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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Feb 02. 2024

불공정함과 결석


호제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퇴근한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묻는다.


“엄마, 나 내일만 펜상 안 가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일‘만’이라고 얘기하는 걸까.

“왜? 무슨 일 있었어?”


“오늘... 어! 어! 어! 펜싱에서 긴 칼팀이랑 붙었어. 우리는 짧은 칼이었어. 엄마! 그건 공정하지 않잖아. 원장님, 너무 한 거 아니야?”


“원장님, 오늘 아주 잘하셨네! 아주 잘 가르치셨어!!! 교육 방법, 딱 좋다. 딱 좋아.”


호제가 눈이 동그래진 채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나 보다.


“호제야, 대회 나가면, 긴 칼 갖고 오는 상대를 만날 수 있어. 연습을 실전처럼 빡세게 해야 대회에서 편하게 할 수 있어. 실전이 연습이 되는 거지.”






호제가 발끈하면서 말했다.

“아니, 그래도 긴 칼을 갖고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다시 알려줬다.

“세상은 불공정해. 그리고 규정이 바뀌어서, 초등학교 1, 2학년도 긴 칼을 갖고 올 수 있어. 규정이 그러면, 아무리 불공정한 것 같아도 어쩔 수 없어. 규정을 지킨 거니까.”


호제가 호흡을 씩씩거리며, 외쳤다.


“그럼, 나도 긴 칼 갖고 갈래!!”

“호제야, 호제 요즘 매일 연습 가는데, 그럼 손 나갈 수 있어. 아빠가 했던 말 기억나지? 설거지 못할 수 있대.


긴 칼 가진 힘센 형누나들이랑 열심히 연습해 둬. 연습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연습해 봐.


그렇게 연습해야지 긴 칼 갖고 나오는 상대를 만날 때, 손쉽게 맞설 수 있어.


칼 길이로 부족하면, 다른 걸로 채워야지.”






규정을 바꿔보자는 말은 아직 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규정까지 바꾸자고 얘기하면 무기력감에 빠지거나, 너무 부담스러워할까 봐. 내 말이 끝나자마자 호제의 기분이 한껏 들떴다. 분명 방금까지 억울함에 상체가 씩씩거렸는데 말이다.


“엇! 엄마!! 그럼 나 그렇게 연습하고, 긴 칼 들게 되면, 내가 제일 잘하겠네?!!!!”

 

짧은 칼임에도 불구하고 긴 칼을 가진 상대를 이기는 연습을 하면, 긴 칼을 가졌을 때 더욱 잘하게 될 거라 상상하며 자신감을 뿜어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그럼 내일도 가야지!!!”

 “좋은 생각이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연습






불공정을 알았을 때. 불공정을 바꾸기 힘들 때. 불공정을 내가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억울하고 답답할 때. 무엇을 해야 할까?


호제가 했던 생각처럼 ‘결석’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먼저 들 수 있다. 때려치워! 때려치워버려!!


쉬운 방법이지만, 나에게도 불공정함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결정은 아니지 않을까. 이런저런 방법을 하고도 도저히 안 되면 때려치우더라도 해볼 때까지는 해보면 어떨까. 살다 보면 더럽고 치사하지만, 버텨야 하는 수많은 경우가 있다. 밥벌이라면 더더욱 쉽게 때려치우기 어렵다.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얻는 게 있을 거다(라고 믿고 싶다).


그럼 어떻게 버티면 좋을까? 호제에게 나의 한 가지 방법을 나누자면, 내가 할 수 있는 걸 더욱 해보는 거다.


일상의 루틴을 더욱 가꾸는 것. 마음과 몸을 가꾸는 의식으로 채워보자. 운동을 하고, 내 자리를 정갈히 다듬고(1일 1 버리기), 나의 마음은 어떤지 질문하고,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하루의 고마운 일들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고마운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단, 불공정함을 잊지 않고 관찰하면서.


뭐야, 뻔하잖아?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상의 힘을 믿는다. 소소함이 쌓이는 힘을 믿는다. 심신의 내공을 쌓고, 실력의 내공을 쌓는 일상. 속이 뒤집히고, 미치고 까무러치며 팔짝 뛸 것 같은 상황에서도 무던히 일상을 살아내는 힘을 쌓는 노력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남을 거다.


호제가 짧은 칼로 연습하며 긴 칼을 이기는 능력을 가지면, 긴 칼을 가졌을 때 최고의 실력을 가지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호제야, 불공정함에 억울하니? 가슴이 답답해오니? 내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니? 불공정함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를 만났니? 불공정함을 빌미로 달콤한 말로 호제를 낚으려는 이를 봤니? 그래서 더 화가 나는 일이 생겼니?


그럴 때, 위에 엄마가 얘기한 거 한 번 해볼까?


그리고 요셉 원장님이 홍천 대회 때 말씀해 주셨던 조언을 떠올려 보자. 원장님의 조언을 따르고 호제는 홍천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요셉 원장님이 헥헥거리는 호제에게 “힘들지?”라고 물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힘든 거 참고 견디며 하는 거야.”


불공정함에 무너지지 말길. 불공정함은 (여러 과정을 거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언젠가는 공정함으로 바뀔 거다. 불공정함이 바뀌지 않는다면, 당사자가 바뀔 거다. 그 무엇이든 바뀔 테니 무너지지 말길. 견디며, 버티며,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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