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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Oct 18. 2023

해치움과 채움


• 해치우다:
1. 어떤 일을 빠르고 시원스럽게 끝내다. 2. 일의 방해가 되는 대상을 없애 버리다.

• 채우기:
1. 일정한 공간에 사람, 사물, 냄새 따위를 가득하게 하다. 2. 정한 수량, 나이, 기간 따위가 다 되게 하다. ‘차다’의 사동사. 3. 만족하게 하다.


32명. 10월 21일 올림픽공원에서 열리는 펜싱 대회에 참가하는 1-2학년 남자 에페 선수인원수다. 여름 대회들의 약 4배 인원이다. 게다가 대회를 앞두고 다들 열심히다. 호제도 긴장했는지 몇 주 전부터 자꾸 묻는다. 등교할 때 나와 통화하는 전화의식에 펜싱 대회 질문이 몇 주 째 반복 중이다.


“나 누구랑 붙어?“


“대진표는 그날 알 수 있을 거야. 아직 시간표도 안 나왔어.”


“엄마, 예선전에서 쉬운 상대만 만나면 바로 예선 통과야. 아 좋겠다. 난 누구랑 붙을까? 엄마, 내 생각엔 그 친구는 예선 통과를 할 것 같아. 공격을 좀 하긴 하더라고. (계속 말하는 중) 엄마, 근데 나 이제 그만 말해야겠어. 학교 다 왔어.”




질문의 시작은 항상 이거다.

”엄마, 나 펜싱에서 누구랑 붙어? 누구 형 나와? 누구 형이랑 붙을까?”


언젠가부터 나도 똑같이 반복적으로 대답했다.


”호제야, 누가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엔 누구랑 싸울까? 결국 나야. 힘든 팔을 지탱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거, 바로 나야.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에 집중해 보자. “


호제가 몇 번의 대회를 나가더니, ‘대진운‘을 알았나 보다. 좋은 운이 온다고 전부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때가 오겠지.


내일 아침 또 질문을 하겠지. 귀여우면서도 이제는 제발 시합을 빨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리고 나도 궁금해졌다. 대진표가.






호제가 선생님과 얘기하고 한글날 개인 레슨을 하기로 정했다고 얘기했다. 한글날 오후에 단체수업 하는 건 나랑 얘기를 해서 알고 있었다.


”호제야, 한글날 아침에 레슨 받을 거야?”

“응, 나 레슨 하기로 했어.“

”오후에도 그룹수업 하는데 괜찮겠어?“

”응, 할래.“


결국 정말 한글날 연휴 아침 10시 수업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호제가 말했다.


“엄마 나 토요일에도 레슨 하면 안 돼?”

“방금 수업 힘들었지 않았어?”

“힘들었지. 그래도 재밌었어.”


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150분짜리 그룹수업을 하러 갔다.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두 모여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호제가 말했다.


”엄마, 나 수요일에도 펜싱 하러 가면 안 돼?“


수요일 저녁은 다른 날보다 상대적으로 숙제가 많은 편인 날이다. 집중하면 금방이지만 호제는 힘들면 쉬어가고 표현해야 하는 아이다.


스스로 먼저 하겠다는 마음이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가던 수업을 월요일 한글날부터 화, 수, 금, 토까지 주 5회를 대회 전 주에 하는 꼴이다. 체력 관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도 본인이 경험해 봐야지 깨닫겠다 싶어 하겠다는 마음을 따랐다.




드디어 토요일이다. 숙제도 살짝 하고, 비염으로 이비인후과도 방문하고, 심지어 축구도 50분 뛰었다. 호제가 좋아하는, 인테리어가 곱게 된 식당에서 안심 돈가스를 먹었다. 우리 테이블 양 옆으로 연인이 앉아 사랑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용실에 들러 호제 머리도 다듬었다. 드디어 펜싱클럽 가는 길이다. 걸어서 이동하는 3분 동안  우산을 썼음에도 비에 쫄딱 젖었다.


호제는 젖은 옷을 벗고, 펜싱복으로 갈아입었다. 드디어 레슨 시작이다.


‘어랏. 호제의 집중력 어디 갔지. 열정을 뿜어내더니, 축구 가기 전에 레슨을 하는 게 체력 배분에도 좋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 힘이 빠졌나. 개인 레슨을 보니 알겠군. 시합 때 나오는 독기가 펜싱클럽에서는 안 나오는군.’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집중”이라는 말이 잦아졌다.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못하는 건 넘어갈 수 있지만, 자기 능력치를 최대한 쓰지 않는 태도는 용납할 수 없었다.


호제를 불러 낮은 목소리로 (열받은 티가 났겠지만) 최대한 좋게 얘기하려고 노력하며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호제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사포로 말했다.


“호제야, 호제가 하고 싶어서 시간과 돈을 따로 들여왔잖아. 시합 가서 으르렁 거리지 말고, 지금 형아들이랑 붙는다고 생각하고 해 봐. 이 시간을 잘 쌓는 건 호제가 스스로가 하는 거야. 잘할 수 있어. 집중해 보자.”


선생님의 지도력으로 호제는 수업을 무사히 마쳤다. 꽤나 힘드시지 않으셨을까 짐작해 본다. 나였다면 뭐라했을 타이밍인데 초1 맞춤형으로 수업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또다시 감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물었다. 그리고 얘기했다.


“호제야 오늘 많이 힘들었어? 시간과 돈을 쓰며 온 수업이잖아. 선생님은 식사도 못하시고 호제한테 뭐라도 더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잖아.  레슨은 호제도 집중하며 선생님과 같이 만들어 나가는 시간이야. 선생님 혼자 할 수 없어. 호제도 집중을 잘해야 선생님도 뿌듯함을 느끼고, 호제도 얻는 게, 쌓는 게 많지. 수업한 횟수만 중요한 게 아니야. 얼마나 집중했느냐도 중요하지. 다음번에는 그렇게 해보자.”


역시 가만히 듣는 호제가 아니었다.

“그런 얘기할 거면 얘기하지 마!”


“(긴급하게) 아니 어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연습할수록 자세가 나아지더라! 정말! 토요일도 레슨 하겠다고 호제 스스로 마음을 먹는 모습을 엄마는 매우 멋지다고 생각해. 열심히인 호제에게 엄마아빠도 정말 본받고 있고. 열심히 잘해보고 싶은 마음. 멋져! 하이파이브!  (포옹 꼬옥)“


호제는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시합 전 주 월화수금, 토요일 레슨까지 호제는 전력을 다했다.






수업 횟수 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열심히 해보겠다는 마음 역시 대견하고, 실제로 행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이따금 행동을 해치우는 마음으로 임할 때가 있다. 나의 주특기기도 하다. 해냈다! 를 느낄 수 있긴 하다. 그런데 해보니, 해치우는 마음은 그 즉시 시원함을 안겨주기는 하지만, 사안에 따라 남는 게 없을 때가 종종 있다. 행동했다는 건 분명 남았지만 말이다.


오히려 만족감을 얻는 채워가기를 할 때, 남는 게 훨씬 많았다. 그다음과의 연속성도 있었다. 호제가 수업 출석 횟수로 노력했다고 생각하기보다, 불안을 잠재우기보다, 시간의 질과 본인이 만들어가는 가치를  조금이라도 알기 시작했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해치움과 채움에서 채움의 경험이 켜켜이 쌓여 삶의 자산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아하! 하고 깨닫게 되는 때가 언젠가는 올 수 있을 테니.



채움의 경험이 켜켜이 쌓여
삶의 자산이 되길 바라는
어미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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