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히 안녕히
외할아버지가 길고 긴 여행을 떠나셨다. 목요일 아침 언니로부터 불현듯 연락이 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정신없었지만 3일 치 짐을 싸서 내려갈 채비부터 했다. 평소에 그리 잘 보이던 검정 옷들이 왜인지 도통 보이지 않아 카디건을 챙겼다. 입을 만한 검은색 바지도 여의치 않아 눈에 보이는 여름용 슬랙스를 가방에 구겨 넣었다. 배낭에 짐이 한가득이었지만 잘도 매고 버스를 올라탔다.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고 올라올 땐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이걸 내가 어떻게 매고 갔더라 궁금해질 정도였다. 버스에 타 이동하면서는 중요한 일정과 모임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이번 주는 금요일과 토요일에 정말 중요한 일정이 연이어 있었다. 각 일정에 필요한 물품도 모두 내가 가지고 있었기에 소식을 알리고 오전과 오후에 걸쳐 을지로, 동대문과 판교로 퀵을 부지런히 보냈다. 평소엔 본가로 바로 갔겠지만 언니와 같이 움직여야 했기에 화성으로 갔다. 가는 길도 왜 이리 길고 막히는지, 평소보다 곱절로 힘들게 진을 뺀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엄마는 이미 이른 새벽에 아빠의 옷까지 다 챙겨서 직장으로 일찍 출근하셨다고 했다. 상황이 이후 어찌 되든 그 새벽에 걸려 온 첫째 외삼촌 전화에 어느 정도 직감하셨다. 이번에는 무조건 진주로 내려가야 할 것을. 소식을 들은 아빠가 엄마에게 달려오는 동안, 엄마는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선생님들이 필요할 것들을 미리 직장에 챙겨두었다. 그리고 엄마는 홀로 있다가 외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통화로 들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때 엄마와 통화한 언니가 울었다고, 아이들이 나중에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전화를 하며 우는 엄마를 본 일이 처음일 것이었다. 응, 슬프면 엄마가 울 수도 있어.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나도 우리 엄마가 우는 것을 이번 일을 겪고서야 처음 보았으니까. 엄마가 그런 모습으로 우는지 나도 몰랐으니까.
나와 언니와 형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진주로 내려갔다. 탈 자리도 없어서 트렁크 의자를 열고 세 시간을 넘게 쭈그려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외삼촌들과 아빠를 뵙자 엄마가 뒤따라 나왔다.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을까 봐 걱정했으나 엄마는 조금은 괜찮아 보였다. 제대로 자지도 못한 엄마가 상복을 입고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었다. 엄마 괜찮냐는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저 엄마 왔어요, 하곤 외할아버지 영정 사진을 뵈었다. 할아버지는 꽃 속에서 환하게 웃고 계셨다. 항상 집에 들어서면 왔나, 하고 웃으시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파서 살이 빠지시기 전에 정정하던 그 얼굴을 다시 뵈었다. 외할머니는 작은 옆방에 앉아계셨다. 할머니는 예전처럼 여전히 왔나, 아(이)들 데리고 오느라 욕봤다 하셨다. 할머니의 인사는 그대로였다.
지하 장례식장엔 다른 분들이 없어 우리가 전세를 낸 것처럼 사용했다. 어른들의 직장, 모임, 교회 등에서 보낸 화환이 복도를 꽉 채웠다. 아이들이 지루해하면 복도에 나가 뛰어놀게 했다. 손님이 오시면 누구신지도 모르면서 우리 엄마 작은 딸이라며 인사를 했다. 엄마는 수원으로 올라온 지가 꽤 되었으므로 다들 자주 보지 못했기에 어른들이 유독 반가워했다. 아빠의 형제 분들, 그러니까 나에게는 친가 어른들이 오시기도 했다. 언니의 결혼 이후로 친가와 외가가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처음이었다. 어른들을 진주에서 뵈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손님들이 하나 둘 돌아가시면 바닥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놀 것이 없어 지루해하면서도 평소보다 사람이 많이 모여있으니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나와 언니와 형부가, 아빠와 사촌들이 돌아가며 놀아주었다. 오후가 넘어가자 아이들이 사소한 것으로도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리를 더 지키고 싶었으나 아이들 때문에 그럴 수 없어서 언니와 어린 사촌들을 챙겨 먼저 자리를 떴다.
종종 문을 오갈 때 오른쪽 모니터에 외할아버지 이름 밑으로 우리 가족들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그런 일은 좀처럼 없었으므로 나는 모니터에 띄워진 화면이 꽤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가끔 외손주 옆에 놓인 세 글자가 내 이름이 맞나, 몇 번을 읽어봤다. 역시 어색했다. 그간 양가 조부모님이 다 살아계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에겐 이런 일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일들이 많았으나 앞으로 3번이나 더 겪어야 하므로 잘 알게 될 일이기도 했다. 슬프게도 지금보단 많이 익숙해질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왜 웰다잉 그림책을 공부하고 있었는지 장례식장에서야 처음 들었다. 외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오랜만에 수원으로 갔을 때 엄마 방에 꽂혀 있던 죽음에 대한 그림책들, 일주일에 두 번씩 줌으로 공부하던 모습들. 그게 언젠가 외할아버지를 보낼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었다는 것을. 엄마는 너무 늦지 않게 외할아버지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림책 보고 있었던 거야? 응, 잘했네. 그게 말주변이 좋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였다. 내가 그림책을 보며 빛을 얻는 동안 엄마는 어둠을 보고 있었다.
견뎌내야 하는 일정들이 많았다. 마지막 모습을 뵙는 것도, 발인도, 유골함을 모시는 일도. 다들 꾹꾹 참으시다가도 가끔은 참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할아버지, 평안히 가세요 그렇게 수없이 되뇌었다. 가는 길에 울음소리를 듣더라도 너무 슬퍼하시지는 말라는 의미였다. 원체 감정의 폭이 큰 언니는 아이들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저 말없이 서서 엄마 등을 두드릴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함을 넣고 나오는데 외할아버지를 모신 곳 바로 위칸에 그저께 여행을 떠난 것으로 보이는 95년생 여자친구가 보였다. 인생네컷 사진 속에서 너무 환하고 예쁘게 웃고 있었다. 눈을 돌렸는데 여행을 떠난 아기의 장난감 자동차가 보였다. 눈으로 세어보니 세상에 머물다 간 시간이 고작 1년이었다. 1년이면 너무 예쁠 때인데. 조카의 손을 잡고 건물을 나올 때 울컥했다. 나는 앞으로 외할아버지를 뵐 때마다 그 둘을 위해 함께 기도할 것이었다. 그리고 종종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때 외할아버지의 얼굴과 그들의 이름을 같이 떠올리겠지.
올라오는 길엔 눈이 펑펑 내렸다. 다른 날과 다르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식이 끝나고도 할 일이 많았다. 짐과 사진을 정리하고, 행정 절차도 밟아야 했다. 유산도 이야기하고 앞으로 홀로 남는 외할머니와도 여러 가지를 의논했다. 그러고도 어른들은 한참을 모여 답례품을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금까진 슬픈 일보다 기쁜 일에 대한 답례품을 많이 받았지만 이젠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겪으니 위로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는 그 한 문장이 이제는 쉽게는 읽히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장례식 첫날부터 진주까지 달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위로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들을 위해 우리 가족은 늦은 시각까지 문을 연 가게에서 마지막 픽업을 하고 본가로 돌아왔다. 엄마 아빠는 3일간 쉬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했다. 토요일 저녁이었으나 모두가 쏟아지듯이 일찍이 잠이 들었다. 내일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나 한편으로는 영원히 바뀔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