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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Oct 26. 2023

7.5cm의 간극: 세상은 공정할까?

• 공정(公正): 공평하고 올바름
• 공평(公平):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
• 규정(規定): 1. 규칙으로 정함. 또는 그 정하여 놓은 것. 2. 명사 내용이나 성격, 의미 따위를 밝혀 정함. 또는 그 정하여 놓은 것. 3. 명사 법률 양이나 범위 따위를 제한하여 정함.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걸 알았겠네. 빠르게 알수록 좋아.“


호제의 서울 펜싱경기 후기를 듣고, 말랑 할머니가 한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함께 가보시죠.






8강에 호제가 안착했다. 피스트에 선수들이 올라섰다. 그런데 경기 시작을 안 한다. 각 선수의 선생님들이 심판과 무언가 얘길 나눈다. 심판은 운영석을 가기도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몇 분 뒤, 경기는 시작했다.

플렛! 알레!


경기 시작 후 약 20초가 흘렸을 무렵, 두 선수는 동시 공격에 들어갔다. 불은 상대편 선수에게 켜졌다. 2층에서 1층 경기를 봄에도 불구하고 상대 선수의 칼 휘어짐이 꽤 커 보였다.


찔리고 난 뒤, 호제는 뒤를 돌아 선생님들을 쳐다봤다. 짐작하건대 동시타를 기대했던 듯하다. 꽤 가까운 거리였으니까.


호제는 두 번을 더 찔리고 난 후, 1점 득점을 했다. 1:3의 상황. 호제는 팔을 쭉 펴고, 칼을 힘껏 내뻗고 스텝을 밟았다. 점수를 내려고 팔을 뻗고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결과는 호제의 뚜슈. 호제가 찔렸다. 1:5, 1:6까지 갔다.


상대편 선수가 공격을 해온다. 한 번은 호제가 피했다. 다음은 같이 공격을 했다. 호제의 뚜슈. 호제가 찔렸다. 1:7. 1세트가 남은 몇 초의 시간 동안 호제는 발을 빠르게 움직이고 찌르려고 손을 뻗고, 또 뻗었다. 득점 없이 1세트가 끝났다.






2세트가 시작했다. 8강 2세트 시작과 동시에 왼쪽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오늘 예선부터 16강, 8강 1세트까지는 힘이 빠졌던 왼팔이었는데 말이다.


호제의 뚜슈로 8:1, 동시타(에페는 동시에 찌르는 것이 인정된다)로 9:2, 동시타 10:3으로 8강 경기가 끝났다. 각자의 자리에 서서 펜싱칼로 인사를 했다. 칼 인사가 끝나자마자 호제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상대편 선수에게 다가갔다.


손 악수를 하려고 갔던 거였다.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씩씩거릴 모습, 금방이라도 울 모습이 선한데, 이긴 선수에게 인사하겠다고 다가는 마지막 모습에 뭉클하기도, 대견하기도 했다. 많이 컸다, 호제.


하지만 여전히 어린 초1 꼬꼬마인지라 뒤돌아 원장님께 가서는 얼굴을 품고 몸을 기댔다.


원장님 품에 안긴 호제 (photo by Hannah You)



2층 대기석으로 호제와 선생님이 올라왔다. 선생님 얼굴은 유난히 벌게져 있었고, 호제는 화난 울상이다. 선생님이 전하는 말에 나는 당황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상대가 긴 칼을 가지고 나왔더라고요.”


“네?!”


“저희가 이의제기를 했는데, 협회 규정이 바뀌어서 갖고 와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모든 게 이해됐다. 낯선 경기 전개에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던 터였다. 예선전 중 졌던 경기는 패한 이유가 바로 보였다. 8강 경기에서는 저 정도의 거리와 속도, 자세라면 동시타가 나올 법한데 왜 안 나올까 싶던 순간도 있었다. 물론 상대의 불이 켜졌으니 호제가 찔렸다는 건 자명하다.






찾아보니 2020년 1월 5일부터 전문선수대회가 아닌 동호인, 생활체육대회에서 에페 종목의 초등학교 1~3학년은 82.5cm 칼을, 4~6학년은 90cm 검 사용을 적용했다. 초등부 엘리트 에페 선수는 82.5cm와 90cm 검 중 선택할 수 있는 단서조항을 달았다.


이후 2023년 4월 15일 대한펜싱협회 이사회에서는 동호인 선수, 전문선수, 학년에 구분 없이 90cm 이하의 칼을 선택할 수 있다고 규정을 바꿨다. 6월 게시글로 등록되어 있었다. 즉, 개정 전에는 같은 길이의 칼을 각자 들고 시합했다면, 이제 누군가는 긴 칼을 들고, 누군가는 짧은 칼을 길고 시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5cm. 긴 칼과 짧은 칼 길이의 차다.

딱 내 검지손가락 길이만큼의 차이였다.






규정 변경의 절차적 정당성은 갖춘 듯 보였으나, 사유의 정당성은 도무지 찾지를 못 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내가 회원 혹은 집행진으로 몸 담고 있는 곳들의 절차를 떠올려보면, 정기 혹은 비정기/임시 총회가 열렸을 거다. 총회 전 혹은 그 자리에서 안건 상정이 됐을 거고, 이사회 의결과 전체 회원 의결인 사안에 따라, 의결 정족수 규정에 따라 통과시켰겠지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했을 테니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보자.


그렇다면 ”왜“ 규정을 바꿨을까의 문제가 남는다.

- 저학년에게 왜 긴 칼을 허용하게 했을까

- 반대로 고학년에게 왜 짧은 칼을 허용하게 했을까 (짧은 칼을 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긴 칼이 무조건 유리하니까)

- 초등학생들도 엘리트 선수와 동호인 선수로 구분하는 걸로 아는데, 칼에서는 왜 구분을 풀었을까

- 2020년 초등부 엘리트 선수만 긴 칼, 짧은 칼을 선택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문제 삼고 아예 경계를 뚫어버린 걸까

- 어릴 때부터 극한 상황을 빠르게 연습하라는 의미인 걸까

- 칼 선택권을 넓히면 저학년 때부터 터 긴 칼과 짧은 칼을 모두 써서 펜싱 검 유통/판매 업체 이윤이 늘어나려나

- 논리의 영역이 닿지 않는 이유 때문이려나




‘스포츠’에서 규정‘은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함일 것이다. 최대한 동일한 조건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스포츠에서 규정이란 건, 모든 선수가 안전한 환경에서 훈련하고 대결할 수 있도록 안전망이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여러 경험치에서 규정이 안전망이 아닌 경계망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규정은 누군가에게 자유를 주기도, 자유를 억압하기도 소수를 위함이기도 하고, 기득권을 강화함이기도, 전체를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규정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에 따라 규정의 범위와 영향력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럼 다시 내 생각의 고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규정일까?로 돌아간다. 상위규정으로 무엇을 참고했을까.


밥벌이로 함께 경기를 참관하지 못한 Y는 문자로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올림픽 규정을 찾아봤다고 한다. 올림픽 규정에는 칼 길이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한 가지로 딱 명시되어 있다고 전했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영역이라면, 지금의 나로서는 나의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논리로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으로 남겨두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럼,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Y와 경기 후일담을 나눴다. 내가 말했다.


“칼 얘기를 듣자마자 큰 칼을 당장 사야겠다 생각이 들었어. 그 생각이 팍! 하고 떠오를 때, 엘리트 선수를 둔 어머님께서 어릴 때부터 긴 칼 들면 애 손목 어쩌냐고 먼저 말씀하시더라고. 뭐가 기본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


Y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릴 때 너무 무거운 칼 들고 반복해서 연습하면 손목  (어떤 부위를 말했다) 힘줄이 굵어져,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알아? 설거지도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리고 칼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기술도 배우고 체력도 길러야지.“


나는 너무 놀라 목소리 톤을 높여 얘기했다.

”뭐?! 그럼 안 되지. 자기가 먹은 거 자기가 치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호제는 지금 쓰는 칼도 무거워하는데, 무리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손흥민 아버지 손웅정 선생님이 한 말이 떠올랐어. 어릴 때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그런데 많이들 경기 결과에만 집중한 훈련을 한다고.”


Y가 뒤이어 얘기했다.

”내가 봤을 때 호제는 펜싱의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난 건 아닌 것 같아. 사람들이 호제의 열심히인 부분을 예뻐해 주시는 것 같아. 우리 호제의 열심히 하는 모습을 끝까지 사랑해 주자. (거실에서 놀고 있는 호제를 보고 외친다) 호제야! 펜싱 재밌게 해!!!!“




일요일 밤, 잠들기 전에 가족이 소파에 앉아 호제의 경기영상을 보며 복기했다. 예선전부터 시작했다. 호제는 신이 나서 순간순간 자기가 했던 생각과 포즈를 풀어냈다.


“내가 이때 페이크를 넣고, 데가제를 넣으려고, 플래시를 하고… 이때 내가 왜 졌냐면… 상대편 선수가 이렇게 올 때…“


마지막 8강 경기 영상을 틀려고 할 때 호제가 시무룩하게 자리를 뜨며 말했다.

“나 슬퍼서 그건 못 보겠어.”

“그래.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 됐구나. 자러 가자!”




8강 경기 전, “나도 메달 따고 싶단 말이야!!”를 외치며, 눈을 감고 파르르르 속눈썹을 떨며 해내겠다는 최면을 걸고 나갔다.


7.5cm 간극을 호제는 뛰어넘지 못했다. 규정을 당장 바꿀 수 없다면, 규정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거나, 규정을 이용하거나, 규정을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거나, 규정과 관계없는 곳으로 가거나.


호제에게 이번 시합에서 칼 규정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나은 실력을 갖겠다는 의지를 뿜었다. 이제 목표는 1위와 3위로만 잡겠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어른으로서의 의무감이 강하게 느껴졌던 대목이었다.


그래, 규정을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면, 어떤 상황이건 극복하게 된다. 하지만 호제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고 싶은 건, 호제가 어떤 구조, 시스템 속에 있는지에 관한 감수성은 꼭 켜놓길 바란다.


규정에 따라 내가 기득권일수도 있고, 내가 소수일 수도 있다. 불합리함 속에 내가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불합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수 있으니까. 그건 좀 없어뵈잖니. 멋, 같이 챙겨보자.



덧,

공개를 할까 말까 많은 고민을 했던 글이다. 여전히

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기도 하고, 글을 읽는 사람에 따라 나의 목적과 다르게 읽히기도 하니까. 그에 따른 영향도 달라지니까. 고민하다가 글을 마무리 짓고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5일 수요일에 참석했던 2023 애드 아시아의 <행동하는 브랜드 - 사회를 변화시키는 광고> 연사인 조시 폴 BBDO 인도 회장의 말에 힘을 얻었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면 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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