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내 발은 땅에 내려와 안착했는데, 무언가가 아직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바로 내 뱃살.
‘출렁‘.
이럴 때 쓰라고 만들었나 보다.
파도가 휩쓸고 간 물결무늬 모래사장처럼 갈비뼈가 한 대씩 보일 때가 나도 있었다. 나도 밭 전(田) 자가 배에 새겨졌던 때가 있었다.
여러 이유로 헬스장을 그만뒀다 다시 몇 개월 다녔을 무렵, 코로나19가 퍼졌다. 헬스장을 다시 그만뒀다. 홈트(home training)를 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팬데믹 종식을 고할 무렵에는 매일매일, 말 그대로 매일매일 체중이 치솟았다. 목디스크 증상이 심해지고, 다리까지 저릿해져 왔다. 무엇보다 마음에 안 들었다. 군더더기 많은 내 몸이. 내구성이 떨어진 체력이. 덩달아 내 글에도, 내 삶에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무리해도 타격이 컸다. 이러다 심신이 죽겠다 싶어 직장 근처 헬스장을 찾았다. 나는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헬스장을 다닌 초반 몇 개월은 신기할 정도로 체지방이 쭉쭉 빠졌다. 일주일에 2~3번 정도 운동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노력했다는 건 그렇게 완벽한 클린한 식단은 아니었단 의미다. 그동안 난 얼마나 내 몸을 음식으로 혹사시키고, 운동을 안 했던가.
운동한 지 6개월째, 체지방률이 꽤 낮아졌다. 그 이후로 체지방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고 있다. 하고 많은 상승세 중 체지방률 상승세를 기록하면서.
누구에게나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시기가 찾아오듯 나에게도 짧은 인생, 정말 정성껏, 잘 가꾸며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의 상승세도 같이 왔다.
미래를 그리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모범생에 관한 글귀를 읽다가,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그래. 나 모범생처럼 살았지.’라고 떠올렸다. 그러다 깨달았다. 하나씩 하나씩 쪼개어 보니 모범생의 삶을 산 건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살”의 영역이다.
모범생처럼 살았다면, 지금의 살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고, 존재할 수도 없었을 거다.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누르면 팽팽하던 피부가 울퉁불퉁하게 바뀐다. 셀룰라이트가 나 여기 있지롱 하고 인사를 한다. 인바디는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간밤에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먹어 퉁퉁 부은 손을 마주한다. 그럴 때면, 내 자신이 한심해진다.
유독 살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이런 정신상태를 참지 못하고, 헬스장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이런 제가 너무 한심해요!!!
정신과에 가야 할까, 봐요.”
- “아닙니다. 예지회원님이 갈 곳은 백스쾃입니다.”
“주말에 너무 많이 먹어요.”
- “조절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은 요즘 핫하다는 다이어트법을 찬찬히 살피고 물었다.
“선생님, 혹시 요즘 많이들 관심 갖는 ㅇㅇㅇㅇ 다이어트 들어보셨어요?”
- “저는 그런 요상한... 정석으로 하시죠. 저는 정석으로만 합니다. 건강하게 챙겨 먹고, 운동을 자주 하시죠.”
헬스장 선생님은 몇십 개가 넘는 전 지점 대상 바디챌린지에서 1위를 2번 연속이나 만들어낸 분이다. 다른 순위의 수상도 여럿 만들어냈다. 모두 다른 회원분들로 말이다. 선생님도, 회원분들도 아주 훌륭하시다. 나는 헬스장 수강권 홀딩도 자주 하고, 클린식을 하지만, 점심 약속도 끊임없이 있고, 주말에도 잘 먹고, 두둑해질 때까지 먹는 건 다반사다.
선생님은 쳇바퀴를 도는 모습을 보여주며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예지회원님, 7일만 딱 식단을 해보세요. 그럼, 몸이 반응할 겁니다. 지금은 며칠 신경을 써서 좀 하고, 운동하고 ‘아! 열심히 했어!’라고 하지만 쳇바퀴처럼 돌고 돌아 제자리인 겁니다.
딱 7일만 이어서 해보세요.”
그리고 생각할 거리를 던지셨다.
“그런데 (다이어트가 안 되는 게) 외부요인 때문인지, 먹고 싶어 하시는 자기 스스로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질문을 듣자마자, 나는 외부요인과 내부요인 둘 다 때문이라고 답했다. 지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나’의 문제였다. 음식을 앞에 두고 만족지연을 할 줄 몰랐다. 아들에게 자기 통제(self-control)를 기르자며 인쇄까지 해서 매일 볼 수 있는 곳에 붙여놓고는 나는 스트레스와 음식 앞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외부요인도 없지 않겠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자초한 결과다. 누가 쑤셔 넣은 것도 아닌 내가 내 손으로 음식을 넣었다. 움직이지 말라 한 사람은 없었으므로 내가 안 움직인 거다.
신문 한편에 자리 잡은 문구에서 살 앞에 내가 더더욱 한심해지는 이유를 발견했다.
“모든 승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찬란한 승리는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며, 모든 패배 중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패배는 자기 자신에게 지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는 모두 자기 자신이라는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프랑스 철학자 <철학의 쓸모> 중에서. - 중앙일보 8월 28일 아침의 문장 중 발췌
나는 자신에게 져서 수치스러웠고 비참했던 거였다. 나에게 졌으니 한심하게 느낄 수밖에. 맛있는 음식은 맛있어서 먹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음식으로 풀었다. 정성껏 살고 싶다면서 나한테 너무 혹독하게 대했다. 미식가의 미(美)와 맛 미(味)라는 즉각적인 즐거움에 기대어서 말이다.
이제 나를 정말 아껴주고 싶다.
내 몸이 편안할 정도의 살만 갖고 싶다.
삶의 군더더기는 도려내고 싶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건강하게 맛있는 것을 오래도록 먹고 싶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삶이 바뀔 것 같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그저 나의 느낌이다. ‘살’이 해결된다면 삶을 대하는 내 태도의 정수가 아름다워질 것 같다.
4kg 덤벨을 들고 오버 헤드 프레스하고, 곧장 2kg 덤벨을 들고 사이드 레터럴 레이즈를 하는 나에게 호제가 말했다.
“그게 무거워? (2kg 덤벨을 번쩍 들어 나를 따라 하며) 이게 무겁다고?!”
승리욕에 자극받은 나는
“나, 진짜 몸짱 된다. 두고 봐라.”라고 외쳤다.
호제는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라며 되물었다.
“그래? 그럼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 몇 초에 보여줄 건데?”
-“한 3개월 뒤?”
“그럼 2024년 12월 31일 24시 0분 0초에 보여줘.”
- “그땐 자야지. 다른 시간으로 하자.“
“그래, 2024년 12월 31일 21시 0분 0초에 보여줘. 가만히 있어도 팔뚝에 근육이 볼록 튀어나오는 게 보일 정도로.”
한심함에서, 수치스러움에서, 비참함에서 벗어나야 할 시간이 정해졌다.
이번에 목표를 달성하면, 내 인생에 순풍이 마구 불어올 것 같다.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다.