님도 금방 아이를 데리고 나와주셨다. 나와 헤어질 땐 첫째가 뱃속에 있었는데, 어느새 16개월 둘째까지 있었다. 하연님도 서울에 살기 때문에 고성에 항상 있는 건 아닌데 하필 저번 주에 내려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연과 우연의 일치였다. 이 세 사람이 여기서 다시 만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좋았던 기억만 있는 사람들을 오랜만에 다시 보니 마음이 간질거렸다. 서울로 돌아가서 하연님이 계신 곳에 놀러 가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내가 그렇게 예전의 추억을 마주하는 사이에 우리 테이블에서 세리님과 지아 님은 도루묵을 처음 먹어본다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바람도 불고 생선은 생각처럼 바싹 구워지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나중엔 직화로 굽기 시작했는데 훨씬 나았다. 무대에서는 노래자랑이 열리기 시작했고, 참가자의 기량을 내 멋대로 심사하며 깔깔거렸다. 그 사이에 일준 사장님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셨다. 고성에 올 때 다시 연락드리기로 하고 보내드렸다. 그 많던 도루묵과 양미리를 어찌어찌 다 먹었다. 패딩과 머리카락에 온통 생선냄새였다. 우리는 붕어빵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쉬다가 7시쯤에 그래도 뭘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바깥으로 나왔다. 시월에 갔었던 해광호 횟집으로 향했다. 저번에 갔을 때 매운탕, 밑반찬을 먹고 어머님 솜씨가 좋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소개할 때 자신 있었다. 처음엔 기억이 안 나더니 자리에 앉아마자 기어코 돌삼치를 기억해 내서 이번에도 돌삼치를 받았다. 돌삼치철이 곧 끝난다고 하셔서 그전에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저번과 다른 바다 나물들이 자리를 채웠고, 양미리 구이를 3시간에 다시 만났다. 배불러서 더 들어갈 자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모둠 회는 물론이고 매운탕도 알차게 다 먹고 마감 시간이 다 되어 나왔다.
어제처럼 저녁에 수다를 떨다가 세리님은 10시가 넘어 방으로 돌아가셨고, 지아 님과는 자정까지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지아 님의 신기한 팀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끔 이해하기 힘든 대상이 있을 때 저 사람의 복잡한 사정에 대해 떠올려보곤 한다. 왜 저 사람은 현재에 저런 모습이 되었을까, 과거에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우리가 잊었을 뿐이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잘못을 안 했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실수한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제나 상처와 트라우마가 그 사람의 모습을 바꾸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굴레를 한 번쯤은 끊어줘야 한다. 그런 역할은 언제나 선배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연차가 낮을 때 우리를 키워준 선배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기면 알려달라고 당부하고 밤의 수다를 정리했다.
5일 차
전일 밤 수다를 떨 때 나 혼자 작은 오해가 있었다. 광수 선장님께서 일요일 파도가 높을 것 같아서 이미 일출항해를 거절했다는데, 어쩐 이유에선지 나는 7시까지 교암항으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었다. 혹시 우리 때문인가 하다가 그래도 성사가 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광수 선장님이 그 해답을 알려주셨다. 혼자 여행 온 분이 거절당하고도 더블로 비용을 내겠다면서 꼭 항해를 나가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간절함이 광수 선장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일요일의 일출 항해를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너무 편하게 그 덕을 보았다.
일출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수평선에 이미 구름이 두꺼웠다. 선장님도 해는 물론이고 여명도 못 볼 거라며 아쉽다고 하셨다. 우린 당연히 괜찮았다. 먼바다로 나가서 보는데도 여전히 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돌아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니 그 구름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안 될 거라고, 못 볼 거라고 기대를 내려놓고 있다가 마주친 해를 보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내가 봤다고 안다고 해서 모든 일이 그대로만 진행되진 않는다. 해를 보지 못할 것을 알아도 바다로 나간 우리에게 그 장면은 선물 같았다. 가끔은 내 생각대로 말고 일단 그냥 해보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일출항해를 나갈 때마다 느끼는 마음이 그렇다. 세상엔 누군가의 간절함이 부르는 기적도 있고, 비효율적일 것을 알면서도 굳이 해보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 내게 다짐하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너무 효율적으로, 최적화된 인생으로만 꽉 채워 살지 말자고 말이다.
지아 님은 일출 항해에 큰 기대가 없었다고 했고, 세리님은 이틀째 나에게 일출항해를 언제 하는지 물어봤을 정도로 두 분의 태도가 달랐다. 그런데 돌아오니 되려 지아 님이 일출항해의 낭만에 푹 빠져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고, 다음엔 저 깊은 곳에 가서 하는 낚싯배도 꼭 타고 싶다고 하셨다. 왜 항해를 나가는지 알겠다며 광수 선장님의 뉴스 기사까지 찾아보셨더라. 일출항해가 어려워도 꼭 하게 되는 이유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개별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밥을 먹으러 새참칼국수로 향했다.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매니저님들이 항상 1번으로 추천하는 곳이었다. 11시 20분 정도였는데도 거의 2 테이블 밖에 안 남은 상태였다. 비빔밥 하나와 들깨 칼국수 두 개를 시켜서 먹는데, 고성 음식들은 왜 이리 다 맛있나 생각했다. 계속 먹어도 평생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맛이었다. 다음부턴 아침 메뉴로 꼭 새참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아 님과 세리님에게 새참칼국수가 이번 여행에서 두 손가락에 꼽는 맛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시 매니저님들의 추천을 틀린 적이 없다.
태시트와 글라스하우스를 고민하다가 지아 님이 번투드웍스를 가고 싶다고 하셔서 글라스하우스로 향했다. 강아지는 없었지만 별채에서 아늑하게 수다를 떨었다. 우리 모임의 방향성에 대해서 내가 걱정하는 점들을 털어놓자 두 분은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냐며 괜찮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역할은 하방을 방어하는 역할이겠구나 생각했다. 누구나 이 모임에서 최소한의 선을 넘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 이후는 멤버들에게 맡기는 것. 그리고 운영 또한 너무 관성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후기에 합류했던 멤버들에게 생기는 어려움 같은 것들을 더 잘 챙겨야 한다고.
수다를 한참 떨다가 번투드웍스에 갔는데 들어가는 길에 메뉴판에 딸기파이가 있는 것을 보고 카페에 처음으로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마당에서 파이를 먹고 있는 팀이 있었는데 시키지 않을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방금 카페에서 나왔지만 1인 1파이를 하기로 결정하고 자리를 잡았다. 나는 쇼콜라 파이를, 지아 님은 애플파이를, 세리님은 딸기 파이를 하나씩 골랐다. 파이를 먹어보니 지금까지 번투드웍스를 오면서 이걸 왜 몰랐지, 할 정도로 맛있었다. 멤버들과 있을 때 새롭게 하게 되는 경험에서 되려 배우는 것이 많다고 늘 생각한다.
차를 가져온 지아 님을 서울로 먼저 보내드리고 세리님을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드렸다. 시간이 조금 애매했는데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속초의 소설. 원래 이틀차 일정이었지만 원래 여행은 일정이 바뀐다. 혼자서라도 가고 싶어서 시간을 내 찾아갔다. 멋진 사장님과 아늑한 자리에 앉아 있으니 좋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 공간을 좋아할 사람들을. 나는 자리에 앉아 몇 개만 수정할 생각으로 모임의 공지 노션 페이지를 열었다가 갑자기 데이터베이스의 자동화 표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거의 한 시간 반을 써 버렸다. 바보같이 공간을 더 즐길 생각보다 모임 공지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시 와서 공간을 온전히 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도 계속 노션 페이지를 만지다가 너무 늦어질 것 같아 전체 공지를 진행했다. 멤버들이 이 페이지를 어떻게 볼까 걱정이 된다. 어쩔 수 없는 나의 특성 같은 것이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앞선다. 그러나 그게 정답은 아니다. 내가 내 만족에 하는 것들에 놓치는 것들이 생기지 않도록 항상 점검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도영님이나 멤버 분들이 솔직한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그게 미숙한 파트너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돌아온 서울 자취방에 누워서 고성에 대한 글 하나를 썼다.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좋아하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 글이었다. 고성에 다녀오면 그렇게 쓰고 싶은 마음이 채워진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쓰는 것, 그것이 고성 여행의 마무리가 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